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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원과 스트리밍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세대는 언제 어디서나 몇 번의 손가락 터치만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손톱만한 작은 크기의 반도체 칩 안에 방대한 양의 음반을 담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이렇듯 반도체의 발전은 우리 생활을 놀라울 정도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은 음악을 통해 시간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음악 저장 매체 진화의 견인차! 반도체 이야기도 함께 하면서 말이죠.

음악 저장 매체는 어떻게 진화해왔을까?

“당신의 주머니 속 1천곡의 노래.” 2001년 발매된 애플 아이팟의 첫 번째 광고문구입니다. 약 10곡을 한 장의 앨범으로 본다면, 앨범 100장을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의미였죠. 64기가바이트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의 관점에서는 그저 귀여울 뿐이지만, 전문가들은 아이팟의 성공 배경을 그 아이코닉한 디자인과 더불어 MP3 플레이어의 대용량화에서 찾습니다.

CD 시대의 음악 애호가라면, 최대 30장까지 들어가는 CD 케이스는 들고 다녔어요. 카세트테이프의 시대에는 겨우 10장쯤이었죠. 바이닐레코드의 시대요? 바이닐레코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면, 읽지 않는 책을 들고 다니는 습관과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MP3의 시대를 넘어 스트리밍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앨범이 몇 장 들어가는지는 무의미해졌습니다. 어떤 음악을 듣는 가에 앞서 어떤 음악 매체를 선택하는가, 어떤 매체가 내게 적합한가? 라는 질문이 등장한 것이죠. 동시대의 관점에서 다양한 음악 매체를 살펴본다면 답을 찾아내기 좀 더 수월하겠네요. 

하나. 아날로그의 역습 카세트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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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인터넷을 떠돌던 이미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와 연필이 나란히 놓인 사진 위로, “미래 세대는 이 독특한 관계에 대해 절대 알지 못할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죠.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셨다면 ‘미래 세대’도 이젠 아실지 모르겠네요. 예컨대 A면 첫 곡을 다시 들으려면 테이프를 처음으로 감아야하는데,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의 배터리 용량은 한정적이었습니다. 배터리를 아끼고자 카세트테이프의 홈에 연필을 끼워서 직접 돌렸던 거죠.

카세트테이프가 재생된다는 건 음성 신호가 저장되어있는 마그네틱테이프가 이 홈에 맞물린 카세트 플레이어의 모터에 의해 돌아가면서 헤드를 통해 읽힌다는 의미였습니다. 음악을 골라서 들을 수 없었고, 너무 많이 들으면 열화로 인해 음질이 손상되었지만, 바이닐레코드의 시대를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음악을 밖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CD플레이어와 MP3 플레이어, 스마트폰의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일상이 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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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2010년, 소니가 워크맨 생산 중단을 발표합니다. 2012년, 소니는 어학용으로 쓰이던 카세트 레코더마저 단종시켰죠.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카세트테이프 생산량은 2007년 최저점을 찍은 후 매년 급등하고 있습니다. 영국 내 음반 판매량 자료에 따르면, 2007년 2만5천장이 판매되었고, 2015년에는 무려 2백10만장이 팔렸습니다. 엑소의 CD 판매량이 최대 37만장인 시대에 말이죠.

카세트테이프 판매의 호조는 바이닐레코드의 부활과 함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음악이 비가시적이고 비물리적인 매체로 아무렇게나 소비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바이닐레코드의 부활을 불러왔지만, 바이닐레코드를 충분히 수집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는 장비를 갖춘 사용자는 흔치 않았던 것이죠. 요즘의 카세트테이프에는 거의 90퍼센트 이상 다운로드 코드가 들어갑니다. 즉, 음악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물리적인 매체로 소유할 수 있고,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있다면 아날로그 특유의 따뜻하고 두꺼운 소리를 즐길 수 있으며, 아니더라도 좋은 음질의 파일로 저장할 수 있습니다. 좀 이상한 방식의 소비인가요? 하지만 한때 즐겨 입다가 유행이 지났거나 해졌거나 살이 쪄서 입지 않는 옷, 하지만 왠지 버릴 수는 없는 옷이 집에 얼마나 많은가요. 사용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거죠.

둘. CD플레이어의 몰락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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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가수는 CD로 앨범을 내는데, 음반 업계 관계자들은 CD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CD의 죽음이라기보다 CD 플레이어의 죽음입니다. CD의 생명연장 장치였던 데스크톱 컴퓨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울트라북의 유행과 함께 랩톱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도 CD롬 드라이브입니다. 휴대용 저장장치로서의 역할은 외장하드와 외장 SSD, USB 메모리가 충분히 대신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MP3 플레이어의 시대부터 뒷전으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 좋아하는 음반은 구입해야한다는 감각이라도 있었습니다. CD플레이어가 없는 이상, CD는 기념품과 다를 바 없는 수집 취미의 대상입니다. CD는 카세트테이프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하는 매체였습니다. 원하는 곡을 선택할 수 있고, 반영구적인 형식이었죠. 물리적인 매체라는 점에서 카세트테이프, 바이닐레코드와 딱히 다를 바도 없었고요. 음반을 소비하는 층에서 생겨난 디지털에 대한 막연한 반감, 효율(카세트테이프)과 사치(바이닐레코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위상 탓에 급격하게 소외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MP3나 스트리밍보다 좋은 음질로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무손실 음원에 가리고 말았습니다. 업계에서는 CD가 홍보나 기록의 수단으로 명맥을 유지할 것이라 보고있습니다. 하나 추가하자면, 시대보다는 자신의 습관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들도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셋. 추억을 되감아 시대를 역행하다! 바이닐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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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잘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만, 전년 대비 전체판매량이 50% 증가하는 시장, 지난 5년간 전체판매량이 260% 높아진 시장이라면 괜찮은 것 아닌가요? 미국 내 집계이긴 합니다만, 바이닐레코드 특유의 활발한 중고 시장을 제외하고도 그렇습니다. 바이닐레코드 시장의 폭발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우화 같습니다.

