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기업들의 화두로 자리매김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 ‘디지털 기술로 변신하자’는 이 경영 혁신 운동은 기업 스스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정보통신기술) 회사라고 여기도록 채근해 왔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먼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라고 여겨지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발발하면서 갑자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급히 실천돼야 할 현실이 됐고, 우리 모두 당사자가 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위기 상황에서도 성장을 이끌어낸 이들은 그 비결로 빠짐없이 ‘디지털로의 빠른 전환’을 꼽고 있다. 비대면에서 무인화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소비자의 니즈에 비즈니스 모델이 적응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
2020년 현재 리딩 기업들이 꾀하고 있는 변신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 판매/제품혁신 등 특정 경영 활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성과를 창출해 낸 모범 사례)에서 얻은 교훈으로, 성공적인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위한 네 가지 실천방안을 제안해 본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우선 온·오프라인 융합부터 시작하라
많은 기업은 시급한 당면 과제로 온라인화를 손꼽는다. 종래의 업태에 온라인 서비스를 융합함으로써 ICT의 부가가치를 기존 오프라인 사업에 더하는 것은 긴급한 안건이 되고 있다. 실행력이 빠른 온라인 기업들에 의한 시장 교란이 더 심해졌기 때문.
특히 요즘 같은 격동의 시기에는 전통적 업태를 뒤흔들 수 있는 신규 참여자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등장한다. 그들은 신선한 가설을 설정하고 곧바로 실천하며, 업의 기본 전제를 뒤흔든다. 고객을 포함한 파트너와의 관계를 임의로 재구성하는 일도 가능해지는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여파는 크다.
그렇지만 신규 참여자의 승률이 그렇게 높은 것만은 아니다. 이미 시장을 리드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기존에 가진 기득권을 전략적으로 살릴 수 있다. 선도 기업은 풍부한 리소스로 저인망식(底引網式, 샅샅이 구석까지 살피고 조사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으로 그물을 바닥까지 넣어 물고기를 싹쓸이하는 방식의 ‘저인망식 어업’에서 유래) 실험이 가능하고, 업에 대한 통찰력(Insight)도 갖고 있다. 작게 시작하고 빨리 배우는 스타트업처럼 대기업의 몸놀림이 가벼울 수는 없지만, 업력을 통해 확보한 기존 고객과 검증된 인재를 활용할 수 있다는 건 대기업만이 가진 강점이다. 우리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디지털이 그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면 대기업 역시 전체를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완벽할 필요도 없다. 직영점 위주 일본 외식 프랜차이즈인 와규마피아(Wagyumafia)는 코로나 사태로 외식 수요가 급감하자, 휴업 시 임대료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으로 계약한 점포 위주로 점포의 반 이상을 전격 휴업했다. 직원을 나머지 점포로 분산 배치하거나 시프트를 조정해 고정비를 절감한 후, 온라인을 통한 반제품 판매와 배달에 집중했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로 인한 타격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완벽한 디지털화를 꿈꾸지 않아도 가능한 선부터 디지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환경 변화에는 즉시 적응해야 한다. 그 찰나의 변혁을 순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의 특기다.
‘기회는 열려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라
지난 10년간 오프라인 매장을 쇼룸처럼 활용만 하고 구매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하는 소비자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렇게 온라인 상거래의 거인들은 점점 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매장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다.
미국 오프라인 유통 프랜차이즈인 베스트바이(Bestbuy)는 자사 상점 내에 제조사의 팝업 스토어 등을 만들고 임대료를 보조받았다. 또 온라인이 꼭 싼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미끼 상품을 전략 배치하는 등 가격 역전 현상을 소비자들이 느끼도록 했다. 온라인이 더 편하다고 여기지 않는 소비자층은 여전히 많다. 설치나 A/S 등 살가운 대면의 서비스를 원하는 전자제품을 살 때, 또는 지금 당장 구매해야 할 때와 같이 오프라인이 선호되는 여러 고객의 사정이 있기 때문.
온라인 태생의 기업만이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의 ‘가치 사슬의 연쇄’, 즉 ‘고객 여정(Customer Journey)’ 속에는 플랫폼을 창출할 크고 작은 기회가 잠재돼 있다. 애플 스토어의 ‘지니어스(Genius, 숙련된 전문가로서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품을 수리해주는 A/S 및 고객 대응 전문 직원)’처럼 고객 서비스직을 전문화하고 직원에 대한 보상 구조를 손본다면 오프라인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가치 제안도 시험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유통 체인의 경우 지방을 집중 공략해, 노인층을 위한 전문 방문 서비스 플랫폼을 진행 중이다. 업의 본질을 아는 이들이라면 이미 벌어지고 있는 비즈니스 속에서 플랫폼을 창출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아직 디지털에 포섭되지 않은 고객들의 디지털 전환을 돕는 일부터 시작해 스스로 디지털 전환을 시도한 셈이다.
