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저장한 이미지나, 암호를 걸어둔 파일이 그렇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이용 권한을 조정하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콘텐츠가 된다. 최근 큰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안은영(정유미 분)에게도 그녀에게만 보이는 것이 있다. 알록달록 반투명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다니는 젤리다.
젤리는 기(氣)나 아우라(Aura)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감정/욕망이거나 영혼일 때도 있다. 이처럼 안은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있다고 믿는 것들을 본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이렇게 외친다. “왜 나만 보이고 XX이야!” 젤리는 사람에게 좋을 때도 있지만 안 좋을 때가 많다. 젤리가 붙은, 아픈 사람으로 가득 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그녀는 그 사실을 잘 안다.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 안 좋은 젤리를 빨리 잡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잡는다고 무슨 이익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도망쳤다. 도망쳐 편하게 살려고 목련고등학교 보건교사가 됐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목련 고등학교는 아예 젤리를 불러 모으는 장소였다.
▲젤리로 가득 찬 목련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안은영의 모습(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무려 판타지 코미디 미스터리 액션. 이 드라마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설정에 주인공을 던져 넣고, 조금 특이한 추격 액션 활극으로 시청자들을 초대한다. 재미있지만, 솔직히 조금 징그러운 장면도 나온다.
우리도 젤리 잡는 보건교사가 될 수 있을까?
안은영은 날 때부터 젤리를 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갖은 고생을 한다. 말해봤자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그런 능력인 탓이다.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볼 수도 없다. 때론 불에 탄 영혼이 자기에게 찾아와 하소연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젤리로 흩어져 사라지는 걸 봐야 했다. 남들이 보여주기 싫은, 감춰두고 싶은 감정도 본다. 중학교 때 김강선(최준영 분)이라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젤리를 두려워하고 도망만 다니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안은영에게는 젤리를 보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사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는 것은 살면서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경험일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가 얻기는 쉽지 않은 능력이다.
▲ Netflix가 인스타그램에서 제공하는 젤리 필터(넷플릭스 젤리 필터 캡처 화면)
가짜 젤리라도 보고 싶다면 인스타그램 앱을 열자. @netflixkr 계정 페이지에 가보면 netflix가 제공하는 사진 필터가 있다. 그 필터를 이용하면 예쁜 젤리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입을 열면, 젤리가 도망가기도 한다. 이런 기능을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이라고 한다. 현실 이미지 위에 컴퓨터 그래픽을 덧붙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AR은 포켓몬고 게임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미 다양한 형태로 많이 쓰이고 있다. 셀카 앱으로 사진을 찍을 때 눈물이나 토끼 귀를 달아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AR이다. 요즘 카메라 앱은 자동으로 피부 보정을 해준다. 이것 역시 AR 기능이다.
이케아에서 만든 이케아 플레이스 앱은, 가구를 사기 전에 미리 집에 배치해서 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구글 번역기를 이용하면, 해외 원서에 쓰인 외국어를 바로 번역해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해외 여행할 때나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직구한 물건의 사용 설명서를 볼 때 쓰면 좋다.
증강현실, 우리도 젤리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기술
AR 기술이 지금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AR 기술은 안은영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연구개발이 진행됐지만, 상용화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60년대 CG의 아버지 이반 서덜랜드가 만든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HMD)가 가상현실&증강현실로 향하는 문을 연 최초의 시도로 알려져 있다.(관련글 [반도체 인명사전]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선구자 이반 선덜랜드)
하지만 현실 속 가상 세계를 위화감 없이 구현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최초의 AR 장치라고 할 만한 물건은 1990년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장치는 1992년 미 공군연구소(AFRL)에서 개발한 가상 설비(Virtual Fixtures)로, 이 기기를 사용하면 자신의 팔을 마치 로봇 팔처럼 보며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NASA에서 1999년 지도 데이터를 파일럿이 보는 화면에 겹쳐서 보여주는 NASA X-38 비행 테스트 시스템을 만들었고, 2000년에는 카토 히로카즈가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인 ‘ARToolKit’을 개발하게 된다.
이때가 1차 전환기였다. 마침 획기적으로 좋아지던 컴퓨터 성능에 더해 인터넷 보급으로 지식이 확산되며, 많은 사람이 자기 아이디어를 AR로 구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간단한 영상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현실 이미지 위에 보여질 3D CG 객체가 있어야 했다.
당시 사용되던 웹캠(Webcam, PC에 장착해 실시간으로 촬영된 화면을 전송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해 화상 회의를 하는 데 사용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으로는 위치나 방향 등을 인식하기 어려워서 마커(Marker)라고 불리는 특수한 문양을 인쇄해 CG가 등장할 위치와 방향을 잡아줘야 했다. 이를 ‘마커형 AR’이라고 한다. 아쉬운 대로 쓰긴 했지만, 구현된 가상 이미지가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반도체 기술, 그 중에서도 카메라와 프로세서 성능이 좋아지면서, 마커 없이 AR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탄생했다. 이를 ‘마커리스(Markerless) AR’이라고 한다. 마커리스형이 널리 쓰이면서 이젠 마커든 마커리스든 둘 다 듣기 힘든 단어가 됐다.
