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들이 혁신을 위한 발판으로 사내 벤처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기업 내 유능한 인재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창업에 도전할 수 있고, 기업은 이렇게 탄생한 스타트업과 협업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할 수 있기 때문. SK하이닉스도 2018년부터 사내 벤처 지원 프로그램 ‘하이개라지(HiGarage)’를 통해 구성원들의 창업 도전을 지원하고 있다. 1기와 2기에서 각각 4개, 5개 벤처 기업이 탄생했고, 올해는 비(非)반도체 분야까지 모집 범위를 확대해 3기를 선발했다.
뉴스룸은 선배 격인 하이개라지 1기 창업 멤버들을 한 팀씩 만나보며, 하이개라지로 싹 틔운 창업 아이디어가 어떻게 발전해가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세 번째 주자는 노후 반도체 장비 개선 사업을 시작으로 지금은 종합 반도체 장비 제조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알씨테크(RC-Tech)’다. 하이개라지를 통해 엔지니어 시절 품었던 ‘반도체 장비 국산화’의 꿈을 하나씩 실현해가고 있는 임태화 대표에게 그간의 창업 과정과 앞으로 알씨테크와 함께 그려갈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임 대표는 장비 엔지니어로 일하며 늘 ‘국산 반도체 장비’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원천 기술 없이 외산 장비에 의존하다 보니 제조사의 결정에 따라 장비 운용에 차질을 빚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
그가 창업을 마음먹게 된 것은 불합리함 때문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잘 사용해왔고 앞으로도 문제없이 가동할 수 있는 장비를 앞으로 기능 업그레이드가 지원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며 “그러던 중 사내벤처를 지원하는 하이개라지 프로젝트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돼, 직접 이를 해결해보기 위해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임 대표가 하이개라지에 제출한 창업 아이디어는 해당 디퓨전 퍼니스 모델에 업그레이드 기능인 ‘드라이 클린(Dry Clean)’ 기능을 장착하는 아이디어였다. 이 기능은 화학물질 대신 건식 세척 방식으로 장비 내 이물질을 제거하는 기능으로, 세척을 위해 장비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손실을 줄이고 화학물질 사용으로 인한 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초기부터 빠르게 성과를 낸 만큼, 임 대표의 창업 도전 과정은 순조로웠다. 하이개라지 1기 중 가장 빠르게 창업에 성공했고, 창업 이후 SK하이닉스와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바로 해당 장비의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SK하이닉스는 장비 투자 비용을 아낄 수 있게 됐고, 기존 방식으로 장비 세정 시 연간 수만 리터(ℓ)씩 소모되던 고순도 불산 구매비용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세척 방식을 친환경 방식으로 변경함으로써, 추가적인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됐다. 임 대표도 하이개라지 덕분에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반도체 장비 국산화’의 꿈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됐다.
그는 “도자기 명장은 도자기를 굽는 방식과 온도에 맞춰 가마도 직접 만든다”며 “반도체 기업도 앞으로의 기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는 핵심 장비의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SK하이닉스와 긴밀한 협업 관계를 이어가면서 핵심 부품과 장비의 국산화에 도전해, SK하이닉스의 기술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임 대표는 창업 준비 단계부터 ‘처음에는 노후 장비 개선 사업으로 시작하지만 자본과 기술력이 축적되면 부품 및 장비의 국산화에 도전하겠다’는 장기적인 청사진을 그렸다. 창업에 성공한 이후에도 관련 분야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왔고, 노후 장비 개선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른 지금은 본격적으로 핵심 부품의 국산화를 추진 중이다.
임 대표는 “다양한 장비를 접하고 이를 정밀 분석하며 기술력을 축적했고, 최근에는 표준과학연구소로부터 기체투과도 측정장치 특허 기술을 양도받아 지능형 자동압력밸브와 항온조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동압력밸브는 챔버(Chamber) 안의 압력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장치로, 현재는 일본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고, 항온조는 액체를 기화해 챔버에 공급함으로써 원하는 막질을 형성하는 부품으로, 현재 독일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알씨테크는 빠른 시일 안에 관련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기존 장치에 인공지능(AI) 기능까지 추가한 지능형 제품을 개발 중이다.
두 부품은 현재 개발이 거의 완료돼 시제품이 제작된 상태로, 테스트와 상품화 과정을 거쳐 조만간 시장에 출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알씨테크는 다양한 배관류 부품의 국산화도 진행 중이다. 또한 사물인터넷(IoT)과 SoC(System on Chip)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반도체 장비도 구상 중이다.
임 대표는 앞으로 출시될 신규 장비의 모델명도 미리 결정해 두었다. 모델명은 ‘RC-300K’로, 분류명 K에는 외산 부품으로 제작된 반쪽짜리 국산 장비가 아닌 핵심 부품까지 모두 국산화가 이뤄진 K-반도체 장비라는 의미를 담았다.
임 대표는 “핵심 부품을 국산화한 다음 모듈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신규 장비를 개발하는 로드맵을 수립하고 필요한 과제를 하나씩 수행해가고 있다”며 “현재 핵심 부품 개발을 위해 국책과제를 진행 중이고, 2023년부터는 장비 개발에 대한 국책과제 수주에도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는 “장기적으로는 디퓨전 퍼니스, CMP, WET-Clean 등 해외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100% 선점하고 있는 장비 분야에도 진출할 계획”이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합 반도체 장비 제조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임 대표는 창업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하이개라지로부터 받은 도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반도체 업의 특성상 테스트를 위해 장비를 잠깐 내주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라며 “현장의 장비에 직접 시제품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장비 관련 사업을 해보고 싶어도 실제로 장비를 다뤄보고 기술을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며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의 구성원으로서 장비를 직접 다뤄볼 수 있었기에 창업의 꿈을 키울 수 있었고, 하이개라지를 통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사내벤처 제도에 대해서는 “초기 창업 자금과 몰입 환경을 제공하고, 모기업의 인프라도 일정 부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회사와 직원 모두 상생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구성원에게 실패 걱정 없이 자기 사업에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회사에 필요한 부분을 살펴보고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임 대표는 지금 하이개라지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는 예비 창업자들에게 경험에서 우러난 현실적인 조언도 남겼다.
그는 “사업 아이템만 좋다고 모두가 성공하긴 어렵다. 반드시 시장 수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술적으로 접근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살펴봐야 한다”며 “모기업인 SK하이닉스와 협업을 통해 Win-Win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와 함께 “회사 바깥에서의 경쟁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해 전쟁터에 나서는 수준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며 “모기업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사내벤처의 장점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가려면 자신의 사업 아이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변수와 경쟁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