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에나 최고를 뽑는 자리가 있죠. 꼭 경진대회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행사 말입니다. 조만간 열릴 강원도 평창 동계패럴림픽이 대표적입니다. 반도체 분야에도 역시 ‘국제 고체 회로 학술회의(International Solid-State Circuit Conference, ISSCC) 가 있습니다. 내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며, 대회 주제는 ‘사회화된 세상을 이루는 실리콘(Silicon Engineering a Social World)’ 이라고 합니다. SK하이닉스는 이번 ISSCC에서 ‘반도체 국가대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합니다. 과연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 ISSCC서 웃었다
▲ 첫번째 이미지 : 2017년 열린 국제 고체 회로 학술회의(ISSCC) 컨퍼런스 / 두번째 이미지 : ISSCC 로고 (출처: ISSCC)
ISSCC는 세계적으로 가장 큰 반도체 설계 학술대회로 지난 1954년 처음 설립돼 올해로 65회째를 맞이했습니다.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반도체 역사에 있어서도 굵직한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습니다. 매년 25개국, 4000명 이상의 학자와 연구원이 실리콘밸리에 모여 회로 설계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와 정보를 교환하고 반도체 산업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올해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논문 채택 2위에 오른 것인데요. 물론 숫자에 있어서도 34편이 채택, 지난해 기록(25편)을 가뿐하게 뛰어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611편의 논문이 제출됐고 이 가운데 202편만 채택됐는데, 우리나라가 25편이라는 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참고로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분과에서 3편의 논문을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D램, 낸드플래시와 같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초강세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경쟁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죠. 우리나라에서 제출된 논문만 채택된 경우가 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분과별로는 메모리(8편)가 가장 많았으며 이미지와 디스플레이 센서를 포함한 IMMD(6편), 파워매니지먼트(6편), 디지털 서킷(3편), 아날로그(2편) 순이었습니다.
더 빠르게! 초고속 D램
메모리 분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올해는 총 4개 세션에서 15편의 논문이 발표됐는데요. 아시아에서 14편, 북미에서 1편으로 구성됐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14편의 논문에서 8편이 한국에서 나왔습니다. D램 세션 5편 중 5편, 플래시 메모리 세션의 3편 중 2편이 해당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에서 연구개발(R&D)을 하지 않으면 지구상 모든 디지털 기기의 메모리 용량은 늘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SK하이닉스는 어떤 논문을 선보였는지 궁금해지는데요. SK하이닉스는 영원한 맞수(?) 삼성전자와 함께 16Gbps 입출력(I/O) 속도를 가진 GDDR6 D램을 발표했습니다. GDDR6는 이전 시간에 자세히 설명한 바 있는데요. 고속으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그래픽 전용 D램입니다. 내년에 선보일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함께 궁합을 맞출 예정이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선보인 GDDR6는 목표가 동일합니다. 누가 더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SK하이닉스는 16Gbps, 삼성전자가 18Gbps의 사양으로 각각 내놨습니다. 수치로 보면 삼성전자가 근소한 차이로 더 빨랐네요. SK하이닉스가 올해 4월 세계 최초로 GDDR6 개발을 완료했다고 발표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SK하이닉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무려 341GB/sec(초)의 속도를 가진 ‘2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2)’를 내놨습니다. GDDR6의 속도가 16Gbps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핀(Pin) 1개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GPU의 메모리 버스가 384비트라고 가정하면 최대 768GB/sec(16×384÷8)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한 겁니다.
▲ SK하이닉스는 HBM의 원조다. ISSCC 2018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HBM2 메모리를 내놨다. (출처: SK하이닉스)
그렇다면 HBM2는 어떨까요? 341GB/sec이니 GDDR6의 768GB/sec보다 성능이 낮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비트(Bit)와 바이트(Byte)는 서로 단위가 다르죠. 8비트(b)는 1바이트(B)입니다. 따라서 SK하이닉스가 내놓은 HBM2는 메모리 버스를 조금만 늘리면 GDDR6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속도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삼성전자가 제출한 HBM2 논문을 엿보면 정답이 나옵니다. 당시 삼성전자는 20나노 기반의 307GB/sec의 HBM2 논문으로 ISSCC에 채택됐습니다. 이번에는 SK하이닉스가 34GB/sec 더 높은 성능을 내는 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기왕 HBM2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GDDR6도 그렇고 왜 이렇게 대역폭에 목을 매는 걸까요? 바로 중앙처리장치(CPU)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CPU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작동하는데, 메모리는 뒤를 따라가기가 벅찹니다. 바로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CPU 내부에 L1, L2, L3와 같인 S램 기반의 버퍼(캐시) 메모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병목현상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바꿔 말하면 메모리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가 사용하는 PC와 스마트폰 성능은 대폭 높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에서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로 교체했을 때처럼 사용자가 피부로 느낄 정도죠.