지금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켜면 곧바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당장 바이닐레코드를 산다고 해서 삶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는데, 1인 가구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공간이 충분하지 않은 원룸 가구가 많아지고 있는데), 이치에 맞지 않게 바이닐레코드가 점점 더 팔려나갑니다. 가장 작은 캔버스 크기(가로세로 30센티미터)의 아트워크를 제공하는 슬리브, 바늘이 바이닐레코드의 그루브를 타고 흐르면서 만들어지는 높은 음압의 소리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시나요? 끼어들 수 없는, 각자 결정해야할 문제겠죠. 다만 유행과 가치가 자주 혼동되고, 그것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 둘을 분명히 구분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음원이나 CD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인류가 만들어낸 수십 년간의 음악 유산을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가진 분, 귀를 울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에게는 바이닐레코드야말로 지름길일 것입니다.

 

넷. 지하철에서 하나씩 들고 다녔던 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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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128메가바이트 용량의 MP3 플레이어를 꽤 오랫동안 들고 다녔습니다. 약 20곡을 기준으로, 어느 곡을 지우고 어느 곡을 남길 것인지 등굣길마다 고민했었죠. 앞서 아이팟이 MP3 플레이어의 대용량화로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1세대 아이팟의 용량이 5기가바이트였습니다. 정확히 제가 쓰던 128메가바이트 MP3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던 시절에 나왔죠. 아이팟이 몰고 온 충격을 실감하실 수 있으려나요?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러서도 아이팟은 ‘아이팟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최대 160기가바이트 용량까지 지원하는데요.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애플은 아이팟 클래식에 더 이상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하드디스크에 있었습니다. 아이팟 클래식에는 도시바의 1.8인치 하드디스크가 탑재됐는데, 도시바가 이 제품을 단종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첨단 반도체 기술의 결정체인 낸드 플래시 메모리, microSD 카드, SSD까지 있었던 마당에 왠 하드디스크가 걸림돌이었나 싶죠? 결코 애플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져 있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아이폰이) 아이팟 클래식의 시장을 잠식해버린 게 컸죠. 이미 DAP(Digital Audio Player)라고 불리는, 무손실 음원 플레이어도 유통되고 있었어요. 스포티파이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고, 당대의 젊은이들이 음악을 찾아듣는 곳은 무엇보다 사운드클라우드나 유튜브였죠. FLAC 등의 무손실 음원을 지원하지 않아 빈축을 샀던 아이팟 클래식으로서는 몇 걸음 이상 뒤쳐진 셈이었습니다. MP3 플레이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고, 스마트폰을 잘못 쓴 게 아닌가 싶은 요즘이니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다섯.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걸작 무손실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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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손실 음원을 제공하는 아이리버 Asetell&Kern의 DAP

가장 보편적인 무손실 압축 음원인 FLAC을 예로 들면 좋겠습니다. 압축률에 따라 다르겠지만, 320Kbps MP3를 기준으로 했을 때 FLAC의 용량이 약 세 배쯤 큽니다. 4분짜리 곡이라면 320Kbps MP3가 약 10메가바이트, FLAC이라면 약 30메가바이트가 되는 거죠. 10곡이 수록된 앨범 한 장이면 300메가입니다. DAP는 필연적으로 고용량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고밀도화, 저가격화가 DAP를 가능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특징이 뭔가요. 하드디스크 보다 작고 가벼우며, 직사광선, 고온, 습기는 물론 충격에도 강하다는 점입니다. 휴대용 기기에 쓰기에 더없이 적절했죠.

DAP가 대중화되면서 플래그십 스마트폰도 무손실 음원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요. 스마트폰이 고용량 낸드 플래시 메모리와 함께 microSD카드까지 지원하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유명무실했을 겁니다. 그렇게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부터 최소 샘플링 주파수 2.8Mhz의 무시무시한 DSD 포맷까지 골라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음악은 소유나 이해가 아니라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감상하는데 그 대부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풍요로운 시대가 분명합니다.

 

MP3 플레이어의 시대를 통해 음악이 퇴행했다는 비판이 2000년대 내내 있어왔지만, 언젠가부터 쏙 들어가고 없습니다. 퇴행하지 않았다고 단언할만한 근거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음악 매체 다양성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일 겁니다. 음악을 찾아듣는 게 예전만큼 값진 일은 아닐지 몰라도 선택권은 여러분에게 있다고, 음악 매체 다양성의 시대는 말하고 있습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잡지

정우영 피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