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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자, 혁혁한 공을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수여되는 ‘노벨상’. 한번도 받기 어려운 이 상을 두 번씩이나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단 4명뿐이라고 하는데요. 오늘 만나볼 물리학자 존 바딘은 이 4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반도체의 연구와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물리학자입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처럼 잘 알려진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바딘은 물리학자들의 꿈인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천재 중의 천재였는데요. 흔히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마리 퀴리 부인을 떠올리는데, 물리학상을 두 번 받은 이는 바딘이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존 바딘은 어떠한 연구활동을 통해 2번의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천재라 불렸던 그의 삶을 함께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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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 교수 출신 아버지와 교육자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딘은 일찍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부친은 미국 의과대학의 명문 존스 홉킨스 대학교 의과대학의 첫 졸업생으로, 졸업 후 한동안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위스콘신대학이 의과대학을 설립할 당시 위스콘신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긴 아버지는 그 후 위스콘신대학 의과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죠. 존 바딘은 위스콘신대학이 소재한 매디슨에서 출생해 대학을 마칠 때까지 위스콘신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영재반에서 공부하면서 상급학년으로 건너뛰어 진급하는 등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는데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만 13세에 고등학교 졸업에 필요한 모든 과목을 이수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어려 대학에 곧 바로 진학하는 대신 그는 매디슨 시내의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해 2년간 수업을 더 들은 후 15세 되던 해 위스콘신대학교에 입학했죠. 대학에서 전기 공학을 전공하는 동안 바딘은 수학과 물리학에도 흥미가 많아 이 분야의 과목들도 두루 수강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수학 실력은 위스콘신대학교 내에서 이때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해요. 학부를 마치고 계속해서 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그는 디락(Dirac), 디바이(Debye), 하이젠버그(Heisenberg) 등 당대의 거장급 유럽 물리학자들이 이 대학에 머무는 동안 개설한 강의들을 수강하며 새로운 양자 역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딘의 석사 과정 논문은 지도 교수의 연구 분야를 따라 석유 유정 발굴에 전기 공학을 응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딘이 석사 과정을 졸업한 1929년은 미국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는 해였는데요. 따라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을 채용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죠. 다행히 석사 과정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은 덕에 그는 대형 석유회사인 걸프 오일 회사 의 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2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하며 존 바딘은 수학과 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워나가게 되었고 이 분야를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박사 과정을 선택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불황을 생각해보면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의 의지대로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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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가을,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한 그는 1936년 고체 물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여하게 됩니다. 여기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1930년대 미국의 대학들은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한 후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받아들여 양자역학, 고체물리학 등의 연구에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원의 평생 연구원직을 수락해 미국에 정학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요. 존 바딘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였던 유진 위그너 역시 헝가리 출신의 젊고 유능한 고체물리학자였습니다. 그는 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죠. 이렇게 능력있는 물리학자들을 두루 등용하기 시작한 시대적 상황에서 하버드대학은 존 바딘에게 3년간 연구직을 보장하는 펠로우십을 제안했고 바딘은 이를 받아들여 하버드 대학에서 3년간의 연구 생활을 하게 됩니다.

3년간의 하버드 대학 연구원 생활을 마친 바딘은 미니애폴리스에 소재한 미네소타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해 교육과 연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국방성이 학계, 산업계의 과학자들을 소환해 국방성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하게 했는데요. 바딘은 1941년 미네소타 대학을 휴직하고 워싱턴에 있는 해군 연구소에서 종전될 때까지 근무했습니다. 1945년 종전이 되자 벨 연구소는 이미 유능한 고체 물리학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바딘의 영입을 추진했고 바딘은 미네소타 대학으로 돌아가는 대신 벨 연구소에 입사해 샤클리의 고체 소자 개발팀에 합류했죠.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그의 연구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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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고체 물리 이론가인 존 바딘이 쇼클리 팀에 합류하자 벨 연구소는 실험 물리의 대가인 브래틴, 이론 물리학자인 바딘, 탁월한 물리학자이자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있다고 평가받는 팀의 리더 쇼클리 세 사람을 주축으로 이상적인 연구팀을 꾸려 연구를 지속해나갔습니다.

