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마블 어벤져스’ 타이틀 이미지(사진제공 :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는 무적의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 게임업계에서는 캐릭터 및 세계관을 포함한 콘텐츠 사용 권리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된다)다. 원작 만화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영화와 게임을 비롯한 수많은 콘텐츠로 확산되며 세계적인 규모의 팬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 무적의 IP로 만들어진 게임업계 하반기 최고의 기대주 ‘마블 어벤져스’가 지난 9월 초 베일을 벗었다.
‘마블 어벤져스’로 살펴본 대형 IP의 게임화 메커니즘
‘어벤져스 엔드게임’ 등 근래 이 IP로 제작된 영화들의 성공 규모를 보면, 이제는 이 IP로 무엇을 하든 사람들이 사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렇지만 모두에게 친근한 캐릭터와 세계관을 가져와도 이를 좋은 게임으로 만드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캐릭터와 설정은 가져오면서 IP의 큰 기둥 중 하나인 스토리를 그대로 살려서 쓰는 일은 많지 않아서다.
특히 이런 경향은 미국 콘텐츠 기업이 보유한 IP들의 경우에서 두드러지는데, 스토리와 캐릭터가 한 명의 작가에 의해서 완결되고 통제되는 경우가 드문 분업 체제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마블이나 DC코믹스와 같은 판권사가 캐릭터 설정과 세계관을 관리한다. 이 구조에서 스토리는 확산될수록 좋다.
마블의 법률 문서에 따르면 회사 산하에 이미 8,000여 개 캐릭터가 있다. 판권사는 일종의 매니지먼트 회사다. 캐릭터들을 치밀하고 꼼꼼하게 관리하지만 어떤 캐릭터든 대중에 새롭게 노출될 기회가 온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그렇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ble Cinematic Universe, MCU. 마블 코믹스에서 출간된 만화를 원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영화 시리즈.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이 활동하는 영화적 세계관을 의미하기도 한다)가 탄생했고, ‘마블 vs 캡콤’처럼 캐릭터들을 통째로 게임사에 대여해서 스튜디오 간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게임을 유통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의 앞뒤 연결이 안 되는 건 기본이고, 동시의 아예 평행 우주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마블은 ‘유니버스(Universe, 스토리가 구축되는 세계관)’라는 편리한 단어를 애용한다. 이에 따르면 영화에서 일어난 일은 영화의 설정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게임은 영화는 물론, 원작인 만화와도 사뭇 다른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 누구도 “왜 이렇게 이야기가 제멋대로냐”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냥 “세계관이 다르다”고 말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아이언맨, 헐크, 토르 같은 어벤져스 멤버들을 마음대로 움직여 빌런과 맞설 때의 쾌감은 짜릿하다. 각 히어로의 시그니처 동작이 대부분 구현돼 있을 뿐만 아니라 타격감도 좋고, 마블 팬을 겨냥한 소소한 이스터 에그(Easter Egg, 게임 개발자가 게임 속에 재미로 몰래 숨겨 놓은 메시지나 기능)를 찾는 재미도 있다.(사진제공 : 반다이남코 엔터테인먼트 코리아)
하지만 익숙한 기존 스토리와 다르다 보니 어딘가 어색하다. 특히 만화는 본 적 없고 영화 전편(全篇)을 정주행(하나의 시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보는 시청 방식)한 한국 게이머들은 뇌리에 각인된 익숙한 얼굴들과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주는 어색함을 떨치기 힘들다. 아무리 디지털 시네마틱스(Digital Cinematics)가 진보해도 기억 속 할리우드 배우를 이길 수는 없나 보다.
영화를 게임으로 만드는 일의 고단함
업계에서는 IP 게임에 대한 오랜 두려움이 있다. 다큐멘터리에도 자주 등장하곤 하는 희대의 ‘망작’ 게임 E.T.도 나름 스티븐 스필버그의 승인을 거쳐 출시된 게임이다. 심지어 그는 개발자를 “천재”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과는? 좋은 IP를 가지고도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지 못한 게임의 운명을 알려주는 일화가 되었다.
E.T.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추려고 사실상 개발자 홀로 5주 만에 급조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몰락하던 비디오 게임업계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자신 대신 실패한 게임 하나를 탓했다.
IP 게임 개발자들에게는 “저런 IP로 그것밖에 못 만드느냐”는 마음의 목소리가 늘 맴돈다. 특히 어벤져스와 같이 강력한 IP는 큰 기대와 함께 팬덤(Fandom)이 덤으로 딸려오기에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2020년, 대작 게임이라면 실사 느낌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이제 게임은 인간이 지닌 고도의 추상 능력을 절절히 자극하는 감각적 보조재가 아니라, 고도로 사실적인 시청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몰입형 종합 미디어가 됐다. 5주 만에 홀로 개발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백 명이 투입돼도 5개월 정도는 우습게 연기되기도 한다. ‘마블 어벤져스’도 원래 5월 출시 예정이었으나 9월로 일정이 연기된 바 있다.
