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어 파이터’가 돌아왔다.
‘버파’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만약 ‘버추어 파이터’가 떠오른다면 확실한 중년이다. 이처럼 세대마다 한 번쯤 청춘을 바쳤던 게임은 있는 법이다. ‘버파’를 들어 봤지만 즐긴 적은 없는 세대에게도 이 게임의 역사적 의미는 되짚어볼 만하다.
‘버추어 파이터’는 절권도, 팔극권, 유도, 취권, 스모 등 각종 무술을 상징하는 캐릭터들이 경치 좋은 링 위에서 결투를 벌이는 3D 격투게임이다. 일명 ‘3D격겜’의 진짜 원조. 이 게임은 버튼 3개의 심플한 조이스틱만으로 다양한 무술 기술을 구현해 냈다. 특히 그 기술들은 허무맹랑했던 종래 2D 격투 게임 속 기술과 달랐다. 게임 속의 3D 공간임에도 현실적인 물리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결투 도중 시점이 바뀌는 등의 3D 그래픽도 실감이 났다. 지금 보면 조악한 삼각형 폴리곤(Polygon)1) 뭉치들의 대결이지만, 그 당시에는 캐릭터의 팔이 잡히면 진짜 팔이 꺾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버추어 파이터 1’이 등장하던 1993년 말 당시 소년, 소녀들은 오락실 구석에서 게임 속 화면을 보며 미래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1) 폴리곤 : 주로 3D 컴퓨터 그래픽에서 면의 조합으로 물체를 표현할 때의 각 요소.
당대 최고의 반도체로 선보인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전성기는 어땠을까?
▲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 인게임 캡처화면
3D 레이싱 게임 ‘버추어 레이싱’에서 ‘버추어 파이터’에 이르기까지 1990년대 초반 전자오락실은 게임회사 세가(SEGA)의 주무대였다. 특히 당시의 반도체 기술력으로는 풀 폴리곤(Full Polygon)으로 완성된 3D ‘체감 게임’은 당시 전자오락실에서나 가능한 유희였다. 일반 PC나 콘솔 게임(Console Game)에서 그 수준의 퍼포먼스를 내기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
세가는 불과 1년 만인 1994년에 바로 ‘버추어 파이터 2’를 출시했고, 밋밋한 폴리곤에는 그럴듯한 텍스처(Texture)2)가 입혀졌다. 이는 당시 ‘버추어 파이터’에 사용된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Arcade System Board)3)이 MODEL1에서 MODEL2로 이어지는 3D 특화 기판이었기 때문이다. 세가는 MODEL 시리즈 기판을 위해 군수업체 GE의 항공우주(Aerospace) 사업부에서 나온 특수 칩을 활용했다. 냉전 시대 이후, 방위산업용 3D 기술을 민간에 이양(移讓)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반도체가 게임에 사용된 것.
2) 텍스처 : 질감 또는 색상이나 명암과는 독립적으로 객체의 표면에 대해 육안으로 보이는 모습을 특성 짓는 속성들의 집합.
3)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 : 아케이드 게임에 사용되는 전자 회로 기판, 혹은 그것에 각종 전자부품을 탑재한 상태의 입출력 장치를 사용한 아케이드 게임 시스템의 형식. 게임 용어로 간단히 기판이라 하는 경우, 대부분 아케이드 게임 기판을 가리킨다.
당시 반도체 기술과 인력은 GE에서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을 거쳐 그 자회사인 Real3D로 이어진다. 그 이후 이를 둘러싼 합병과 분사와의 소송이라는 긴 우여곡절 끝에 인텔(Intel)과 엔비디아(NVIDIA)와, ATI(현 AMD)로 흩어졌다. 오늘날 3D 그래픽 반도체의 주축들은 ‘버추어 파이터’와도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가는 더 정교한 게임을 개발했다. 1996년에 출시한 ‘버추어 파이터 3’에서는 MODEL3로 기판을 업그레이드시키면서, 3D 공간에 미적 요소를 두드러지게 구현했다. 땅바닥에는 굴곡이 생겼고, 무술 동작도 더 미려(美麗)해졌다. 매년 기술의 발전이 눈에 보이던 시절이다.
