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에서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이 있을까요? 앞에서 소개된 잭 킬비의 집적회로는 사실 로버트 노이스라는 파트너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집적회로의 공동 최초개발자로 알려진 로버트 노이스는 ‘최초 개발자’ 자리를 두고 잭 킬비와 함께 끊임없이 회자되었는데요. 세기의 라이벌이자 인생 최고의 파트너였던 두 사람은 실과 바늘처럼 늘 함께했습니다. 반도체 칩, 집적회로 개발의 또 다른 개발자 로버트 노이스의 발명이야기, SK하이닉스와 함께 지금부터 들어보실래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엔지니어들의 고민은 언제나 끝이 없습니다. 물론 잭 킬비와 로버트 노이스도 마찬가지였죠. 두 사람은 눈 앞의 한 고비만 넘으면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전기회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현실의 장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발견은 우연처럼 찾아오죠. 잭 킬비와 함께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로 잘 알려진 ‘에니악’으로부터 집적회로에 대한 첫 아이디어를 얻는 행운을 거머쥐게 됩니다.
▲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 (ENIAC)
에니악은 무게만 3만 톤에 달하는 최초의 컴퓨터로, 1만 8000개의 전깃줄로 얽히고 설킨 진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엄청난 전기가 소모되는 것은 물론 열을 견디지 못해 쉽게 타버리는 진공관을 끊임없이 갈아줘야만 했기에 많은 엔지니어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윌리엄 쇼클리의 트랜지스터였는데요. 이 역시 완벽히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죠. 결국 쇼클리는 팰러앨토 남쪽 지역에 인재들을 모아 전자회사를 설립하고 애니악의 문제점을 해결할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로버트 노이스도 속해있었죠.
▲ 함께 일하던 실리콘밸리 8명의 엔지니어 (중앙부터 시계방향으로) 로버트 노이스, 진 호니, 줄리어스 블랭크, 빅터 크린치, 유진 클라이너, 고든 무어, 셀던 로버츠, 제이 라스트 / 출처 : WIRED (http://www.wired.com)
회로는 어느 한 곳이라도 연결에 문제가 생기면 작동을 하지 않고, 부품들이 너무 크거나 전선이 길면 전기 신호의 전달 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엔지니어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체형 구조’를 떠올렸고 관련 연구를 계속해 왔는데요.
실리콘벨리 탄생 전인 1947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월터 하우저 브랜든, 존 바딘은 반도체 게르마늄을 이용해 진공관보다 훨씬 작고 발열하지 않는 트랜지스터를 발명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전기회로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품을 손으로 하나 하나 연결하고 납땜해야 하는 수고로움은 해결하지 못했는데요. 로버트 로이스는 이에 착안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쇼클리의 방식은 너무나 강압적이었고 연구원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결국 연구원들은 1957년 말, 쇼클리에게서 독립해 ‘실리콘밸리’라는 타운을 형성하여 그 역사를 새로이 써나가게 되죠.
▲ 페어차일드사 창립 당시 로버트 노이스의 젊은 시절 모습
쇼클리와 결별한 바로 다음해인 1958년, 노이스는 동료와 함께 세운 페어차일드사의 반도체 연구실에서 트랜지스터 오염문제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날 동료 중 한 사람이 세 겹의 반도체 위에 실리콘 산화물을 입히는 아이디어를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실리콘 산화물로 구성된 막을 입혀 외부의 오염을 차단하는 원리였는데요. 예민한 회로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노이스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아이디어를 찾아내는데요. ‘산화물 코팅에 홈을 내서 전선을 이으면 트랜지스터 사용에서 발견되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죠.
노이스는 이를 곧 바로 설계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고든 무어의 방으로 간 그는 무작정 칠판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한 실리콘 블록 위에 인쇄한 구리 전선으로 두 개의의 트랜지스터를 연결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무어를 찾아간 로이스는 실리콘 블록에 수로처럼 낸 홈을 저항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죠. 이 과정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1년 뒤인 1959년 1월, 노이스는 노트 4페이지를 가득 채운 집적회로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 로버트 노이스가 만들어낸 집적회로 / 출처 : EE Times (http://www.eetimes.com)
그가 집적회로도를 완성한 시기는 잭 킬비보다 6개월 가량 늦게 이뤄졌지만, 기술적으로는 한참 앞서 있었는데요. 킬비의 집적회로는 일체형으로 만든다는 아이디어에는 도달했지만, 사실 연결 방법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의 아이디어는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해 노이스는 연결 방법을 정립한 일체형 아이디어를 고안해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더 앞서 집적회로 기술을 개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평소 로버트 노이스는 이론물리학자, 발명가, 경영인, 벤처자본가 등 다양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테크놀로지스트’라는 수식어를 가장 좋아했고 또 계속 그렇게 불리고 싶어했습니다. 본래는 화학자, 물리학자, 엔지니어와 같은 기술∙과학 분야 종사자들을 통틀어 ‘테크놀로지스트’라고 불렀지만, 노이스가 정의한 ‘테크놀로지스트’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죠. 그는 테크놀로지스트를 ‘리스크에 친숙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로버트 노이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자 그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셈입니다.
평소 사교적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겼던 노이스는 그가 정의한 테크놀로지스트의 의미처럼 항상 ‘위험요소’를 기다렸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숨기지 않고 바로 주위 동료들이나 사람들에게 공개하여 그들의 반문이나 공격을 기다리곤 했는데요. 그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이론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고 리스크를 해결할 방법을 도출하기도 했습니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여러 사람과 함께 활발한 토론과 논의를 거쳐 좀 더 진화된 아이디어를 정립해나갔던 그만의 열린 사고 덕분에 집적회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겠죠!
비슷한 시기에 집적회로를 개발한 노이스와 킬비는 누가 먼저 집적회로를 개발했는지를 가리기 위해 무려 10년 동안 주장을 펼쳤는데요. 이는 개인의 감정 싸움이 아닌 각자가 속한 회사 간의 싸움이었기에,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특허를 공유하는 훈훈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는데요. 세기의 라이벌이었지만 명예보다는 발명 그 자체를 즐겼던 두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덕분에 많은 엔지니어들의 고민은 해결되었고 사람들의 생활은 더욱 편리해졌죠! SK하이닉스 역시 노이스의 발명활동처럼 진심을 담아 여러분께 더 좋은 기술을 선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