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시스템 전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뉴스룸은 지난 20년간 반도체 소자를 연구하고 있는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최리노 교수를 통해 반도체 시스템과 소자의 관계 및 발전사를 소개한다. 총 7편으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반도체의 개념과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칼럼 시리즈는 『최리노의 한 권으로 끝내는 반도체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하여 정리했다. 이 책은 반도체 역사부터 시스템과 소자의 발전까지 폭넓게 다루며 반도체 산업 및 시스템 전반을 소개하고 있다.

반도체는 부품이다. 부품은 그 자체로 쓰이지 못하고 어떤 제품(세트 또는 시스템) 내에서 사용된다. 시스템이 추구하는 바가 그 부품인 반도체의 탄생과 발전을 가져왔고, 앞으로 나올 새로운 시스템은 반도체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본 연재에서는 반도체를 시스템과 연결해 설명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발전 방향에 관해 7편에 걸쳐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 주)

얼마 전 방송에서 ‘반도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반도체는 ‘반도체 소자’를 일컫는 것이며, 반도체라는 물질을 이용해 전기적 신호를 받고 어떠한 기능(Function)을 수행하도록 만든 장치라고 답했다. 당시 진행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한번 질문하여 곤란했던 적이 있다. 그 경험으로 반도체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 분야를 전문하지 않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고민 끝에 찾은 답은 반도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도체가 왜 쓰이게 되었는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부품, ‘예컨대 에어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그때 ‘충격을 받으면 내부 화약이 터져서 기체를 방출하여 부풀어 오르게 만든 장치’라고 답한다면 이해가 될까? 당연히 에어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와 자동차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반도체에 대한 설명 역시 이 부품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반도체를 등장시킨 사건 1 : 통신 시스템과 진공관

반도체라는 부품을 가장 먼저 필요로 한 곳은 전화망 구축을 위한 ‘통신 시스템’이었다. 19세기 말 전구와 전기의 송배전 시스템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전기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시스템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멀리 있는 사람과 만나지 않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 전신 또한 전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전신이 발전할수록 사람의 목소리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다. 이 바람을 해결해 준 사람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다.

벨은 음성의 떨림을 기록하고 전기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알아냈고, 결국 1876년 전화기 특허를 출원한다. 벨은 특허를 기반으로 Bell Telephone Company(AT&T의 전신)를 세우고 전화 사업을 시작한다. 사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미 대륙을 전부 연결하는 전국망 서비스가 필요했다.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 연결하는 통화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는 구리선을 통해 전달되며 약화하는 전기 신호를 증폭하는 ‘리피터(Repeater)’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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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치는 1907년 미국의 발명가 리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가 개발한 ‘3극 진공관’이 만들어지며 가능해졌다. 백열전구에 양극 금속 전극을 넣은 이전 진공관과 달리 3극 진공관은, 음극 필라멘트와 양극 금속 전극 사이에 금속망(Grid)이 추가된 형태였다. 이 진공관은 금속망에 들어오는 작은 전기신호로 음극 필라멘트와 양극 금속 전극 사이의 전류를 조절하여 신호를 증폭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3극 진공관 증폭 소자를 이용해 리피터뿐만 아니라 무선통신, 라디오, TV 등 현재 전자 산업의 모태가 되는 모든 시스템을 만들게 된다.

반도체를 등장시킨 사건 2 : 부울대수와 트랜지스터 그리고 컴퓨터 시스템

컴퓨터 시스템’의 시초인 전자계산기에도 진공관이 쓰였다. 이에 앞서, 계산하는 기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1854년 영국 수학자 조지 부울(George Boole)의 ‘부울대수’에서 출발했다. 조지 부울은 명제의 참과 거짓을 이진값인 1과 0에 대응시키고 논리 연산을 하는 새로운 대수를 만들었다. 예컨대 도로 가로등이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 켜진다고 가정해 보자.