이처럼 ‘버추어 파이터’의 ‘리즈 시절’에는 당대 최고의 반도체와 기술력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는 당연하게도 상업적 성공을 거머쥐었고, ‘1998 컴퓨터 월드 스미소니언 어워드’를 수상하는 등 게임업계에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버추어 파이터, ‘세가의 시대’ 종막을 알리다
국내에도 ‘버추어 파이터’ 팬들이 많았다. 동네 오락실마다 팀이 꾸려졌고, PC 통신을 통해 알음알음 교류하며 원정경기를 가기도 했다. ‘버파 동네짱’이 있었던 추억의 전자오락실에선 일종의 자생적 e스포츠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가는 이 같은 e스포츠로서의 가능성을 살리지 못했다. 이미 PC방과 ‘스타크래프트’로 상징되는 한국의 인터넷 문화 등장하며 게임의 헤게모니가 오락실과 PC 통신에서 온라인 게임과 인터넷으로 이행되던 시기였으니, 도전했다고 해도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시의 동네마다 나름 ‘버추어 파이터’ e스포츠가 벌어지고 있었고, 세가가 직접 ‘버추어 파이터’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한국 학생들이 우승, 준우승을 쓸어가 버렸지만, 개최국인 일본에서는 흥행하지 못했고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지는 못했다. 결국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버추어 파이터’ e스포츠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개최국이 분발하지 못해 흥행실패로 이어졌던 탓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이 시기는 이미 세가로서도 고난의 시기에 접어들던 때였다. 세가의 게임 콘솔 새턴(Saturn)이 소니(Sony)의 게임 콘솔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에게 밀려 몰락해 가고 있던 시기. ‘버추어 파이터’의 길지 않은 여생은 이미 이때부터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21세기가 돼서도 명맥은 이어졌지만, 사실 ‘버추어 파이터’는 흘러간 게임이 되고 있었다. 그 후 세가는 드림캐스트(1998년 세가에서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의 실패를 끝으로 하드웨어 사업에서 철수한다. ‘버추어 파이터’도 그렇게 지난 역사가 돼 버렸다. 마지막 시리즈 ‘버추어 파이터 5 파이널 쇼다운’은 2010년작으로 벌써 11년 전(콘솔 다운로드판은 9년 전)이다.
세가 60주년 프로젝트로 11년 만에 귀환한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
세가는 지난해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세가의 황금기는 지나갔지만, 요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게임 ‘용과 같이’ 시리즈가 대히트하고, 스마트폰 관련 사업에서도 이익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
세가는 여유가 생기자 뒤를 돌아보며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 나섰다. 추억을 되짚어 보니 1990년대 초반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았던 세가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을 추억에 빠지게 만드는 1993년의 ‘버추어 파이터’가 다시 소환된 것은 예견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는 ‘버추어 파이터 5 파이널 쇼다운’ 이후 11년 만에 신작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세가는 신작 대신 ‘버추어 파이터 5 파이널 쇼다운’을 자사의 최신 게임 엔진4)인 ‘드래곤 엔진’으로 재구축한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을 내놨다.
4) 게임 엔진 : 고해상도 그래픽과 사운드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래밍을 쉽게 할 수 있게 만든 개발 환경.
▲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 인게임 캡처화면
하지만 단지 리마스터나 리메이크라고 보기에는 손댄 부분이 재개발 수준으로 상당히 크다. 특히 과거의 기회를 놓쳤던 e스포츠에 특화된 기능들이 돋보인다. 최대 16인 참가 가능한 토너먼트와 리그가 추가되고, 실시간 관전 기능으로 게임 참가자를 응원할 수도 있다. 과거에 ‘뿌요뿌요’ e스포츠를 운영해 본 노하우를 살려 ‘버추어 파이터’를 세가 e스포츠 사업의 주전으로 삼으려는 욕심이 엿보인다.
특히 액션의 시각적 효과가 화려해지고, 관전 중에 스탬프를 던지며 응원할 수 있는 등의 요소는 e스포츠 중계와 관전이라는 현대적 문화에도 충분히 통할 만하다. 또한 코로나19 거리두기 대책에도 만전을 기해, 향후 e스포츠 대회는 개최, 관전 모두 온라인에서 이뤄지도록 만들었다. 패자부활전과 더블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Double Elimination Tournament, 두 번 지면 끝이지만 한 번 져도 나머지를 다 승리하면 우승할 수 있는 토너먼트 방식) 등도 포함시켜 다양한 운영의 묘(妙)도 살릴 수 있다.