모든 것이 단번에 온라인으로 빨려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시간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여유롭지는 않다.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다. 지금처럼 오프라인이 도외시되고 비대면 서비스가 오히려 선호될수록, 온라인 기반의 플랫폼 거인들은 세력을 늘려갈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열려 있는 플랫폼과 생태계에서는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성공한다면, 그리고 소비자가 그걸 원한다면 수십 년간 쌓아온 기업의 업태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될 수 있다. 우리는 ICT의 역사에 걸쳐 이 과정을 반복적으로 목격해 왔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점진적으로 그리고 연속적으로 실천하라
PC가 등장할 때도, 웹이 등장할 때도, 스마트폰이 등장할 때도, 경영 전략의 디지털화 요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매번 ‘고도화’니 ‘차세대’니 하는 단어들을 가져다 붙이며 ‘무조건 변해야 산다’고 외쳤다. 하지만 근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사례들은 이와는 다르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바뀌지 않더라’는 교훈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차세대 시스템’의 시대는 가고 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몇 년간 준비한 후 팡파르와 함께 한 번에 바꾸는 방식은 시장과 고객이 바뀌는 방향과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최고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유연한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들어 가며 기업 체질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신기능을 실무에 적용하거나 고객에 배포하는 속도의 차이가 빅테크 기업과 보통 기업 사이에서 200배까지 난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과장이 아닌 것이 CI/CD(Continuous Integration/Continuous Delivery, 코드를 자주 점진적이고 연속적으로 통합하고, 인프라에 지속적으로 배포하는 자동화 실천법)와 같은 활동은 하루 수백 번 새로운 기능이 배포된다.
점진적이고 연속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배포하는 것은 제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수시로 높이는 일이다. 아이디어의 발상에서 구현, 배포까지의 속도가 바로 경쟁력인 시장에서는 서비스나 상품의 변경 필요성을 느낀 후 이를 실제 반영할 때까지의 기간이 짧을수록 UX(User Experience, 고객 경험)를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체질이 개선되면, 장애가 발생했을 경우 평균 회복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앞으로 기업의 경쟁우위 확보는 ‘높은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제품과 기능을 계속 출시해 시장에서 소비자와의 관련성을 잃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격변의 시대에 소비자에게서 잊히지 않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할 때 기업문화에 대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데브옵스(DevOps, 개발과 운영을 소프트웨어로 통합해 자동화·고도화하는 실천법) 등 백엔드(Back end, 노출된 플랫폼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용자에게 노출되지 않는 노드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같은 개발 영역) ICT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도 기업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래전에 성공한 기업일수록 변혁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다. 관료주의적인 조직문화, 조직간의 벽,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지부동하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러한 관성은 기존 고객과 수익모델을 지키려는 애사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리더가 모범을 보이고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공유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수요를 예측해 생산과 물류를 미세 조정하고 최적화하자’는 구호는 말은 쉽다. 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데이터와 사람에 투자하는 것, 그리고 이를 평가하고 개선하는 방법을 점진적으로, 연속적으로, 그리고 기민하게 실천하는 것뿐이다.
‘가심비의 시대다’ 소비자에게 다가갈 기업의 가치를 고민하라
이처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주체 역시 결국은 여전히 사람이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마음이 충만할 때 구성원의 생산성은 올라간다. 마찬가지 심리는 기업 외부와도 상호 작용한다. 소비자는 응원하고 싶은, 닮고 싶은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 구매한다. 이러한 감정적, 정서적 가치는 기업 내부자의 비전만으로는 완성되기 힘들다. 함께 풀어야 할 사회적 가치가 엿보일 때 소비자는 그 기업에 매료된다.
▲ SK하이닉스는 사회적 가치(SV, Social Value)와 경제적 가치(EV, Economic Value)를 동시에 추구하는 DBL(Double Bottom Line) 경영철학을 통하여 이해관계자의 행복을 키우고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왼쪽부터)2020년 행복나눔기금 전달식 & 행복나눔 실천상 시상식, 2019년 친환경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한 ECO Alliance 출범식, 2019년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중간관리자 MBA 과정
이제 기업 내 인재만이 아니라 소비자까지 아우르는 시장 참여자 전체의 마음을 더불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만으로도 어필할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다. 유튜버나 인플루언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도 전자 상거래에서 크라우드 펀딩 자금 조달까지 스스로 해낼 수 있다. 개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는 의미다. 이제 소비자는 상품과 서비스의 최종 목적지일 뿐만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에 부가가치를 더하는 채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디지털 미디어의 편의성 덕에 소비자는 기업이 선보일 수 있는 가치에 중간자를 배제한 채 직접 연결될 수 있게 됐다. 그래서인지 D2C(Direct to Consumer, 제조업자가 최종소비자와 바로 거래하는 일)는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이제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유니크(Unique)한 가치가 있다면 소비자에게 바로 전달할 수 있다. ‘해리스(Harry’s)-면도기’, ‘캐스퍼(Casper)-매트리스’, ‘와비파커(Warby Parker)-안경’ 처럼 많은 기업이 다양한 니치 상품(Niche Product, 일반 상품군을 사용하는 소비자를 연령, 성별, 직업별 따위로 세밀하게 구분해 특화된 소비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개발하여 만들어 낸 상품)으로 팬을 확보해 직접 유통하고 있고, 연예인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상품화해 팬들과 직접 소통하기도 한다. 여기에 중간 유통 채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이처럼 뭐든 직접 해내려는 디지털의 습성은 기업에게 ‘브랜드 퍼포스(Brand Purpose,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지 그 브랜드의 목적을 공유하는 마케팅 활동)’를 모두 함께 고민하라고 압박한다. 현재 시장에 부족한 어떤 새로운 가치관의 제안이나 사회에 만연한 편견이나 속박에 대한 대안 등 우리 기업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결사의 마음을 담아 가치의 직거래를 통해 소비자와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소비자를 팬으로 만들 때 기업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포함한 현대의 경영 전략이 원하는 궁극적인 비약(飛躍)이기도 하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