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지난 2월 26일 첫 접종을 시작으로 순차적인 백신 접종이 이뤄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세계 경기 전망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반도체 시장에는 그 훈풍이 먼저 불어오는 모양새다. 심지어 자동차용 반도체는 수요가 폭증해 공급난에 직면한 상황이기도 하다. 과연 2021년의 반도체 시장은 어떻게 바뀔까?
세계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난 극심…GM에 이어 테슬라도 차량 생산 중단
그동안 반도체 시장에서 곁다리 취급을 받던 자동차용 반도체가 단숨에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올해 초 자동차용 반도체 주문이 폭증하면서 공급난이 발생했기 때문. 단순히 공급이 조금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동차 업체들이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GM이 가장 먼저 생산라인을 멈춘 데 이어 최근에는 세계 1위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마저 캘리포니아주 공장에서 보급형 모델인 모델3 생산을 2주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반도체는 일반적으로 IT 기기에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자동차에도 엄청나게 많이 탑재된다. 엔진은 물론, 자동변속기, ABS(Anti-lock Brake System)1) 등 각 장비를 제어하는 전자 장비나 IVI(In-Vehicle Infotainment)2)에는 반도체가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최근 점점 주류로 자리 잡고 있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서도 반도체는 핵심 부품이다.
앞으로는 자동차에서 컴퓨터, 스마트폰 등 기존 주요 기기보다 훨씬 더 많은 반도체 수요가 일어나리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자동차용 반도체 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인피니언(Infineon Technologies), NXP 등이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업체로 꼽힌다.
1) ABS: 자동차 급제동으로 인한 타이어 잠김(Lock) 현상을 회피하기 위해 개발된 특수 브레이크.
2) IVI: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차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와 정보(information) 시스템을 총칭하는 용어로, 영화·게임·TV·SNS 등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기능과 내비게이션, 모바일 기기가 연동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기 또는 기술을 의미함.
하지만 최근 자동차용 반도체는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품귀 현상을 겪고 있다. 생산량이 수요를 아예 따라잡지 못해 공급 중단 사태가 발생한 것. 반도체 업계에서는 자동차 수요 예측 실패가 이 같은 상황을 불러왔다고 분석한다. 당초 자동차 업계에서는 작년부터 발발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자동차 소비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반도체 주문량 자체를 줄이기 시작했고, 관련 라인을 다른 품목의 생산라인으로 전환한 반도체 업체들도 많았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의 이 같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각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이 이뤄지고 예상보다 빨리 백신이 개발되면서 소비심리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 이에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량 증대를 위해 반도체 주문량을 크게 늘렸지만, 반도체 업체들은 이를 따라가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문제는 소비·투자 심리에 불붙은 품목이 자동차뿐만 아니라는 점이다. 스마트폰, PC 등은 재택근무 활성화 등에 따라 수요가 증가했고, 데이터양이 늘어나면서 클라우드용 데이터센터 투자 수요도 함께 커졌다. IT 기업들까지 줄줄이 반도체 주문량을 늘려, 반도체 공장은 100% 가동률을 기록하고 있다. 파운드리 업체들이 이런 와중에 비교적 수익성이 낮은 자동차용 반도체에 물량을 배정할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 자동차용 반도체는 구형 8인치 웨이퍼로 생산하는데, 이 라인업은 비교적 마진이 박한 편이기 때문.
최근 전 세계를 휩쓴 기상 이변도 반도체 생산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텍사스 오스틴 공장은 전기 공급 중단 등으로 가동을 멈췄고, 대만 TSMC도 가뭄으로 인한 용수 공급 차질로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주요 자동차용 반도체 업체인 인피니언, NXP은 물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exas Instruments)와 ST마이크로(STMicroelectronics)도 나란히 생산에 차질을 빚는 것으로 전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도체 업계에서는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이 정상화될 때까지 최소 6개월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선 현재 폭증하는 반도체 수요가 진정된 이후에야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줄줄이 참전
세계 경제와 기술 발전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차세대 반도체로 꼽히는 AI(인공지능) 반도체 시장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NPU(Neural Processing Unit, 신경망처리장치)라고 불리는 AI 반도체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나 GPU(Graphics Processing Unit, 그래픽처리장치)와 달리 초대용량 연산 처리에 최적화된 반도체 구조를 뜻한다. 기존 반도체 대기업인 인텔(Intel), 삼성전자 등은 물론이고 구글(Google), 아마존(Amazon) 등 IT 대기업도 자체 NPU 개발에 뛰어든 상태다.
