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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덜드 커누스는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책인 의 저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1권은 놀랍게도 그가 28세 때 집필한 것이라고 하는데요. 커누스는 이 책의 출간 외에도 다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알고리즘 분석 분야를 실질적으로 창조했으며 이론 컴퓨터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공헌을 한 컴퓨터 과학자로도 꼽히고 있답니다. 특히 TeX 조판 시스템과 메타폰트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문학적 프로그래밍의 개념을 처음으로 주장하기도 했죠. 이러한 그의 취미는 다름 아닌 ‘오르간 연주’라고 하는데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컴퓨터 과학자 도널드 커누스. 오늘은 그의 업적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살펴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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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커누스는 1938년 1월 10일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태어났습니다. 커누스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했던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처음 교단에 들어서 나중에 루터란 고등학교에서 부기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주일에는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는데요. 커누스는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과 교육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말투까지 쏙 빼닮았다고 하네요.

학창시절 커누스는 다방면에 걸쳐 제 능력을 발휘했던 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신문의 편집인 일을 하면서 커누스는 ‘크로스워드 퍼즐’을 만들었는데요. 그는 단어들 가운데 어떤 패턴을 찾아내는 일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가 8학년이 되었을 때는 한 사탕 제조업자의 후원으로 ‘지글러의 왕 막대사탕(Ziegler's Giant bar)’이라는 문구에 들어 있는 글자들을 가지고 누가 가장 많은 단어를 만들어 내는지를 겨루는 대회가 열렸는데요. 그는 1등 상으로 당시로선 값비싼 품목이었던 텔레비전 수상기 한 대와 전교생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지글러 막대사탕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엔 웨스팅하우스 과학 재능 경진대회(Westinghouse Science Talent Search)에서 ‘무게와 측정의 potrzebie 시스템’이라는 안을 제출해 가작에 당선되기도 했죠.

1 (100).png▲ 취미인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도널드 커누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그가 정작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분야는 글쓰기나 과학이 아니라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음악가가 되겠다던 그의 계획이 달라진 것은 케이스 연구소로부터 물리학 장학생 제의를 받으면서부터였는데요. 수학에 따분함을 느끼던 그였지만 케이스에서 신입생들의 계산법을 담당했던 폴 켄터의 설득에 의해 전공을 물리학에서 수학으로 바꾸게 되죠.

이러한 그는 1956년 난생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포트란 이전의 기계인 IBM 650이었는데요. 그는 밤새도록 매뉴얼을 읽고 혼자 힘으로 기본적인 프로그래밍을 익혔습니다. 커누스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숫자들을 소인수분해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프로그램은 컴퓨터에서 3목놀이(Tic-tac-toe) 게임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죠. 크누스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계를 실행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에 매료됐는데요.

1960년 최우수 학생으로 케이스를 졸업한 그는 전례 없는 교수단 투표에 의해 수학 석사 학위도 동시에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들어가 3년 후 수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수학 조교수로 칼텍 교수단에 합류했는데요. 뛰어난 수학도로 인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습니다. 그는 당시 컴퓨터 산업을 선도했던 기업인 버로즈사에서 자문역할을 맡으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에 모두 관여하기도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요. 다방면에 걸친 능력을 겸비한 그의 관심은 본격적으로 컴퓨터에 더욱 쏠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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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누스가 아직 대학원생이었을 당시, 교재 발행인인 어드슨 웨슬리는 그에게 컴파일러에 관한 책을 집필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에 교재를 집필하면서 커누스는 컴파일러에 대한 연구도 함께 시작했는데요. 컴파일러(Compiler)란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프로그램으로, 이 주제는 당시 아주 어렵게 간주되었기 때문에 컴파일러 작성에는 흔히 대학원 과정에서 최고 과정을 지정하는 번호가 부여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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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단에 선 도널드 커누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컴파일러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컴퓨터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이 바로 컴퓨터 자체의 프로그램을 작성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는 프로그램이 컴퓨팅에 적용될 때가 바로 컴퓨터 과학이 궁극적인 완벽함에 이르게 되는 시기라 여겼습니다. 사실상 현대의 소프트웨어 도구들은 컴파일러 작성을 훨씬 더 쉽게 만들어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따라서 요즘엔 대부분 학교에서 같은 과정을 학부생들에게 제공하고 있죠. 커누스는 이러한 도구들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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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빛미디어 (www.hanbit.co.kr)

갓 학위를 받은 박사가 포괄적인 교재를 발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이 책의 영향력은 더욱 놀라운데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예술>의 첫 세 권은 70년대 전반에 걸쳐 줄곧 교재로 채택되었고 지금까지도 참고 문헌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죠. 이러한 책의 인기는 커누스의 꼼꼼하고 치밀한 연구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전체 집필과정에서 커누스는 엄격함과 기지를 섞어가며 모든 아이디어의 바탕에 깔려 있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뉴욕 대학의 컴파일러 설계자인 에드 쇤베르그(Ed Schonberg)가 했던 말 속에서 그 위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이크스트라는 우리에게 잘못된 것으로부터 옳은 것을 식별해 내도록 가르쳐 주었고, 커누스는 굉장한 것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을 가려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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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누스는 일생 동안 인쇄와 그래픽의 구조에 흥미를 가져왔습니다. 1940년대의 소낸 시절에는 위스콘신 여름 캠프에서 식물에 대한 안내서를 쓰면서 당시 인쇄에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청복사지에 첨필을 사용해 꽃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요. 그는 이러한 관심을 좀 더 발전시켜 9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다른 프로젝트보다 디지털 인쇄방식에 사용될 컴퓨터 언어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디지털 인쇄방식에 사용될 두 가지 컴퓨터 언어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이었는데요. 그 첫 번째는 택(TeX)이라는 것으로, 문자와 그 밖의 기호들을 인쇄면 위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어인 메타폰트(Metafont)는 글자 자체의 형태를 정의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 프로그램은 현재 자유소프트웨어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사용이 가능하며 실제로 백만이 넘는 수의 사용자들을 확보하고 있답니다.

커누스는 특유의 세밀함과 집요함으로 인쇄술 분야에 보다 파고들었는데요. 예를 들어 그는 ‘문자 S(The Letter S)’라는 논문을 통해 그 문자의 수학적 형태를 분석하고 자신이 가장 만족스러운 방정식을 찾기 위해 며칠에 걸쳐 노력을 들였던 과정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관심에는 언어와 문법에 대한 관심, 수학에 대한 명석하고도 광범위한 지식, 시각적인 미적 감각, 프로그래밍에 대한 애정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한 프로그래밍 컨테스트에서 우승을 휩쓴 그를 향해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죠. “그냥 그것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프로그래밍을 익힌 방법입니다.” 이 말에는 컴퓨터에 대한 그의 꾸준한 노력과 지속적인 관심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의 명예교수가 된 커누스는 집필 외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한다거나, 다른 소설을 구상한다거나 또한 세계적 수준의 회의나 자문 프로젝트들을 하며 여전히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커누스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순수한 탐구의지와 앎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