해가 졌는데 차가 다니면 가로등을 켠다
비가 내리면 가로등을 켠다

해가 뜨는 걸 알 수 있는 센서(A), 차가 다니는 걸 알 수 있는 센서(B), 비가 내리는 걸 알 수 있는 센서(C)가 있다면, 각 센서와 가로등 상태를 아래 표의 경우에 참(1)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 출력(Output)이 나오도록 부울대수 식으로 나타내면  rino-choi-column-6가 된다. 이것을 회로로 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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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대수의 참과 거짓을 전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상태에 대응하면 부울대수가 전기적으로 구현된다. 1937년 클로드 섀넌(Claude Elwood Shannon)은 스위치 소자*로 구성된 전기 회로로 부울대수 푸는 법을 정리했다. 이를 활용하면 어떠한 논리적, 수리적 연산도 모두 스위치로 표현할 수 있었다. 디지털 회로 설계의 시작이자 자동화 장치의 탄생이었다.

* 스위치 소자 : 스위칭(Switching)은 전기 신호의 온·오프를 의미. 스위치 소자는 트랜지스터와 같이 전기 신호를 넣고 뺄 수 있는 소자를 말함

초기 전자계산기에 사용한 스위치는 3극 진공관 소자였다. 증폭하지 않고 같은 크기의 신호를 내도록 하면 되므로 증폭 소자는 스위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진공관 소자는 증폭, 스위치, 정류, 발전, 발광, 수광 등 반도체 소자가 나오기 전까지 현재 반도체 소자가 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진공관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필라멘트에서 나오는 전자를 모아서 전류를 흐르게 하므로 필라멘트 온도를 높게 해야 한다. 또한, 많은 전력을 사용했고, 뜨거워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해 빠르게 작동할 수 없었다. 고온에서 사용하므로 중간에 필라멘트가 못 견디고 끊어져 망가지는 것도 문제였다. 외관이 유리로 만들어져서 운송이나 보관 중 쉽게 깨지는 문제도 있었다.

반도체역사, 벨연구소트랜지스터의 최초 발명자로 인정받은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왼쪽부터) 출처. Wikimedia Commons

때문에 ‘어떻게 하면 유통과 보관이 용이하고 오래 사용하면서도 전기를 적게 쓰는 증폭기를 만들까’가 큰 숙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Bell Telephone Company는 벨 연구소(Bell Labs)를 만들고 이 숙제를 연구했다. 마침내 1947년 12월 16일 벨 연구소는 반도체인 저마늄(Germanium)에 금(Gold)을 붙여서 전기 신호를 증폭하는 고체 기반 소자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이 소자에 ‘트랜지스터(Transistor)’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탄생한 트랜지스터는 진공관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며 전자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컴퓨터 시스템에서 수요가 넘쳤는데, 당시 에니악(ENIAC)과 같은 초기 컴퓨터를 가동하기 위해선 많은 전력과 넓은 공간이 필수였다. 이에 더 작고 전기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스위치 소자가 필요했다. 트랜지스터는 이러한 수요를 맞춰주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후 트랜지스터는 컴퓨터 논리 연산을 위한 스위치 소자로 폭발적인 수요를 갖게 된다.

반도체를 등장시킨 사건 3 : 폰노이만 구조

훗날 트랜지스터는 집적 소자로 발전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체’ 형태를 띠게 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사건이 폰노이만 구조의 등장이다. 사실 에니악은 현대의 컴퓨터와 같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컴퓨터’는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논리 회로의 구성을 바꿔야 했다. 소자를 연결하고 있던 전선을 다시 배열해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것은 시간과 인력이 매우 필요한 작업이므로 사람들은 컴퓨터의 구성(하드웨어)은 그냥 두고 소프트웨어만 바꾸어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범용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범용 컴퓨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존 폰노이만(John von Neumann)이다. 그는 IAS 머신(IAS Machine)이라는 초기 범용 컴퓨터 개발에 참여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본인이 제안한 ‘폰노이만 구조(아키텍처) 바탕으로 컴퓨터를 만들도록 감독했다. 이 폰노이만 구조는 이후에 나온 거의 모든 컴퓨터의 기본 구조가 되었다.

