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들이 혁신을 위한 발판으로 사내 벤처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기업 내 유능한 인재들은 안정적인 환경에서 창업에 도전할 수 있고, 기업은 이렇게 탄생한 스타트업과 협업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할 수 있기 때문. 또한 MZ세대를 중심으로 회사를 구성원의 성장 파트너로 인식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구성원의 커리어 다양성을 지원하는 사내 벤처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SK하이닉스도 2018년부터 사내 벤처 지원 프로그램 ‘하이개라지(HiGarage)’를 통해 구성원들의 창업 도전을 지원하고 있다. 1기와 2기에서 각각 4개, 5개 벤처 기업이 탄생했고, 3기는 6팀이 창업에 도전 중이다. 4기는 현재 선발 절차가 진행 중이다.
뉴스룸은 선배 격인 하이개라지 1기 창업 멤버들을 한 팀씩 만나보며, 하이개라지로 싹 틔운 창업 아이디어가 어떻게 발전해가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네 번째 주자는 신규 소재와 공정을 개발해 공정 효율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는 첨단 소재 전문기업 ‘엠에이치디(MHD)’다. 하이개라지를 통해 어엿한 벤처 사업가로 자리 잡고, 하루하루 성장해가고 있는 MHD 이성재 대표에게 그간의 창업 과정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이성재 대표(왼쪽)가 연구진과 함께 새로운 소재를 테스트하고 있다.
이성재 대표는 오랫동안 포토 공정에 사용되는 다양한 소재를 다뤄온 소재 전문가다. SK하이닉스에서도 협력사와 함께 포토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의 품질을 관리하고 신규 소재를 개발하는 업무를 담당해왔다.
이 대표는 어엿한 벤처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가 된 지금도 자신을 ‘엔지니어’라고 소개한다. 그만큼 엔지니어로 지낸 세월이 길었고, 이를 천직으로 여겨왔기 때문. 하이개라지를 만나기 전까진 창업하게 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사내 벤처에 도전하게 된 건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신규 소재 및 공정 개발에 도전해 회사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 반도체 선폭이 점점 미세화되는 상황에서 제조 효율을 높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는 과제 해결을 위해 팀원과 함께 여러 아이디어를 검토했고, 각 분야 동료 구성원과 함께 실현 가능성을 면밀히 살폈다. 이런 노력 끝에 마침내 포토 공정 중 스페이서 패터닝(Spacer Patterning) 방식을 기존 증착 방식에서 스핀 코팅 방식으로 바꿔 프로세스를 단축하는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도출한 아이디어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공정 프로세스도 다시 수립해야 하는 대장정으로, 실무는 협력사에 맡기고 관리만 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실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발 과정에 깊이 관여하기 어렵고, 업무 효율 측면에서도 우려되는 점이 많았기 때문.
그는 “엔지니어로서 직접 개발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개발에만 집중하기에는 여건상 어려움이 있었고, 쓸 수 있는 시간과 비용도 한정적이었다”며 “사내 벤처 제도를 잘 활용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하이개라지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고 말했다.
하이개라지를 통해 충분한 시간과 자금을 얻었고 아이디어 심사에서도 실현 가능성과 사업성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2년 안에 개발을 완료하고 회사에 적용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그는 고심 끝에 복귀 대신 창업을 선택하게 됐다.
그는 “이전에는 창업에 필요한 기질이 따로 있고 그런 기질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이개라지에서 창업 교육을 받다 보니 내 안에도 사업 DNA가 잠재돼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창업 교육을 통해 기존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을 하나씩 배우며 흥미를 느꼈고 그동안 해왔던 일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창업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과감하게 창업을 결심했지만, 창업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 대표의 곁에는 든든한 지원군, 하이개라지 운영팀이 있었다. 그는 “하이개라지 운영팀과 함께 준비했기에 창업에 대한 두려움을 덜 수 있었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명 MHD는 ‘Materials for Highend Device’의 약자로, 차세대 반도체 장비를 위한 소재를 개발해 공급하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에 있는 소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공정 효율화를 이루고, 고객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 첨단 소재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MHD가 추구하는 목표다.
