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명의 엔진, GPU와 HBM
지금 AI 문명을 이끌고 있는 주역은 단연 젠슨 황의 엔비디아, 그리고 그들이 만든 GPU다. 그런데 ‘없어서 못 판다’는 이 GPU에는 요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이 개당 8개씩 탑재돼 판매되고 있다. 바로 이 HBM의 선도기업이 대한민국의 SK하이닉스다.

▲ SK하이닉스의 HBM4 12단, HBM3E 12단 제품
사실 AI 시대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엔비디아의 GPU가 이처럼 핵심적인 반도체로 자리 잡을 것이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불과 몇몇 AI 연구자들이 실험적으로 활용하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GPU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새로운 개념의 메모리 기술을 미리 연구하고 개발해 온 기업이 있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이 바로 SK하이닉스다. SK하이닉스는 어떻게 이러한 도전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슈퍼 모멘텀: SK하이닉스의 언더독 스토리』(이하『슈퍼 모멘텀』)는 그 위험해 보였던 선택들이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를 기록한 역사이자,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과 개인을 위한 하나의 지침서다.
최근 전 세계는 데이터센터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AI의 압도적인 성능을 확인한 이상, 이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고도화된 ‘인공두뇌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제 데이터센터는 단순한 IT 설비를 넘어 국가의 핵심 전략 자산으로까지 평가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중심에는 GPU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HBM이 있다.
특히 2026년에 접어들면서 HBM에 대한 관심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챗GPT의 등장 이후 불과 3년 만에 수십억 명의 사용자가 AI의 효용을 직접 체감했고, 그 과정에서 AI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서 메모리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대언어모델(LLM)을 비롯한 생성형 AI는 단순히 질문 하나하나에만 반응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사용자와의 누적된 상호작용과 방대한 맥락 정보를 지속적으로 불러와 이를 토대로 다음 응답을 생성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데이터를 저장하고, 이를 지연 없이 불러와 초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는 메모리 성능은 서비스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 된다.
그리고, AI 플랫폼 간 경쟁이 심화될수록 이러한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사용자 경험의 질이 곧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연산 성능뿐 아니라 메모리 대역폭과 처리 속도에서의 우위는 필수 조건이 됐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HBM은 AI 데이터센터의 성능 한계를 결정하는 전략 자산으로 부상했고, 해당 기술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업에 대한 수요 역시 빠르게 집중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SK하이닉스의 존재감은 더욱 뚜렷해진다. HBM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과 양산 역량을 확보한 SK하이닉스는 AI 플랫폼 기업들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핵심적인 공급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HBM의 리딩 컴퍼니로 불리는 SK하이닉스가 AI 혁명을 이끄는 기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슈퍼 모멘텀, 기술을 넘어 사람으로
AI 생태계 전반에서 SK하이닉스가 최근 보여준 성취는 단순한 기업 성공을 넘어, 장기적 기술 전략이 어떻게 결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오랜 기간 투자와 준비를 지속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성과는 기술적 난관과 시장의 회의론 속에서도 방향성을 잃지 않았던 리더십과 조직 전체의 집요한 실행력이 축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과도한 리스크로 인식되던 결정들이 시간이 흐른 뒤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 ‘SK AI 서밋 2025’에서 SK그룹의 AI 설루션 전략을 설명하고 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
반도체 산업의 변동성이 극심했던 시기에도 ‘반도체는 미래 AI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확신 아래 투자를 지속했던 최태원 회장의 판단은 조직 전반에 강력한 추진력을 부여했다. 남들이 단기 실적에 집중할 때, 수년 뒤 기술 표준이 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HBM이라는 미개척 영역에 자원을 집중한 전략은 이 책이 말하는 ‘방향성을 가진 모멘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슈퍼 모멘텀』이라는 제목은 물리학의 개념인 모멘텀(Momentum)을 비즈니스와 삶의 영역으로 확장한 표현이다. 물리학에서 모멘텀은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힘을 뜻하며, 질량과 속도가 클수록 그 크기 역시 커진다. 이를 기업에 대입하면, 자본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기술 개발 속도를 가속할수록 성공의 모멘텀은 커진다. 이 책은 여기에 하나의 중요한 요소를 더한다. 바로 미래를 향한 확신과 도전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즉 마인드셋이다.
SK하이닉스의 HBM 개발 과정은 이러한 관점을 명확히 입증한다. 모두의 반대 속에서 반도체 기업 인수를 결정하고, 당시로서는 과도해 보일 만큼의 자본을 투입해 새로운 메모리 기술에 도전했다. 초기 HBM 제품이 시장에서 외면받으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방향성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는 엔비디아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용 GPU를 활용하던 AI 연구자들의 요구에 응답해 AI 연산을 위한 전용 컴퓨팅 구조를 개발하겠다는 젠슨 황의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GPU와 HBM 중심의 AI 생태계 역시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기업의 성과는 결국 미래에 대한 확신과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 조직의 태도가 만들어낸 결과다.

▲ 우리의 일상이 AI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반도체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AI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며 산업과 사회 전반의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기업과 정부, 교육기관 모두가 새로운 선택을 요구 받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이미 멈출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남은 과제는 이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있다.
『슈퍼 모멘텀』은 이러한 전환기의 핵심을 ‘마음가짐’과 ‘실행력’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다. 세계관을 확장하기 위한 학습, 변화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실행, 그리고 개인을 넘어 조직 전체가 함께 나아가는 구조가 결합될 때 비로소 혁신은 가속된다. 리더의 비전이 구성원 각자의 실행력과 맞물릴 때, 불가능해 보이던 도전은 실현 가능한 목표로 전환된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도전적인 선택을 통해 산업 구조를 바꿔왔다. 외환위기 이후 모두가 회의적이던 시절에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는 지속됐고, 그 결과 오늘날 HBM이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게 됐다. 『슈퍼 모멘텀』은 이러한 선택의 과정을 기록한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에게 필요한 사고방식과 태도를 제시하는 책이다. 기술과 산업의 전환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하나의 참고서로 읽힐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