현재의 시각으로 봐서는 너무 당연한 구조이나 최초로 컴퓨터를 만들 때는 폰노이만 구조와 함께 다른 후보가 경쟁했다. 그중에는 명령어를 저장하는 메모리와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를 분리한 ‘하버드 구조(아키텍처)’도 있었다. 이 구조는 프로그램을 불러들이는 통로와 데이터를 저장하는 통로가 달라 병렬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보다 많은 전기 회로가 필요하고 복잡한 구성이 단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폰노이만 구조가 경쟁에서 승리하며, 현재까지도 범용 컴퓨터의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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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노이만 구조는 시스템을 통제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CPU와 사용할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로 구성된다. CPU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명령어를 해석해 연산하고, 외부로 출력하는 역할을 한다. 컴퓨터의 모든 작동 과정은 이 CPU에 의해 제어된다. CPU는 뒤에서 다룰 논리 소자로 구성되어 있고, 안에는 많은 수의 스위치 소자가 결합되어 있다.

메모리에는 CPU에서 사용할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저장된다. 모든 CPU는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불러와 실행한다. 그러므로 메모리에 저장된 프로그램만 바꾸면 하드웨어 변경 없이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CPU는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메모리의 데이터를 꺼내고, 해독하고, 실행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그 이후 발생한 데이터를 다시 메모리에 저장하거나 다음 명령어에 사용한다. 컴퓨터 외에도 간단한 밥솥부터 스마트폰까지 많은 제품이 이와 같은 폰노이만 구조로 이뤄져 있다.

CPU로 대표되는 논리 소자는 스위치를 연결해 논리 연산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수의 스위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연결된 스위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복잡한 연산과 제어가 가능하므로 좋은 스위치를 많이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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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스위치로 사용했던 진공관 소자는 성능, 전력 소모, 면적, 비용(Performance, Power, Area, Cost) 측면에서 반도체 소자에 모두 뒤지며 서서히 자리를 내주게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반도체 소자는 진공관 소자와 달리 집적 소자(Integrated Circuit, IC)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집적 소자는 소자 미세화를 통해 어마어마한 숫자의 스위치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소자 미세화를 통해 반도체 스위치는 점점 더 빠른 속도의 스위치가 된다. 그래서 반도체 집적 소자가 발전하면 엄청난 계산을 매우 빠르게 연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반도체 소자와 컴퓨터의 발전은 서로 밀고 당기며 마치 이인삼각처럼 함께 발전해 나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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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는 정보를 저장하는 장치다. 정보를 2진수로 바꾸어(문자들도 번호를 주어서 2진수로 바꿀 수 있다) 1과 0의 상태를 저장시켜 놓는다. 두 가지 명확한 상태를 안정적으로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메모리가 될 수 있다. 높거나 낮은 물의 높이, 주판의 알이 내려가 있거나 올라가 있는 것도 일종의 메모리다. 메모리에서 중요한 것은 저장 용량, 즉 얼마나 많이 저장할 수 있느냐다. 반도체 소자의 미세 집적 기술을 받아들이며 메모리 반도체 역시 기하급수적 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폰노이만 구조로 인해 현재 반도체 산업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CPU를 만드는 인텔·AMD,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를 만드는 애플·퀄컴·삼성전자·미디어텍 등 시스템 반도체 회사가 등장했고,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 등 메모리 기업이 등장했다. 폰노이만 구조는 이들이 각각 전문화되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반도체는 무엇인가? 반도체는 부품이다. 반도체는 통신 시스템 증폭기를 만들기 위해 발명된 부품이다. 그 후 컴퓨터 등 폰노이만 구조의 전자제품이 발명되며 반도체는 논리 연산을 수행하는 스위치로 폭발적으로 사용됐다. 또한, 메모리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역할로도 사용하게 된 부품이다.

이처럼 우리가 반도체 소자를 이해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제품 기능에 대한 요구가 먼저 있었으며, 이를 만족하기 위해 소자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앞으로 반도체는 또 다른 시스템의 부품으로 사용될 것이다. 요즘 떠오르는 두뇌 모사 컴퓨팅(Neuromorphic Computing) 등은 폰노이만 구조의 시스템이 아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다른 요구가 있고 반도체 소자는 요구에 맞게 발전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이에 대한 주제도 다루도록 하겠다.

※ 본 칼럼은 반도체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하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최리노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