이는 요즘 게임이란 자금이나 인력뿐만 아니라 기술까지 사전에 축적돼 있지 않으면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기업만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게임 엔진(Game Engine, 게임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래밍을 돕는 각종 툴과 소스 코드를 담은 소프트웨어)의 존재다.
게임 완성도에 기여하는 게임 엔진의 역할
‘마블 어벤져스’의 개발사는 ‘툼레이더’를 부활시켰던 실력 있는 개발사다. 또한, 게임에 IP를 제대로 녹일 줄 아는 팀이다. 마블 어벤져스는 툼레이더 리부트 시리즈와 사실상 같은 엔진을 쓰고 있다. 스퀘어 에닉스의 개발 스튜디오인 크리스탈 다이나믹스의 자체 개발 엔진인 ‘파운데이션 엔진’이 그것. 이 엔진은 기존 버전인 ‘크리스탈 엔진’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이처럼 대부분의 대작 개발사들은 독자적 엔진을 보유하고 발전시켜오고 있다. 여유가 좀 있고 오래 입으려 한다면 기성복보다는 맞춤복을 사는 게 당연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개발사들이 대작 게임을 만들 때, 독자적 게임 엔진을 쓰는 이유로 기술적 차별화를 꼽을 수 있다. 올해 언리얼 엔진(Unreal Engine, 미국 게임 및 소프트웨어 개발사 Epic Games가 개발한 게임 엔진)에 적용된 ‘퓨어헤어(AMD TressFX의 개량)’ 기능이 대표적인 예다. 주인공의 머리카락 표현과 같은 기술적 차별화에 특화된 기능으로, 생머리 한올 한올의 자연스러운 흩날림은 물론 눈발이 머리카락에 묻는 것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게임 엔진은 필요한 것을 강화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언리얼이나 유니티(Unity Engine, 덴마크 소프트웨어 개발사 Unity Technologies가 개발한 게임 엔진) 같은 범용 상용 엔진은 제작 중인 게임에는 개발 초반에는 쓸데없는 오버헤드(Overhead, 어떤 처리를 하기 위해 들어가는 간접적인 처리 시간이나 메모리)가 따라붙어 귀찮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건 경제적 문제다. 얼마 안 되는 엔진 사용 수수료라도 만들어진 게임이 팔리면 팔릴수록 부담이 된다. 일반 상용 엔진 라이선스의 단위당 증가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시점이 반드시 오니, 게임의 규모가 커질수록 초기 투자는 보람이 있다.
하지만 수많은 현장에서 단련된 범용 엔진과는 달리 자체 개발 엔진은 문제가 생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모든 건 자체 책임이다. 이번 ‘마블 어벤져스’도 유난히 버그가 많이 발생하는 편이다.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해도 미션이 완료되지 않거나 크레딧(Credit, 게임 내 화폐)이 사라지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그래픽 카드에 따라 크래시(Crash, 게임 플레이 도중 갑자기 게임이 강제로 종료되는 오류 현상)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점이다.
반도체 발전이 가져올 새로운 게임 환경
다행히도 게임은 영화와는 달리 출시 후에도 필요한 기능이나 콘텐츠를 계속 추가할 수 있다. 일단 한 번 CD로 인쇄되고 카트리지가 제작되면 버그 수정이 불가능하던 시절과 달리, 요즘 게임들은 반도체 위에 로딩(Loading)되거나 다운로드(Download)돼 실행된다. 반도체 위에서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수많은 캐릭터를 보유한 마블의 경우 원한다면 언제든 새로운 캐릭터와 지역 등 설정을 추가할 수 있어, 싱글 캠페인에 익숙한 개발사에도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준다. 실제로 곧 DLC(DownLoadable Contents)로 호크아이가 추가될 예정이며, 플레이스테이션(Play Station, 이하 PS) 한정 히어로도 등장할 예정이다. 아마 소니와 전속 계약 상태인 ‘스파이더맨’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오류가 발생하거나 새로운 하드웨어가 등장해도 패치나 확장팩 등 소프트웨어로 쉽게 대응할 수 있다. 지금 PS4용 타이틀을 구매하더라도 무료 업그레이드로 PS5에서도 즐길 수 있고, XBox도 마찬가지로 차세대 시리즈X 타이틀을 무상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4K(3,840×2,160) 해상도와 60fps(Frames Per Second, 1초에 보이는 화면 수) 수준의 화질이 확보될 테니, 한 번 즐긴 게임도 다른 느낌으로 다시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적 개선을 전제로 한다. ‘마블 어벤져스’도 차세대 게임기로 업그레이드되면 GPU로 텍스처 해상도를 향상한다거나 개선된 AO(Ambient Occlusion, 틈과 틈 사이의 그림자를 표현하는 기술)와 SSR(Screen Space Reflection, 젖은 바닥 면에 빛이 반사되는 것을 재현하는 기술)을 제공해 줄 예정이다. 이는 모두 새로운 반도체와 이를 구동할 업그레이드된 코드가 가져오게 될 변화다.
특히 차세대 게임기들에 탑재된 대용량 저장장치(Solid State Drive, SSD)의 속도는 상당해서, 로딩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처럼 로드가 갑자기 오래 걸리는 문제로 게임 흐름을 저해하는 일은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