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생각이나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 두고 흔히 ‘괴짜’라고 말하곤 합니다. 과거 이러한 괴짜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면,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괴짜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는데요. ‘괴짜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요즘 시대 괴짜들은 남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휘하는 ‘천재’ 혹은 ‘스페셜리스트’로 인식되고 있죠! 오늘 소개할 리처드 파인만 역시 남다른 행보로 큰 주목을 받았던 인물인데요. 유년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가 인류 물리학에 공헌한 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하며, 그와 더불어 친근하고 탈 권위적인 행보로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과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리처드 파인만! 과연 그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요?
파인만은 1918년 5월 뉴욕시 퀸즈의 파 락어웨이(Far Rockaway)에서 태어났습니다. 2살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파인만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파인만을 과학자로 만들고 싶어해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한편 파인만을 유대교 주일학교에 보내 히브리어까지 배우게 했다고 합니다. 파인만은 이렇게 주변의 열성적인 교육열 하에 유대교 학교에 다녔으나 13살 이후로는 종교에 대해 거부하고 유대인들이 선택 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버렸는데요. 그의 부모 역시 유대인이었으나, 유대교의 의식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어렸을 적 이후 파인만은 줄곧 무신론자였으며, 자신에게 유대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타인을 특별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죠.
또한, 어린 파인만은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요. 옳은 답변보다는 질문을 통해 생각하게 하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천성인 유머와 재치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 젊은 시절의 리처드 파인만
한편, 파인만의 특별한 면모는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라디오 수리에 관심이 많아 온 동네의 라디오 수리를 도맡아 하기도 했는데요. 기계를 다루는 데 재능이 뛰어나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강도 경보 시스템을 만들어 설치했을 정도라고 하죠. 15세 때는 삼각함수, 대수, 무한 급수, 해석 기하학, 미분과 적분을 익힌 상태였으며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스스로 고안해 낸 수학기호들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특별한 재능으로 인해 그는 10대 이전부터 신동이라 불렸으며,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학문에 대한 끊임 없는 연구로 과학과 물리학 발전에 크게 공헌해 아인슈타인을 잇는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영재로 여겨지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였지만, 그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더 큰 이유는 남달랐던 화법과 성격에 있습니다.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간혹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겉치레와 위선, 권위의식 등을 격하게 증오하며 거부했습니다.
1939년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일하였으며 이후 코넬 대학교 이론물리학 조교수로 재직하였고, 1950년 쯤부터 칼텍의 교수가 되어 계속 재직했습니다. 교수가 된 그의 행보는 연일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이라 더욱 이슈가 되었는데요. 강연을 해주는 조건이 "사인을 열 세 번만 하는 것"이라거나, 노벨상 수상자리에서 왕에게 뒷면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례에 '그러면 모둠발로 뛰면서 나와야지'라고 결심하거나, 로스 알라모스에서는 편지 검열제도에 도전*하는 등 탈권위적인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천재들이 모인다는 멘사도 매우 싫어해 자신의 아이큐 검사 결과가 123정도로 평범하게 나왔을 때 멘사의 입사 권유를 자연스럽게 거절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했다고 하는데요. 반면, 학생들이나 물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관대했습니다.
* 자서전 '남이야 뭐라 하건!'을 읽어 보면 관련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는데요. 편지를 죄다 암호로 만들어버려서 검열관들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 장난을 칠 땐 아내와 합작했다고 합니다.
