반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시스템 전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뉴스룸은 지난 20년간 반도체 소자를 연구하고 있는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최리노 교수를 통해 반도체 시스템과 소자의 관계 및 발전사를 소개한다. 총 7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반도체의 개념과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칼럼 시리즈는 『최리노의 한 권으로 끝내는 반도체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하여 정리했다. 이 책은 반도체 역사부터 시스템과 소자의 발전까지 폭넓게 다루며 반도체 산업 및 시스템 전반을 소개하고 있다.
반도체는 부품이다. 부품은 그 자체로 쓰이지 못하고 어떤 제품(세트 또는 시스템) 내에서 사용된다. 그 제품이 추구하는 바는 반도체의 탄생과 발전을 가져왔고, 앞으로 나올 새로운 제품은 반도체의 성장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본 연재에서는 반도체를 시스템과 연결해 설명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발전 방향에 관해 7편에 걸쳐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 주)
반도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여러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1883년 영국 물리학자 마이클 페어데이(Michael Faraday)가 황화은(AgS)에서 반도체라는 물질의 특성을 처음 발견한 순간? 또는 1947년 벨 연구소(Bell Lab)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존 바딘(John Bardeen), 월터 브래튼(Walter Brattain) 3인에 의해 처음으로 반도체 기반 트랜지스터가 만들어진 순간?
필자는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반도체 집적회로가 만들어진 순간’을 꼽고 싶다.
집적할수록 무너지는 신뢰성… 숫자의 폭정에 맞닥뜨리다
1947년, 최초로 트랜지스터 반도체 소자가 만들어진 이래 전자 산업은 진공관 소자를 반도체 소자로 바꾸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 여러 전자제품에는 크고 깨지기 쉽고 사용 전력도 많이 들었던 진공관 소자를 사용했는데, 이제 오래 사용 가능하고 전력도 훨씬 덜 쓰는 반도체 소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도 집적회로가 만들어진 사건에 비하면 그 변화는 제한적이었다.
1만 8,000개의 진공관 소자를 연결하여 디지털 회로를 구성했던 최초의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과 반도체 소자가 나온 직후 만들어진 컴퓨터를 비교해 보자. 165m²(약 50평)의 공간을 차지했던 에니악에 비하면 반도체 소자를 이용한 컴퓨터 크기는 상당히 작았다. 물론 지금과 같이 손에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크기다.
▲ 개별 소자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진 컴퓨터(출처. wikipedia)
컴퓨터는 반도체 소자의 탄생보다는 집적회로가 만들어진 이후 더욱더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집적회로 탄생 이전의 전자회로는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반도체 소자(Discrete Device)를 직접 납땜으로 연결하거나 커넥터와 함께 인쇄 회로 기판에 손으로 납땜하여 특정한 역할을 하는 모듈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 방식은 수작업으로 해야 해서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고 생산성 증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 성능을 올리기 위해선 더 많은 단위 소자를 연결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많은 수의 단위 소자를 연결하면 그에 비례하여 납땜 조인트와 배선이 많아진다. 이렇게 많은 요소 중 단위 소자나 커넥터, 납땜 불량이 하나라도 발생하면 전체 시스템은 동작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신뢰성 문제가 생길 여지가 커지며 시스템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한 문제는 시스템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어서 ‘숫자의 폭정(Tyranny of Numbers)’이라고 부른다.
이 숫자의 폭정을 넘어서 더욱 성능 좋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모든 엔지니어의 목표가 되었다. 숫자의 폭정을 넘기 위해서는 단위 소자 연결을 보다 간단하게, 문제가 덜 생기는 방법으로 바꿔야 했다.
