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출시된 ‘커맨드 앤 컨커(Command & Conquer)’ 의 리마스터판이 등장하며 게임시장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커맨드 앤 컨커는 실시간 전략게임(RTS, Real-Time Strategy) 장르를 만든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는 명작이지만, 너무 오래 전 게임이라 리마스터 성공에는 의문부호가 달렸던 것이 사실. 하지만 실제로 출시된 이후에는 평단의 평가도 좋고 판매 추이도 그럴듯한 모양새다.
리마스터는 원래 ‘레코딩 마스터(Recording Master)’, 즉 공장으로 보내 음반을 대량으로 찍어낼 마스터 주형을 다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일을 다시 하는 이유는 하나, 음질이든 취향이든 오리지널에 새로운 상품성을 부여해 새로운 기분으로 팔기 위해서다.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리마스터의 의미도 달라져, 오리지널 음원으로부터 최고 음질로 뽑아내 재구성하는 일을 의미하게 됐다. 음반에서 나온 말이지만 영화 분야에서도 널리 정착된 관행이 됐고, 요즈음에는 게임 분야에서도 애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마스터는 원화나 원본 필름처럼 아날로그로 만들어진 원천 소스가 남아 있을 때나 쉬운 일이다. 진보된 기술로 창고의 아날로그를 디지털화하면 고해상도 신작 디지털판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임이란 원래부터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다. 디지털은 0과 1의 배열로 수렴하게 하는 일인 만큼 기본적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정보의 취사선택과 누락을 피해갈 수 없다.
디지털은 세월의 열화는 비켜갈 수 있지만, 그 시점의 기술적 한계에는 그대로 노출된다. 그 한계는 곧 용량과 속도. 모두 반도체가 극복하려고 애써 온 분야들. 게임에게 반도체는 곧 매체였다. 다른 엔터테인먼트처럼 플라스틱판으로 유통돼도 게임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결국 반도체 위에 올라가야 했다.
‘반도체’의 진보로 가능해진 대작 게임… 그만큼 치솟은 제작비는 부담
아무리 예전이 좋았다고 이야기해도 절대 그 시절이 좋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반도체가 만드는 디지털 기술이다.
대표적인 게임 콘솔인 소니(Sony)의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 이하 PS)을 예로 들어 보자. 초기 버전은 메모리 2MB에 그래픽 메모리 1MB에 불과했다. PS2에서는 각각 32MB, 4MB로 16배나 늘어났고, PS3이 되자 256MB, 256MB로 8배 증가했다. 무어의 법칙(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법칙)에 따라 용량과 성능이 파죽지세로 향상됐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PS4의 경우 8GB(통합)가 됐으니 반도체의 진보는 실로 놀랍다.
게임은 메모리라는 매체 위에 대량의 ‘어셋(Asset, 3D 모델이나 풍경화, 사운드 효과나 음악 등 게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실시간으로 풀어 놓고 처리하는 식으로 실현된다. 게임이란 내 시선과 손끝에 따라 전혀 다른 전개를 보여줘야 하고, 0.1초 뒤에 벌어질 그 모든 가능성의 조합이 모두 메모리 위에 있어야 한다. 보통 게임 PC의 사양이 사무용보다 좋은 이유다.
메모리 공간이 점점 확장되며 표현력의 제약이 사라져갔다. 화면 크기도 커졌다. 초대 플레이스테이션의 해상도는 320x240였지만 요즈음은 4K(3840x2160) 게임의 시대. 4K로 단순히 영상을 재생하는 것만 해도 벅찬 일인데, 게임은 플레이어의 행동이 만들어낼 가능성을 미리 모두 준비하고 있어야 하니 더 힘들다.
근래의 실사 같은 AAA(Triple-A, 대작을 의미하는 업계 용어로 영화의 블록버스터에 해당) 게임이 만들어내는 몰입감은 메모리가 2MB이던 시절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메모리만큼 제작비도 치솟았다. 기대치가 높아진 만큼 대충 구현할 수 없고, 모든 순간을 영화 같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양에 힘이 너무 들어간 채 정작 게임성은 고전만 못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엎어진 프로젝트도 있었다. 요즘 게임 개발 프로젝트들은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싹수가 노랗다면 매몰 비용에 연연하지 않고 손절하는 편이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2013년 판도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팀이 해산되며 묻히고 말았다.
‘리마스터링’, 부담스러운 제작비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재조명 받다
AAA 대작 예산의 하한선이 이제 올라도 너무 올라 버렸다. 과거의 성공 체험을 되살려 리스크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익숙한 것에 의존하게 되는 마음이란 생산자도 소비자도 모두 버리기가 쉽지 않다.
게임 업계에서는 리메이크나 리부트가 종종 유행되곤 했는데, 리메이크나 리부트는 보통 그 느낌 그대로 아예 새롭게 만드는 게임을 뜻한다. 파이널 판타지 7도 최근 리메이크돼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이 역시 제작비가 만만치 않다. 조금 더 저렴하게 과거를 소환할 수는 없을까?
그냥 옛날 걸 다시 내다 팔면 어떨까? 역시 옛날이 좋았다며 모두 향수에 바로 빠져주면 좋겠지만, 주말의 명화 틀 듯 25년 전 게임을 4K 스크린에서 돈 받고 틀 수는 없는 일이다. 감동에 앞서 위화감이 먼저 든다.