이 중에서도 스타트업들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대표적인 기업이 영국의 그래프코어(Graphcore)다. 그래프코어는 스타트업 분석 전문 매체인 CB인사이츠가 집계한 ‘세계 10대 인공지능 스타트업’ 가운데 반도체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꼽힌 기업으로, AI 및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처리를 가속하는 IPU(Intelligence Processing Unit, 지능형처리장치)를 개발했다.
그래프코어가 개발한 제품은 총 236억 개의 트랜지스터(Transistor)가 장착된 세계 최초의 메모리 중심 병렬 프로세서로 주목받았다. 이 제품은 프로세서 자체에 메모리를 장착해 데이터 전송 지연 없이 초대용량 데이터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그래프코어가 지금까지 받은 투자금액은 5억 달러 이상으로, 이를 통해 세계적인 유니콘 기업3)으로 성장했다.
3) 유니콘 기업: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 기업.
인텔이 인수한 하바나랩스(Habana Labs) 역시 상당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하바나랩스는 인텔의 주력 사업인 서버용 반도체 기술과 품목을 훨씬 넓혀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대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가장 앞선 기업은 단연 엔비디아(NVIDIA)다. 엔비디아는 그동안 쌓인 GPU 기술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AI용 반도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반도체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맞춤형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oftware Development Kit, SDK)까지 대거 배포하면서 AI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이에 맞서는 구글은 자체 AI 머신러닝 엔진인 텐서플로(TensorFlow)에 최적화된 AI 특화 반도체 TPU(Tensor Processing Unit)를 개발해, 자체 클라우드 서버에 적용했다. 구글의 TPU는 MLPerf4)가 진행한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에서 엔비디아에 육박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4) MLPerf: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인텔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 하버드, 스탠퍼드 등 대학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으로, 이들이 진행하는 글로벌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결과는 업계에서 AI 반도체 성능을 측정하는 공신력 있는 지표로 활용된다.
국내에도 △퓨리오사AI(FuriosaAI) △모빌린트(Mobilint) △딥엑스(Deepx) △리벨리온(Rebellions) 등 AI 반도체 분야 스타트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대부분 현업에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다. 딥엑스 창업자는 애플에서 근무하면서 아이폰용 프로세서 설계에 직접 참여했고, 리벨리온에도 IBM, 삼성전자 등에서 시스템 반도체, AI 등을 연구해온 이들이 다수 합류했다. 국내 스타트업들은 아직 시제품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기술 개발을 통해 빠르게 제품을 출시하고 곧 양산에 돌입하겠다는 계획이다.
세계 반도체 장비 투자, 사상 최고치 경신 전망…반도체 시장 슈퍼사이클 돌아올까
반도체 시장 전망이 급격하게 좋아지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청신호가 들어왔다. 반도체 산업의 장비 투자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것.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글로벌 주요 시장조사업체의 분석 결과를 종합한 뒤 “올해 반도체 시장은 9%가량 성장할 것”이라며 “올해와 내년에 공장, 반도체 소재, 테스트, 패키징 등 전 분야에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가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해 반도체 장비 시장 규모는 660억 달러로 2020년(590억 달러)보다 1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내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7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투자가 집중되는 분야는 비메모리 분야일 것으로 예상된다. SEMI는 2022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을 중심으로 비메모리 분야에서만 350억 달러 규모의 장비 투자가 일어날 것으로 봤다. 파운드리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장비 투자 및 공장 확대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이다.
실제로 대만 TSMC는 2020년에만 1대당 1,500억 원이 넘는 ASML의 극자외선 노광(EUV) 장비를 15대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고, 올해도 최소 16~17대의 장비를 추가 구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EUV 장비만 50대 이상 확보해 초미세공정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한다는 전략이다.