현대적 의미의 집적회로 공정이 탄생하다
많은 회사가 경쟁하는 가운데 실마리는 미국 중부 텍사스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벨 연구소에서 반도체 소자가 처음 발명된 후 1950년대 미국 전역에서는 반도체 소자로 새로운 전자제품을 만드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 TI)도 반도체 소자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 무렵 엔지니어 잭 킬비(Jack Kilby)가 입사한다. 직원 대부분이 여름휴가를 떠났으나 신입으로 연차가 없었던 킬비는 혼자 사무실에 나와 ‘숫자의 폭정’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한다. 저마늄(Germanium, 원소기호 Ge) 한 덩어리 조각 위에 트랜지스터, 캐퍼시터(Capacitor), 저항소자(Resistor Elements) 등 여러 가지 단위 소자를 함께 만들고 이 소자를 금으로 만든 실처럼 얇은 와이어로 모두 연결하는 제조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1958년 9월 킬비는 이 방법으로 만든 회로가 작동하는 것을 시현했고 이듬해 2월 특허를 출원한다. 이 방법은 전통적인 마이크로 모듈과 비교하여 훨씬 더 작은 사이즈로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에 비해 고장 확률이 낮았고 가격도 훨씬 저렴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킬비의 발명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와이어 본딩 방식의 배선은 이전에 비해 신뢰도를 높였으나 그래도 많은 수의 소자를 연결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같은 시기 캘리포니아에서도 비슷한 생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 Inc.)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rton Noyce)였다.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기술 개발을 총괄했던 노이스는 진 호에르니(Jean Hoerni)가 개발한 평면 소자 공정 기술에 주목했다. 입체 형태의 트랜지스터를 만든 후 노출된 상태로 연결하는 것이 아니고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산화막을 위에 남겨 트랜지스터를 보호하는 기술이었다. 당시만 해도 공정이 좋지 못한 까닭에 질 낮은 산화막이 트랜지스터를 오염시켜 망가뜨린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 반도체 개별 소자(좌)와 집적회로 Intel 4004 CPU(우)(출처. wikipedia)
하지만 기술 발전으로 질 좋은 산화막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산화막으로 트랜지스터를 덮으면 표면이 편평해진다. 노이스는 이 평면 소자 공정 기술의 편평한 면에 주목했다.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레지스터, 축전기 등 단위 소자를 실리콘 위에 한꺼번에 만들고 그 위를 산화막으로 덮은 후에 편평한 산화막 위에 금속을 증착하고 식각하는 방식으로 배선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배선을 만들어서 연결해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를 제작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현대적 의미의 집적회로 공정의 시작이었다.
이로써 위에 널려 있는 연결선을 없애 깔끔한 칩(Monolithic Chip) 구현이 가능해졌다. 단일 집적회로 공정이 가능해지며 전자 산업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완성품이 아닌 부품을 만드는 산업이 압도적으로 발전하며 오히려 시스템 산업을 이끄는 시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니악은 50평 정도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집적회로는 소자와 배선을 동시에 작은 공간에 집어넣을 수 있어서 엄청난 소형화가 가능했다. 1971년 출시된 최초의 상업용 집적회로 CPU인 ‘Intel 4004’는 에니악보다 약 17배 빠른 성능이었지만, 손톱만 한 크기로 출시됐다. 총 2,300개의 트랜지스터가 평면에 집적되어 연결된 Intel 4004는 1W 정도의 전력을 소모했다. 17만 4,000W를 소모하던 에니악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전력을 쓰는 것이다. 소자 하나하나가 사용하는 전력도 이전의 개별 소자보다 감소했지만 배선 길이가 짧아지며 줄어든 전력도 매우 크다. 개별 칩을 연결하는 배선은 적어도 수 ㎝가 되므로 집적회로 내에서 연결하는 배선 길이인 수백 ㎛ ~ 수 ㎜와 비교하면 매우 큰 전력이 소모됨을 알 수 있다.
가격도 개별 소자를 연결하여 만드는 것과 비교하면 장점 중 하나다. 물론 집적회로의 설계 비용이 추가가 되고 매우 비싼 제조 공정 장비가 필요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물량을 대량 생산하게 되면 집적회로의 가격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해진다.
부피와 소모 전력, 가격이 획기적으로 줄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제품도 출현했다. 컴퓨터는 과거 회사나 연구소 등에서만 쓸 수 있는 기업용 제품이었다. 그러나 집적회로가 나오면서 일반 가정에서도 감당할 만한 크기와 전력이 된 것이다. 그래서 컴퓨터는 개인이 사용하는 기계로 변화했다. 이렇게 반도체라는 ‘부품 성능의 발전’이 ‘새로운 시스템의 탄생’을 이끄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집적회로, 소자 미세화 시대로 나아가다
집적회로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소자 미세화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 있다. 소자 미세화 이야기에 앞서, 집적 공정에 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반도체 집적 공정은 평면 공정, 조각, 인쇄 공정, 융단 폭격 등으로 특징지어 이야기할 수 있다.