이번에는 용량, 칩 하나당 2GB
▲ D램 미세공정이 정교해질수록 모듈 하나에 장착할 수 있는 칩의 개수는 유지하면서도 용량은 크게 늘릴 수 있다. (출처: SK하이닉스)
GDDR6, HBM2에 이어서 SK하이닉스의 마지막 논문은 핀 1개당 3.2Gbps의 속도를 내면서도 용량은 16Gb를 구현한 DDR4 SD램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D램 용량을 극복하기 위해 실리콘관통전극(Through Silicon Via, TSV) 기술을 활용했습니다. HBM도 이 기술로 용량을 크게 늘렸습니다. 하지만 TSV는 인터포저에 들어가는 가격이 높은 데다가 아직까지 만족할만한 수율은 아닙니다. HBM이 고가 GPU나 인공지능(AI) 서버를 위주로 채택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SK하이닉스의 16Gb DDR4 SD램은 TSV가 필요 없이 고용량 D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칩 하나당 2GB의 용량 구현이 가능합니다. 보통 PC용 D램 모듈이 단면 8개, 양면 16개의 칩을 사용하니까 최대 16GB로 제작할 수 있겠네요. 메모리 슬롯이 4개인 PC라면 64GB(16×4)의 메모리 용량을 가지는 겁니다. 서버용 D램 모듈은 PC보다 장착되는 칩의 개수가 훨씬 많은데요. 단면으로 20개, 양면으로 40개가 사용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 경우 40개의 칩을 사용한다면 무려 D램 모듈 하나의 용량은 640GB(16×40)에 달합니다. D램 모듈을 2개만 써도 1280GB, 그러니까 1.25TB의 메모리 용량이 됩니다.
▲ D램은 커패시터 용량을 어떻게 늘리면서 AR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달렸다. (출처: SK하이닉스)
D램 용량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미세공정에 힘을 쏟았다는 방증입니다. 반도체 업계가 성장해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웨이퍼 한 장에서 뽑아내는 반도체 칩을 늘리면서 성능을 높여왔던 것이 핵심이죠. 특히 D램은 CPU나 GPU 등 시스템 반도체와 달리 커패시터의 A/R(Aspect Ratio) 문제로 개발 작업에 어려움이 큽니다. 전하 저장 유무로 1과 0을 판단하는 커패시터 용량을 늘리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커패시터 용량이 줄어들면 데이터 보관 시간이 짧아지고 전력 누출량은 증가해 불량률이 높아집니다. D램 업계는 좁아진 셀 면적 위에서 커패시터를 수직으로 길쭉하게 올리는 방법(3D, 적층)으로 용량을 사수해왔지만 10나노급 D램에서는 이 방법도 한계에 다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번 16Gb 용량의 D램으로 또 다시 한계극복을 해냈네요.
반도체 올림픽, 더 큰 세상을 보다
ISSCC에서 우리나라는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메모리 반도체에만 너무 치중되어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물론 다양한 분과에서 골고루 성적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모리 반도체에서 이만큼 성적을 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대단한 성과입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나라 업체가 메모리 반도체 R&D를 하지 않으면, 전 세계 디지털 기기 시장은 마비됩니다. 물론 비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학계에서 ISSCC는 반도체 세계무대의 등용문으로 인지되어 있습니다. 소속, 나이, 성별 등에 구애 없이 누구라도 도전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예 누가 논문을 썼는지도 가렸습니다. 혹시라도 심사 과정에서 이름값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만큼 ISSCC는 오직 실력으로만 인정받는 공정한 무대입니다. 괜히 반도체 ‘올림픽’이 아닌 것이죠.
우리 국민이 어렵고 힘들 때 국가대표가 출전한 스포츠 경기는 항상 큰 위안이 되어 왔습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반도체도 같은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밤늦게까지 R&D에 매진하는 반도체 연구원들 역시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디지털 시대의 국가대표가 아닐까요?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