비메모리뿐만 아니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의 장비 투자도 활발히 진행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공시를 통해, 구체적인 장비 대수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향후 5년간 ASML의 EUV 장비 구매에 4조 7,549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도 삼성전자, TSMC와 함께 초미세공정 반도체 개발 및 양산에 속도를 내기 위해 이번 투자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 공장, 장비뿐만 아니라 테스트 장비 및 패키징 장비 분야에서도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특히 NPU 등 차세대 반도체 기술이 속속 상용화되면서 이를 테스트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패키징/본딩하는 기술이 개발되다 보니, 신규 장비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 여기에 반도체 핵심 소재인 포토마스크(Photomask), 포토레지스트(Photoresist) 등을 비롯한 소재 시장도 지속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한편, SEMI는 지역별로 봤을 때 향후 2년간은 대만이 반도체 투자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시장 주도권 장악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반도체 공장 확장 및 EUV 장비 확보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은 올해 199억 달러, 내년에는 212억 달러를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만 다음으로 투자 규모가 큰 국가로는 한국이 지목됐다. SEMI는 한국에서 올해 189억 달러, 내년 207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단행될 것으로 봤다.
美 바이든 ‘반도체 행정명령’ 서명, EU는 첨단 반도체 육성 프로젝트 추진…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심화
반도체는 더 이상 민간 기업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중국에 이어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패권 장악에 나서기 시작한 것. 그동안 미국, EU 등은 산업 영역에서는 가급적 정부 차원의 개입을 배제해온 자본주의 국가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에서는 과민반응처럼 보일 정도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월 11일(현지 시각) “EU가 독일, 프랑스 주도로 최대 500억 유로(약 67조 4,630억 원)에 달하는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추진한다”며 “이를 위해 삼성전자와 TSMC의 참여를 원한다”고 보도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EU가 지난 2019년 말 발표한 ‘EU 공동 관심 분야 주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EU가 미국, 중국, 한국 등에 밀려 세계 산업 기술계에서 뒤처지고 있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젝트로, 미래 핵심 기술 확보가 주요 목표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 7개국 정부와 자동차 업체 BMW, 화학업체 BASF 등이 함께한 자동차용 배터리 개발 프로젝트였다. 이에 이은 두 번째 프로젝트 추진 분야가 반도체로 결정된 것.
자동차용 배터리 분야는 비교적 유럽이 강점을 보유한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분야였지만, 반도체는 유럽이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인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U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유럽을 반도체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를 위해 EU는 향후 수년 이내에 10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공정 공장을 EU 권역 내에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에 더해 EU는 앞으로 2나노 수준의 공정 기술까지 주도하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유럽에도 NXP, 인피니언 등 팹리스 업체들이 있지만, 대부분 자동차 반도체가 주력 분야이고 자체 공장이 없어 대부분 아시아 지역의 파운드리에 위탁생산을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세계적으로 둘러봐도 현재 EU가 언급한 10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공정 공장을 구축할 수 있는 파운드리 기업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뿐이다.
EU뿐만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분야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자국 육성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24일(현지 시각) 핵심 산업 분야의 공급망 취약성을 찾아 보완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희토류, 배터리와 함께 반도체가 포함돼 있다.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반도체를 직접 꺼내 들면서 “이 컴퓨터 칩의 공급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이 지연돼 미국 근로자의 일거리가 줄었다”며 “반도체는 21세기의 말 편자 못”이라고 말했다. 못 하나가 없어서 편자가 망가지고, 말이 다쳤다는 미국 속담에 빗댄 표현이다.
또한 그는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 설계, 연구, 개발에 인센티브를 주는 법안(CHIPS for America Act)을 시행하기 위한 예산 370억 달러 확보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의 국립 인공지능 보안위원회 역시 바이든 행정부에 한국과 대만을 앞서는 반도체 생산 시설을 미국 내에 지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국 역시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지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같은 행보는 최근 삼성전자의 오스틴 공장 증설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 정부는 삼성전자의 오스틴 공장 증설에 대규모 세제 혜택 등을 제공하면서 적극적인 공장 유치에 나서고 있다. 앞으로 이런 유치 경쟁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나타나면서 반도체 춘추전국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