화려한 캐릭터 의상 세트나 초대 버추어 파이터 풍의 투박한 폴리곤을 추억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레전더리 팩 등은 유료 DLC(DownLoadable Contents)로 제공한다. 비록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최신작을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이런 요소들을 통해 나름 축제 분위기는 내고 있다.
버추어 파이터를 되살린 ‘드래곤 엔진’, 그 뒤에는 향상된 반도체 기술이 있다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을 이뤄냈지만, 주요 요소는 11년 전 소스를 활용해야 해 시대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그래픽이 아쉬웠다. 그래서 왕년의 팬들을 소환하기 위해 분위기와 조작감은 될 수 있는 한 유지한 반면, 그래픽은 처음부터 아예 다시 그렸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는 ‘세가의 60주년 프로젝트’라는 명목을 갖고 있지만, 과거의 명작인 ‘버추어 파이터’가 아직까지 수요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체적인 작업도 가성비 위주로 이뤄졌다.
대신 역전의 용사들이 힘을 뭉쳤다. ‘버추어 파이터’의 산실인 AM2(Amusement Machine) 스튜디오, 즉 ‘오락 기계 2국’과 ‘용과 함께 스튜디오’가 함께 개발에 참여한 것. AM2 스튜디오는 ‘버추어 파이터’를 비롯해, 한 시대의 장르를 개척한 레이싱 게임 ‘아웃런’, 3D 슈팅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해리어’ 등의 명작을 만들어 내며 세가에서 가장 유명해진 스튜디오다. 용과 함께 스튜디오 역시 현시점의 세가의 주력 게임을 개발한 스튜디오다. 그야말로 신구 대표주자의 콜라보레이션이었다.
현대 세가의 대표작인 ‘용과 함께’는 거대 환락가를 배경으로 어둠의 사회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성인용 게임의 수작. 그러나 이 ‘용과 함께’ 시리즈도 발매한 지 어느덧 15년째이니 신게임은 아니다. 2016년 ‘용과 함께 6’부터 자체적으로 만든 드래곤 엔진을 사용 중인데, 이번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에 이 엔진을 도입했다.
그런데 사실 드래곤 엔진은 철저하게 ‘용과 함께’, 즉 밤거리에 특화된 게임 엔진이어서 다른 게임에서 사용하기 힘들다고 여겨졌던 게임 엔진이었다. 리메이크판인 ‘용과 같이: 극(極) 2’, 그리고 세가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 ‘저지 아이즈: 사신의 유언’ 등은 드래곤 엔진에 기반을 둔 또 다른 세가 게임들로 모두 네온이 빛나는 어둠의 거리가 주무대다. 환락가의 네온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광원을 지나가는 엑스트라와 오브제마다 아낌없이 빛을 뿌려야 하는 계산 물량의 승부였다. 낡았지만 밤을 비추는 수많은 간판, 사람의 손때가 묻은 거리의 사물들. 여느 게임처럼 밝고 광활한 평원이나 어두침침한 던전(Dungeon)을 표현하는 일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다.
다만 그래픽이 향상돼 리얼리티는 넘치지만 정작 움직임에 대한 걱정은 있었다. 드래곤 엔진으로 만들어진 ‘용과 함께’에서 인게임 격투에 대한 피드백은 부정적이었고, 모든 ‘버추어 파이터’의 신작마다 전작보다 부자연스럽다는 평이 뒤따랐기 때문. 하지만 익숙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쾌한 타격감을 선사하던 ‘버추어 파이터’다. ‘버추어 파이터’ 팬이라면 예전에 그랬듯 지금도 큰 위화감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거다.
결론적으로 ‘버추어 파이터 5 : 얼티밋 쇼다운’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던, 과거의 그 격투 게임을 성공적으로 되살린 게임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익숙한 얼굴들을 통해, 오래전 그 게임을 즐기던 시절을 다시 소환하는 힘이 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