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기업들이 해마다 자원봉사나 기부처럼 사회공헌 사업을 하고, 그 성과를 알립니다. 그리고 사회 공헌 사업의 흐름은 단순히 기업이 가진 자산을 나누는 형식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사실 기업이 세상에 나눠줄 수 있는 자원은 아주 많습니다. 돈이나 제품 등 외에도 자원봉사 그리고 넓게는 창업자의 철학까지, 기업은 그 규모를 키워갈수록 세상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무조건적인 기부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고민이 근래 사회 공헌 사업의 큰 흐름이기도 합니다.
지난 3월 21일, 애플이 새빨간 ‘아이폰7’을 발표했습니다. 이전에 내놓았던 아이폰과 기능적으로는 전혀 다를 바 없지만, 색깔만 달라졌습니다. 애플이 색깔만 바꾼 제품을 이렇게 생뚱맞게 내놓은 적은 처음입니다.
혹자는 이 제품을 두고 신제품 효과가 떨어진 아이폰 7에 숨을 불어넣는 ‘컬러 마케팅’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이 제품은 꽤 화제가 되었고, 인기도 좋습니다. 마케팅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이 빨간색이 뜻하는 의미를 읽으면 제품이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 아이폰7 프로덕트 레드 스페셜 에디션 출처 : 애플
이 아이폰의 정식 이름은 ‘빨간 아이폰’이 아니라 ‘아이폰7 프로덕트 레드 스페셜 에디션(iPhone 7 Plus (PRODUCT)RED Special Edition)’입니다. 파격적인 레드 컬러로 많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요.
하지만 애플이 이렇게 파격적인 레드 컬러를 사용한 건 아이폰7이 처음만은 아닙니다. 2006년 ‘아이팟 프로덕트 레드’라는 이름으로 레드 컬러를 사용한 적이 있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애플에서 레드 컬러의 제품이 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애플의 레드 컬러 제품에는 공통적으로 ‘프로덕트 레드’라는 명칭이 들어가는데요. ‘프로덕트 레드’라는 제품 명칭은 에이즈 퇴치를 위해 설립된 기부 재단인 '레드(RED)'를 지원하는 제품이라는 것이죠.
‘레드(RED)’ 재단을 처음 세운 것은 록그룹 U2의 멤버 보노(Bono)입니다. 그는 빈곤 국가들을 위한 여러 사업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2번이나 올랐던 바 있는데요. ‘레드(RED)’는 그의 주요 사업 중 하나이자, 가장 잘 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보노는 지난 2006년 에이즈를 퇴치하겠다는 목표로 ‘레드(RED)’라는 재단을 세웠습니다. 붉은색의 제품을 판매하고, 그 제품의 수익금을 기부해 에이즈 퇴치 연구와 약을 구입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많은 수익금을 모으기 위해서는 잘 팔릴 만한 제품이 필요했고, 보노는 친분이 있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야기해 애플을 이 활동에 끌어들였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등장한 제품이 새빨간 ‘아이팟 프로덕트 레드’ 였습니다.
▲아이팟 프로덕트 레드 출처 : 애플
애플의 프로덕트 레드 제품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기에 상품성을 충분히 갖춘 데다가, 그 의미를 알게 되면 제품이 새롭게 보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애플은 빨간색을 더 신중하게 뽑아냈고, 또 제품 디자인 시 프로덕트 레드 외에는 붉은 계열을 잘 쓰지도 않을 만큼 매우 아껴서 썼습니다.
지난 2013년에는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인 맥프로를 붉은색으로 만들고 딱 한 대만 뉴욕 소더비 경매를 통해 판매했는데, 낙찰가가 100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낙찰가 역시 ‘레드(RED)’의 의미가 전달됐기 때문에 가능한 금액이었죠.
이후 ‘프로덕트 레드’는 제품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습니다. 제품도 많이 팔려서 수익금도 계속해서 늘어갈 뿐 아니라 ‘레드(RED)’ 재단의 역할도 알려지면서 기업들의 참여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애플은 10년동안 이어져온 ‘레드(RED)’ 캠페인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레드(RED)’가 10년 간 에이즈 퇴치 기금으로 사용한 4억 6천만 달러 중 1/5인 1억 3천만 달러를 애플이 기여했죠.
애플은 직접 재단 설립에 지분 등의 사무 관계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레드(RED)’재단과 프로덕트 레드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가장 밀접하게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파트너사들을 독려하기도 하고, 이 프로덕트 레드 자체가 또 하나의 훌륭한 마케팅 방법이 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스스로 참여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4년과 2016년에는 애플의 하드웨어 외에 아이폰용 앱을 판매하는 앱스토어에 프로덕트 레드 항목을 만들어 게임이나 응용프로그램 개발사들이 프로덕트 레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는데요.
▲ 프로덕트 레드 캠페인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로도 번졌습니다. 출처 : 애플
캐릭터나 아이템을 붉은색으로 만들고 수익을 기부하는 기본 프로그램 외에도, 게임 내용을 통해 이용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에이즈를 퇴치하는 내용의 콘텐츠를 넣으면서 ‘인류가 힘을 모으면 에이즈를 몰아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애플은 빨간색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기부 활동을 이어 왔고, 소비자와 함께 에이즈를 퇴치한다는 의미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규모는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말 이 기금은 총 3억 6천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번 3월에는 4억 6천 500만 달러로 늘어났죠.
그럼 프로덕트 레드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정말 에이즈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이즈에 감염되면 그대로 모든 삶이 끝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뇨병에 걸렸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이 아니듯 에이즈 역시 이제 관리의 질병이 됐습니다. 에이즈의 진행을 멈출 수도 있고, 전염을 막기도 합니다. 그 대가는 하루에 단돈 30센트입니다. 우리 돈으로 350원이 되지 않는 금액이죠. 한 달에 1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 있으면 한 사람이, 더 나아가 한 가족이 에이즈로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 30센트짜리 약을 먹으면 에이즈의 위협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 ‘30센트’의 기적은 그동안 ‘레드(RED)’ 재단이 기부금으로 연구를 이어오면서 약 개발과 보급에 힘써온 대가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 돈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난해 에이즈의 날, 뉴욕에서 ‘레드(RED)’ 재단의 크리시 필라리시스(Chrysi Philalithes)를 만난 들은 이야기들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HIV와 에이즈 치료 약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70만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1,820만 명이 약을 통해 에이즈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HIV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가 매년 20만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400명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레드(RED)’ 재단의 발표는 30센트의 약이 에이즈의 진전을 멈추고, 태아에게 전염되는 것도 막아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크리시는 “2020년이면 지구상에서 에이즈를 뿌리 뽑을 수 있다”는 말도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허황된 꿈은 아닙니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2006년 U2의 보노와 DATA(Debt, AIDS, Trade in Africa)의 바비 쉬라이버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이들의 의도는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은 지난 10년 동안 열정을 갖고 캠페인에 함께 해 왔습니다. _애플 환경 담당 리사 잭슨 ”
사회공헌 사업의 근본적인 목적은 각 기업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세상의 불편하고 아픈 곳을 고쳐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가들이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기술로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구글은 인터넷에서 소외된 저소득 국가를 위해 무료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열기구를 띄우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인 빌 게이츠는 말라리아와 지카 바이러스 등 모기를 통해서 전염되는 병들을 잡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한 특수 모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제품 그 자체로도 우리는 이전과 충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이들이 바꾸고 싶은 세상의 한 부분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 향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