 

2 (77).png                                                            ▲ (좌측부터) 젊은 시절의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프로젝트 초기에 샤클리가 새로운 소자의 구조를 제안하면 이에 따라 브래틴이 소자를 제작했는데요. 그러나 이 소자들은 기대한 대로 동작하지 않았고 샤클리와 브래틴은 그 이유를 찾아 낼 수 없었죠. 존 바딘이 벨 연구소에 입사해 쇼클리 팀에 합류한 후 그는 쇼클리가 고안했던 소자들이 왜 동작하지 않는지 이유를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바딘은 소자가 동작하지 않는 것은 고체 표면에 존재하는 소위 ‘계면 상태 (surface state)’ 때문이며 이 때문에 전계가 고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해 소자가 동작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바딘의 이 예리한 통찰력은 성공적으로 트랜지스터를 제작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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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월터 브래튼,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이들이 발명한 트랜지스터는 반도체의 시대를 열어 인류역사의 기반을 일구어냈는데요. 트랜지스터는 코끼리 6마리의 무게에 해당하는 애니악(ENIAC)의 진공관을 대신해 컴퓨터의 소형화를 이루어냈습니다. 회로 실험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 큰 스파크가 생긴 것이 그토록 바라던 전류증폭현상으로, 이를 통해 트랜지스터 발명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이죠. 이것이 최초의 트랜지스터인 ‘점접촉형 트랜지스터’입니다.

★ 여기서 잠깐! 트렌지스터의 분류

트랜지스터란 반도체 결정 중에서 전자 또는 정공의 운동을 이용한 전자 장치를 말하는데요. 진공관과 마찬가지로 개폐, 증폭, 발진, 정류, 검파 등의 작용을 합니다. 구조상 점접촉형 트랜지스터와 접합형 트랜지스터로 나누어지는데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후자이죠. 접합형 트랜지스터는 반도체 조합 방식에 따라 P-N-P 또는 N-P-N형 등으로 나누어지며, 또 접합층을 만드는 방식에 따라 합금 접합형, 성장 접합형, 확산 접합형 등으로 분류됩니다!

현재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트랜지스터의 크기는 점점 작아지고 있으며 첨단공학기술들은 모두 반도체의 발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게 트랜지스터는 1956년 존 바딘에게 첫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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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존 바딘은 벨 연구소를 떠나 1951년 일이노이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일리노이대학의 연구 분위기는 존 바딘을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만들기에 충분했는데요. 트랜지스터 개발 이후, 존 바딘의 관심은 초전도체로 옮겨가게 되죠. 그는 이곳에서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초전도 현상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이를 위해 수학 박사인 쿠퍼를 그의 연구팀에 영입하고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인 슈리퍼와 함께 초전도 현상의 이론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요. 이 연구는 지난 40년간 물리학계의 내로라하는 저명한 학자들이 모두 도전했다 실패한 분야였기에 그의 도전의식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일리노이 대학에 부임한 지 불과 6년만인 1957년, 바딘의 연구팀은 마침내 초전도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이론은 바딘, 쿠퍼, 슈리퍼 세 사람의 이니셜을 따 BCS이론으로 불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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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BCS이론은 온도가 올라가면 쿠퍼페어가 깨지게 되어 고온 초전도체에서는 적용할 수 없어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BCS이론은 초전도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 소립자 이론분야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죠. 미국 정부는 존 바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8년 3월 바딘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바딘은 이 연구업적으로 쿠퍼, 슈리퍼와 함께 1972년 그의 두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요. 이로써 같은 분야에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 여기서 잠깐! 초전도 현상이란?

초전도체(superconductor)란 절대온도인 영하 273도 부근에서 극저온의 액체헬륨이나 액체질소에 담그면 전기 저항이 없어지고, 자기장을 배척하기 때문에 자석 위에서 떠오르는 현상을 보이는 금속이나 합금, 화합물을 말합니다. 물체에 전류가 흐르면 그 물체에는 전류의 제곱과 물체의 저항을 곱한 값의 열이 발생하게 되어 전도율이 낮아지는데요. 초전도체는 전기저항이 전혀 없기 때문에 구리나 철 등의 전도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기의 전도율(conductivity)이 높은 것이죠.

 

하지만 초전도체는 온도, 자기장의 세기 및 전류밀도 등 세 가지 기본조건이 모두 충족돼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실용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전기저항 0이 되기 위한 온도가 극히 낮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는데요. 현재의 과학자들은 초전도체가 가지는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일상 환경에서 초전도 현상을 적용할 수 있는 물질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답니다.

 

반도체의 기반이 되는 트렌지스터와 초전도 현상을 발견한 존 바딘의 이야기, 어떠셨나요? 그가 이렇게 지대한 연구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타고난 천재성도 있지만, 내성적이면서도 겸손하고 과묵했던 그의 성격도 한몫을 했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연구가 아무리 벅차고 힘들더라도 이를 묵묵히 수행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성실한 학자이기도 했죠. 안정적인 직장을 나와 소신 있게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고 이에 성실하게 임한 덕분에 학자로서, 연구자로서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된 존 바딘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꿈과 성실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 그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새 원하는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존 바딘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