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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시계 이상입니다. 시계를 찬다고 시간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시간만큼 인간이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영화 <펄프 픽션> 속 시계의 의미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인 ‘부치’는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시계를 되찾아 오기 위해 수많은 고생을 감내합니다. ‘미국 최초의 손목시계’라 불리는 그 시계는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거쳐 그에게 전해지는데요. 그 속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다음 세대와 연결하고 싶은 증조부, 조부 그리고 아버지의 ‘시간’이 담겨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첨단 반도체까지 꽉 들어차 상상 이상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시계는 벅찰 정도로 거대해져 ‘시계 이상’이 되었는데요. 그럼 저에게 시계는 어떤 의미인지, 최초의 시계에 대한 기억부터 되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억을 담은 아날로그의 힘

2.png▲ 출처: 세이코 5 시리즈(출처: 세이코 코리아)

어린 시절, 번쩍이는 금색 세이코 5 시리즈를 찬 손목을 보여주시며 기계식 시계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시계는 귀해 보였습니다. 세이코 시리즈는 현재 이베이 중고가로 1백 달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발매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이코의 저가 라인을 대표하는 모델이죠. ‘합리적’이라는 단어로 거의 모든 제품을 수식할 수 있는 세이코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처럼, 기계식(오토매틱), 충격방지, 방수, 요일, 날짜의 5가지 요소를 갖췄다고 해서 5시리즈라 불립니다.

하지만 세이코에 대한 어릴 적 제 기억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아버지는 ‘합리적’은 물론, 그 비슷한 단어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우러러보는 꼬맹이 아들에게 굳이 저렴한 시계를 차는 이유를 납득시킬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아들이 좀 더 크고 나서 아버지가 그 시계를 주겠다고 하셨을 때, 아들은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후로도 몇 번을 더 물어 보셨고, 그때마다 계속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다고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착용하지 않고 받아만 두면 될 것을 너무했다고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젠 취향보단 한계를 생각하는 탓입니다. 시계는 일종의 약속이고, 그 무게에 짓눌릴 듯한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복하자면 시계는 시계 이상입니다.

새로운 시대 속 시계의 재정의

3.png▲ 세이코 아스트론(출처: 세이코 공식 홈페이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시계를 발매한 세이코에서는 1969년 크리스마스에 최초의 쿼츠 시계 ‘아스트론’을 발매, 시계를 재정의했습니다. 쿼츠 시계는 태엽이 아닌 전기 신호를 통해 수정막을 진동 시켜 구동하는데요. 기계식 시계보다 정확하고 내구성도 좋으며 유지, 관리에 용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가 기능을 추가하기도 수월하죠. 시계가 태엽과 진자를 다루는 기계 기술자가 아닌 쿼츠 진동자를 계측하도록 IC회로를 설계하는 전자 기술자의 세계에 진입한 순간입니다. 쿼츠 무브먼트를 탑재한 시계들은 동시대의 기술과 유행을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죠.

이는 기존의 ‘스위스 메이드’ 기계식 시계가 명품화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계가 반도체 기술과 나란히 진보해 나가며, 기계식 시계는 상대적으로 희소성을 갖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전자시계라 불리는 디지털 시계만 쿼츠 시계로 여기곤 하는데, 디지털 시계는 물론이고 현재 나오는 아날로그 시계 역시 쿼츠 시계가 대부분입니다. 디지털 시계와 아날로그 시계는 시간의 표시 방식에 따른 분류일 뿐입니다.

태엽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숫자들

4.png▲ 카시오의 전자시계 (출처: 카시오 공식 홈페이지)

일반적으로 아날로그 시계에 비해 디지털 시계는 한결 가벼운 인상을 줍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전입니다. 조금 특이한 디자인의 저렴한 카시오 디지털 시계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제 것을 구입하면서 여자친구에게 줄 다른 색깔의 같은 모델도 함께 구입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계는 시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어떻게 시계를 선물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함께 시간을 공유해 나가자는 무거운 의미 때문이겠지요. 줄곧 그 질문을 함께 듣던 여자친구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아무나 시계 선물하는 줄 알아?” 시계를 선물했던 그 친구와 만났던 5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그 손목시계를 찼습니다. 10년이 넘게 흐른 지금, 그 말의 무게는 줄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이제 그 시계는 줄이 끊어지고 고장이 났지만 아직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품은 시계의 의미는 가벼워질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디지털 시계의 디지털은 ‘숫자’라는 뜻입니다. 내부에는 태엽이나 기어가 없고, 전지나 수정진동자 등을 넣은 전자회로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각을 표시하는 부분에는 LED나 LCD로 이루어진 액정이 사용되는데요. LED는 발광하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도 보이지만 소비전력이 크고, LCD는 소비 전력이 작지만 어두운 곳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태엽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숫자는 이렇게 그 나름의 역할을 바삐 수행하고 있습니다.

작은 동그라미 속 기술의 향연

5.png▲ 몽블랑 서밋 스마트워치 (출처: 몽블랑 코리아)

태양광 충전과 위치별 시간대 동기화를 지원하는 스마트 시계가 출시됐습니다. 1969년 시계 산업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던 최초의 쿼츠 시계, 세이코 아스트론의 이름을 달았는데요. 또 한번 전통 손목시계 업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라 불릴 만 합니다. 스마트 시계 시장으로 고개를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이어, 몽블랑과 같은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도 잇따라 스마트 시계 시장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고급 워치메이킹 역사을 지평을 열어온 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발을 들인 것입니다.

현재 스마트 시계는 스마트폰에 비견할 만한 반도체의 집적물입니다. 공통적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 플래시 메모리, 디스플레이를 포함하고 있죠. 애플 워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손목시계의 크라운을 버튼화 한 디지털 크라운, 터치 세기에 따라 실행 명령을 세분화한 포스 터치, 사뭇 색다른 진동을 선사하는 탭틱 엔진, 애플 페이, 심박 센서 등에서 반도체가 다방면으로 활용됩니다. 평소 ‘시계’하면 떠오르던 그런 보통의 시계가 아닌, 애플 워치가 처음 발매 됐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애플 워치 스포츠와 애플 워치의 비교 영상을 눈이 빨개지도록 시청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손목시계 앞에선 망설였던 분들도 스마트 시계 앞에선 매혹되셨을 줄로 압니다. 손목시계보단 스마트폰에 가깝고, 시간보다는 문명에 가까운 것이 스마트 시계니까요. 하지만 알다시피 영원히 새로운 문명은 없었습니다. 반도체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면 언젠가 스마트 시계를 뛰어넘는 어떤 종류의 시계가 등장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마트 시계가 과거가 된다면 여기에도 이야기가 덧씌워지고 ‘시계 이상의 시계’로 탈바꿈하리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시계의 무엇보다 중요한 기능은 ‘지금’이 언제인지, 그 시각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지금 시각을 알려드리자면, ‘스마트 시계’입니다.

 

누구에게는 단순히 시간을 알기 위한 도구이지만 누구에게는 반도체가 가득 담긴 상징으로 자리한 시계. 무한한 가치를 품으며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진화해 온 시계는 그만큼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오늘은 각자의 손목 위에서 수많은 모습을 하고 있는 시계를 한 번씩 들여다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단순히 기술적인 영역을 떠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울 것이 분명할 테니까요.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잡지

정우영 피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