리처드 파인만은 쉬운 강의로도 매우 유명했습니다. 그는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은 쓸모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핵심을 꿰뚫는 인용과 설명으로 양자전자역학은 물론 컴퓨터, 중력, 통계, 적분에 관한 강의록을 남겼습니다. 1986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했을 때 그가 방송에서 고무와 유리컵, 얼음만으로 폭발 원인을 설명한 일화는 유명하죠. “공동사회의 개별 구성원은 시각 또는 상징 수단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아리송한 문장을 “사람들은 읽는다”는 말로 정리한 것처럼, 핵심만을 간단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축약과 인용법은 최근까지도 연령대를 불문하고 널리 벤치마킹되고 있습니다. 어느 어린이 과학 서적에서는 그의 사고법에 따라 ‘관성’을 ‘고집’으로 바꿔 생각하라고 제안하고, 대학교수들은 그의 강의를 모범 사례로 참고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파인만은 ‘쉽고 명확한’ 학문을 지향했습니다.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와 <파인만의 또 다른 물리 이야기>는 파인만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학부생을 위한 강의(강의록)에서 6가지씩 발췌한 책입니다. 그리고 <물리법칙의 특성>은 코넬 대학에서 대중 강의로 쉽고 재미있는 '물리법칙의 특성'에 관한 강의록을 묶은 것으로, 영국 BBC 방송에서도 방영 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학생과 일반인들을 사로잡기도 했죠. 이 책에서는 그의 삶 자체에서 우러나온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적인 열정으로 물리학의 난해한 법칙들과 심오한 개념들을 수학용어나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와 재치 있는 표현을 통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집어내고 누구나 경험한 일상적인 것들을 예로 들어 보여줌으로써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강의 중에 타악기를 연주하기도 한 파인만은 학생과 대중들을 위하여 그 자신이 밝혀낸 이 우주와 세계의 비밀을 재치 있고 풍요롭게 설명하는데 능숙한 학자였으며, 언제나 독특한 발상과 질문을 던졌던 창의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국내에도 소개된 그의 자서전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를 읽다 보면, 한 유쾌하고도 독특한 천재의 진지한 삶을 볼 수 있는데요. 서유럽 학자들과 달리 그는 결코 그 자신의 삶을 정전화하거나 신비화하거나 역사화 하지 않죠. 그의 실용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런 그의 삶을 단 하나의 단어로 꿰자면 바로 ‘놀이’일 텐데요. 그는 핵 관련 프로젝트에 참가할 당시 보안상의 이유로 편지가 검열을 받자 가족과 암호를 만들어 설정 놀이를 즐겼습니다. 브라질 물리학 센터에서 강의를 맡은 기간에는 삼바 퍼레이드의 흥겨움에 취해 봉고 연주자로 나서기도 했죠. 놀라운 점은 이렇게 놀이를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그를 대표하는 업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인데요.
레스토랑에서 친구가 장난 삼아 던진 접시를 보고, 순간 접시 로고가 돌아가는 속도와 흔들리는 속도 간 차이에 호기심을 느끼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양자전자역학과 맞물리는 물리학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발전시킨 게 바로 ‘파인만 다이어그램’으로 현재까지 이론물리학 전반에 사용되는 도표입니다.
★ 파인만 다이어그램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어려운 물리학을 쉽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도표입니다. 리처드 파인만은 복잡한 수식으로 나타내야 할 것을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도식으로 표현했는데요. 이것은 당시 물리학계에서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많은 물리학도들은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양자전기역학을 배웠습니다.
파인만은 1945년부터 코넬 대학에서 조교수로 연구하면서 양자전기역학에 몰두했는데요. 1951년에는 캘리포이나 공대로 옮겨, '물리학의 양심'으로 불리는 볼프강 파울리와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 같은 학자들이 시도한 양자역학의 핵심 난제에 도전했습니다. 파인만은 자신의 양자전기역학의 기본적인 운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바로 이 파인먼 다이어그램을 고안해냈습니다. 파인만이 고안한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이후의 이론 물리학에 널리 이용되었으며 20세기 물리학 중 거시적 세계를 아인슈타인이 다루었다면 미시적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은 파인만으로 대표될 정도로 물리학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죠. 이 다이어그램으로 양자전기역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으며 그 성과로 파인만은 1965년에 줄리언 슈윙거, 도모나가 신이치로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됩니다.
복잡한 물리법칙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탁월한 비유로 명쾌하게 풀어낸 리처드 파인만. 그의 학문에 대한 접근법은 여전히 널리 사용되며 과학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물리학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문제는 그 일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느냐다.” 리처드 파인만의 이 말처럼 그는 평생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 자신만의 방식대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파인만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물리학계에서 어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명성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요. 혹여나 주변 사람이 ‘그게 물리학에 어떤 중요성이 있는 거지?’라고 물어보면 파인만은 그저 ‘재미있잖아!’라고 답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파인만의 모습이야말로 학자 파인만의 업적과 인간 파인만의 매력을 모두 빛나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저 좋아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기며, 몰두하는 그의 태도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