‘마커리스 트래킹’ 기술은 영상 속 물체의 특징을 점으로 추출한 뒤 이 점을 계산해 공간을 인식하는 기술이다. 여기에 더해 GPS, 디지털 나침판, 가속도 센서(이동하는 물체의 가속도를 측정하는 센서), 자이로 센서(회전하는 물체의 역학운동을 이용한 개념으로 위치 측정과 방향 설정 등에 활용되는 기술) 등 스마트폰에 장착된 반도체 칩을 이용하면,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 속도, 방향 등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다. 이처럼 AR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반도체 센서 기술이 필요하다. AR 영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센서가 장착된 스마트폰이 등장하자 AR이 다시 각광을 받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이제 우리도 AR 게임이나 앱을 통해 현실에서 젤리를 쫓아 추격할 수 있게 됐다.
보건교사 안은영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이처럼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우리가 이제야 겨우 할 수 있게 된 것을 안은영은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해낸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늘어가는 젤리에 골치가 아플 무렵, 한 학생이 곤충에 물렸다고 찾아온다. 그 상처가 위험한 것을 눈치챈 그녀는 학생을 병원에 보내려 하지만 학생이 도망치고, 그 학생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학생의 담임인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 분)를 만나게 된다.
▲안은영의 ‘전용 외장 배터리’ 홍인표와의 케미도 이 드라마의 재미 요소 중 하나다.(이미지 제공 : 넷플릭스)
이 남자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좋은 기운을 가진, 다시 말해 젤리를 막는 자체 보호막을 가진 사람이다. 안은영은 남들은 아무도 못 보는 그 보호막을 쉽게 보고 그에게 다가간다. 자기가 힘을 쓰는 데 필요한 좋은 기운을 충전해 줄 수 있는 드문 사람이기 때문. 그녀만의 전용 외장 배터리를 발견한 셈이다.
새로운 아이템이 생겼지만 좋아할 수만은 없다. 이럴 땐 항상, 새로운 사고가 터진다는 말이니까. 보건교사-한문교사 커플은 같이 학생을 찾다가 학교 지하실에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설치한 돌을 열어버리게 되고, 여기서 튀어나온 초대형 젤리는 큰 사고를 친다. 이어 학생들의 방석 사냥으로 인한 사건, 재수 옴 붙이는 ‘옴’ 젤리들이 대량 번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안은영은 이 학교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젤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젤리를 자원으로 여긴 두 단체가 물밑에서 싸우고 있었고, 알고 보니 이 학교는 젤리를 모으기 위해 고안된 학교였다. 이제 안은영은 옛 가족이었던 그들의 욕망을 엎어버릴 계획을 짠다.
안은영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이, 누구나 젤리를 볼 수 있고 젤리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AR 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고 있을까? 구글은 ‘구글 글래스’라는 AR 글래스를 개발했고, 최근에는 구글 렌즈 앱을 통해 번역, 쇼핑 같은 다양한 AR 기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애플은 최신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공간 측정 센서인 ‘라이다(Light Detection And Ranging, LiDAR) 스캐너’를 장착해 AR 기능을 강화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홀로렌즈 기기(혼합현실 기반 웨어러블 기기)’를 개발해 공동 작업 환경과 다양한 활용 방향을 테스트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거대 기술 기업들은 이미 이 증강현실 기술 경쟁에 뛰어들었다. 페이팔이나 스냅챗 같은 서비스 회사도 가세하고 있다. AR을 스마트폰 다음 성장 동력으로 여기는 이야기도 나온다. AR 사용환경이 대중화되고, 페이스북이 최근 선보인 인피니트 오피스처럼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컴퓨팅 환경 자체가 격변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 PC와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도 웹 서핑, 문서 작업, 게임 등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과연 어떤 서비스가 등장하게 될까?
최근 SK하이닉스에서는 AR 서비스에 쓰이는 중요 반도체인 비행시간차(Time of Flight, ToF) 이미지 센서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센서에서 쏜 빛이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시간을 측정해 거리나 사물의 모습, 공간 정보를 파악하는 센서다. 앞서 말한 애플 라이다 센서가 ToF 센서의 다른 이름이다. 컴퓨터가 현실 공간 정보를 읽는다는 면에서 같기 때문에, 자율주행차에도 많이 쓰인다. 그리고 이 센서는 더 정밀하게 공간을 파악해, 마치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CG 캐릭터를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AI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이 결합되면, 우리는 정말 안은영에 버금가는 능력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제공 : 넷플릭스)
극 중에서 안은영은 젤리를 보는 능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젤리가 안 보이는 세상은 평온하고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뭔가를 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갔다. AR 기술이 대중화된다면, 우리 역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버금가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게 된다. 그건 축복이자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할까?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새로운 화두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