반도체 소재의 특성상 연구개발에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특정 제품의 개발에 성공해도 최소 3년은 지나야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현재 MHD가 개발 중인 제품들은 모두 매출이 발생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상황. 이 대표는 “개발을 마친 신제품을 하나씩 시장에 소개하며 거래처를 확보하고 있는 단계”라며 “모내기는 성공적으로 마쳤고, 벼가 잘 익어가도록 지속적으로 힘을 쏟고 있는 만큼, 곧 수확의 계절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가 처음 하이개라지에 제출했던 아이디어는 3년여의 연구개발 과정을 거쳐 개발한 신소재로 목표한 패턴을 형성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제품화까지는 여러 개선 과정이 남아 있지만, 올해 안에 모두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
이 대표는 “이 제품이 고객사에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하면 기존 스페이서 패터닝 공정 프로세스 중 상당 부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연간 1,000억 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중 얻은 개발 결과물 중 포토 공정에 사용할 소재로는 부적합하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효용 가치가 큰 소재를 일부 제품화해, 현재 고객사와 함께 양산 평가를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차세대 반도체 공정에 사용할 수 있는 신규 첨단 소재도 고객사와 공동으로 개발해, 기술 이전 계약을 체결하고 올해 1분기 중 시제품 공급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 대표는 “현재 고객사 평가가 진행 중인 이 두 소재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을 해외 업체에 전량 의존하던 소재를 새로운 기술로 국산화한 제품”이라며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가치도 함께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전했다.
막 창업에 도전하던 시기와 비교하면 연구개발 역량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이 대표는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인재들을 영입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은 모두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 성장했다. 그는 “반도체 전문 분야의 인재들을 육성하는 것도 반도체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MHD가 해야 할 숙제 중 하나”라며 “구성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역량을 갖추면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MHD의 성장 방향성에 대해서도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잘할 수 있는 것만 잘하는 회사’와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R&D 전문기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MHD는 소재 연구개발에만 집중하고 제조와 판매는 더 잘할 수 있는 파트너에게 맡겨, 각자 전문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반도체 소재에 필요한 원재료, 제조시설, 품질 관련 등 가려진 곳의 인재 풀을 확장해, 더불어 성장하는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이 대표는 지금 이뤄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시장 흐름에 맞는 제품을 우선순위에 놓고 신규 사업 아이템도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우수한 연구인력을 확보하는 한편, 그렇게 확보한 인재들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반도체 인접 분야로의 사업 영역 확장도 준비 중이다. 그는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소재들은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용도가 높다”며 “다양한 산업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첨단 소재 전문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다음 목표”라고 말했다.
창업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대표가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었던 건 하이개라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은 덕분이다.
그는 “창업을 준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법인 설립, 고객사 협력업체 등록, 정부 연구과제 신청, 자금 확보 등 모든 과정이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는 점”이라며 “하이개라지에서 제공하는 창업 교육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하나씩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창업 준비과정을 함께한 1기 동료들도 힘들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그는 “항상 무슨 일이 있으면 같이 모여서 정보를 공유하고 해결 방법을 함께 찾아준 동기들이 큰 힘이 됐다”며 “같은 어려움을 겪고 서로 공감해준 동기들 덕분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도 그런 줄 모르고 순탄하게 잘 헤쳐온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이 대표는 사업에 꼭 필요한 요소로 시간, 자금, 네트워크를 꼽았다. 그러면서 “하이개라지와 함께하면 이 세 가지에 대한 도움은 확실히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SK하이닉스 구성원으로서 창업을 경험해 볼 수 있는 2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사업 아이템을 구체화하고 안정화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며 “초기 사업자금을 회사와 정부의 지원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 회사의 기틀을 다지고 시장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창업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를 확보하는 것”이라며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이개라지 운영팀이 회사 내·외부에 확보하고 있는 네트워크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창업을 생각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후배 구성원들에게도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남겼다.
그는 “창업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 중 하나로, 대표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그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며 “구성원의 입장과 대표의 입장은 완전히 별개인 만큼, 그 사이의 그레이 존(Gray Zone, 양쪽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중간 지점)을 빠르게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고비 때마다 늘 하이개라지 창업 교육에서 배운 실패 사례를 되짚어 보며 누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라며 “성공 사례를 보고 꿈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항상 실패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면 실수하지 않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그의 마지막 종착점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나중에 회사가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면 경영에서 손을 떼고, 그동안 안정된 직장을 나와 사업하는 남편을 지지해주고 희생해준 아내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아내가 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함께 미술관을 운영하며 아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볼 수 있게 도와주고 싶습니다. 예술계에도 벤처 정신이 높은 작가들이 있으나, 세상에 알려질 기회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미술관을 운영하며 그런 작가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