▲ 반도체 소자 집적 공정과 아파트 단지 건축의 비유
이해를 돕기 위해 아파트 단지 짓는 것을 예를 들겠다. 반도체 집적 공정으로 아파트 단지를 짓는다면 이렇게 할 것이다. 우선 전체 단지 땅을 평평하게 만든다. 그 위에 시멘트를 일정한 두께로 전체 단지를 완전히 덮는다. 시멘트가 남아 있어야 할 부분(벽이 될 부분)과 없어야 할 부분(집 내, 외부 공간이 될 부분)을 인쇄하여 표시하고 벽이 될 부분을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덮는다. 이후 단지를 융단 폭격하여 보호가 안 되어 있는 시멘트 부분을 모두 날려버린다. 이렇게 하면 벽만 남고 나머지 부분의 시멘트는 날아가게 된다.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며 아파트 전체 동의 한 층, 한 층을 동시에 쌓아 올린다. 현재 건설 공법과는 달리 아파트 단지의 모든 동을 한꺼번에 지어 올라가는 식이다.
어찌 보면 재료를 낭비하는 방법으로 보인다. 또 아파트 단지 전체 면적을 처리해야 하므로 필요한 기계 장비도 매우 비쌀 것이다. 왜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야 할까? 아파트 10동을 짓는다면 현재와 같이 한 동, 한 동 짓는 건설 공법이 재료도 아끼고 훨씬 경제적이다. 그러나 지어야 할 아파트가 수만 동이 된다면, 아니 수백억 동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아파트의 동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 동, 한 동 만드는 식으로는 이 단지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반도체 집적 공정을 이용해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때 덮는 공정을 증착, 필요한 부분과 필요 없는 부분을 인쇄하는 공정을 리소그라피(Lithography), 깎아내는 공정을 식각이라고 부른다.
▲ 크기가 다른 다이(Die)를 갖고 있는 웨이퍼
이러한 현대적인 반도체 집적 공정의 특징은 한 웨이퍼 위에 소자를 만드는 비용이 그 안에 그려진 소자의 수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비슷하다는 점이다. 즉, 웨이퍼 위에 같은 성능의 다이(Die, 칩을 만드는 단위) 한 개를 그려 넣고 만드는 것이나 1,000개를 만드는 것이나 비슷한 비용이 든다. 그러나 한 개를 만드는 비용을 비교하면 1/1,000이 되므로 굉장한 원가 절감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집적회로의 시대에는 트랜지스터와 같은 단위 소자를 작게 만들어 같은 면적에 더 많은 다이를 넣는 회사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단위 소자 크기를 작게 만드는 것은 회사에만 유리한 것이 아니다. 소자를 더 작은 사이즈로 만들면 구동 전류가 커지며 더욱 빠른 성능의 소자가 된다. 그래서 칩 성능이 향상된다. 이처럼 성능 좋은 칩은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킨다. 결국, 스케일링(Scaling)이라 불리는 소자 미세화는 회사와 고객 모두를 좋게 만드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는 소자를 작게 만드는 데 총력을 다하는 시대가 된다.
집적회로를 가장 많이 사용한 전자제품은 컴퓨터다. 컴퓨터용 CPU나 메모리를 만드는 데는 집적회로가 큰 역할을 했다. CPU와 같은 논리 회로는 우리의 두뇌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논리 연산[관련기사], 그리고 덧셈과 뺄셈, 나눗셈, 곱셈 등의 수리 연산을 해야 한다. 필요한 연산의 숫자가 늘어나며 사용되는 스위치 소자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이러한 스위치 소자의 증가를 가능하게 한 것이 집적회로다. 집적회로로 만들어지는 메모리 역시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집적하는 메모리 셀의 숫자를 늘려야 했다. 소자 미세화를 통해서 셀의 크기를 줄여 더욱 많은 셀을 같은 면적에 넣는 것이다.
▲ 반도체 산업의 선순환
덕분에 현재 우리는 엄청난 수의 단위 소자(트랜지스터, 캐퍼시터 등)를 한 칩에 넣고, 새로운 제품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낸드플래시의 경우 기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대체하고, SSD 등 새로운 시장도 형성했다.
이처럼 소자 미세화를 통해 반도체 성능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제품 시장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다시 반도체의 발전을 이끄는 선순환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집적회로의 등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