1996년의 퀘이크. 최초의 3D 1인칭 슈팅 게임(FPS, Frist-Person Shooter)으로 칭송 받은 이 게임은 약 200폴리곤(Polygon, 주로 3D 컴퓨터 그래픽에서 면의 조합으로 물체를 표현할 때의 각 요소)을 화면에 뿌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자 캐릭터 하나가 수천 폴리곤으로 구성되기에 이른다. 다시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게임에 사용되는 폴리곤 수는 십만을 거뜬히 넘기곤 한다. 그리고 이제는 폴리곤을 세는 일의 의미가 퇴색돼 간다. 일러스트에서 픽셀을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해진 것처럼, 기술이 보편화된 시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화와 표현력, 그리고 재미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 게임의 원점으로 돌아가 그 게임의 작화력과 표현력, 그리고 게임성을 그대로 살려 보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리마스터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사골을 우리는 일, 게임의 로직이나 스토리, 즉 코드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 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어셋만 손보는 일을 말한다.
가장 직접적인 리마스터링은 시청각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사운드와 달리 그림은 억지로 해상도만 키우면 번지고 만다. 깔끔하게 도트가 떨어지게 해 레트로 감성을 살릴 수도 있지만, 이는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게임의 풍경이나 배경화면 등의 비트맵 텍스처(Texture, 질감 또는 색상이나 명암과는 독립적으로 객체의 표면에 대해 육안으로 보이는 모습을 특성 짓는 속성들의 집합)는 해상도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 낡은 느낌의 주범이 된다.
게임 풍경의 벽지나 인물의 스킨만이라도 새로 그려서 섬세한 고해상도로 바꿔줘도 게임 인테리어는 달라져 보인다. 3D 그래픽의 경우 폴리곤 밀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리마스터링이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12면체를 구체로 만드는 정도나 쉽지, 결국은 모델링이 다시 필요해지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어설픈 3D 얼굴은 애초에 섬세하게 그려 놓은 좌표 없이는 아무리 ‘풀옵션’을 적용해도 갑자기 미남미녀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 폴리곤 수는 적은데 텍스처만 고해상도라면 어딘가 약간 언밸런스해 보일 수 있다. 목각 인형 같은 정육면체에 정밀 텍스처를 가면처럼 입혀 놓는 셈이다. 하지만 텍스처만 개선해도 확실한 효과가 나오니 텍스처 단순 교체는 손쉽게 애용되는 리마스터링 기법이다.
리마스터링의 3가지 최신 트렌드 ‘참여형 개선, AI 업스케일, 실시간 리마스터링’
텍스처를 개선하는 건 의외로 손쉽기에 팬들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인기 고전 게임을 중심으로 팬들이 만드는 '업스케일 모드(MOD, 이미 출시된 게임의 내부 데이터를 사용자가 수정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게임)’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커맨드 앤 컨커도 이번 리마스터판에서 사용자 커뮤니티와의 협업을 중요 성과로 꼽았으며 관련 모듈을 오픈소스(Open source)로 공개하기로 했다. 이처럼 게임회사와 팬 모두가 함께 하는 ‘참여형 개선’은 리마스터링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최근 리마스터링의 또 다른 트렌드는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를 활용한 ‘AI 업스케일’이다. 토파즈 랩스(Topaz Labs)에서 개발한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인 ‘Gigapixel AI’ 같은 도구들도 상용화 됐는데, 원리는 기계학습이다. 뭉개진 이미지들이 ‘본 모습은 대부분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패턴으로 학습시켜 두면, 새로운 저해상도 이미지를 접하더라도 고해상으로 그려낼 수 있다. 이젠 어셋을 사람이 하나하나 새로 그릴 필요 없이, 학습한 기계의 기억에 통째로 외주를 준다. 많은 팬들의 업스케일 모드도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실시간 리마스터링’도 최근 떠오른 기법이다. 저해상도 이미지로부터 고해상도 이미지를 뽑아내는 일이 디자이너가 아닌 칩에 의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 기존의 어셋을 한 땀 한 땀 다시 깁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일괄 변환하되, 이것조차 실시간으로 수행한다. 일반적으로 4K TV는 패널의 질뿐만 아니라 칩에 따라 화질이 꽤 달라진다. 4K는 의외로 영상 소스가 부족한데, 최신 TV는 각종 인공지능 칩으로 저해상도 영상을 실시간 업스케일해 4K에 뿌려주기 때문. 이와 같은 일이 이제 게임에서도 벌어진다.
▲ 사진제공 : 엔비디아
최신 비디오 카드 기능 중 DLSS(Deep Learning Super Sampling, 딥 러닝을 사용하여 원본 저해상도 이미지의 고해상도 이미지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술)가 대표적인 사례.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엑스박스(X-box, 가정용 PC에 준하는 성능과 그래픽 표현력을 가진 가정용 비디오 게임) 시리즈의 차세대 콘솔 X에서 구형 게임을 작동할 때, 자동으로 HDR(High Dynamic Range, 가장 밝은 곳부터 가장 어두운 곳까지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게 밝기 범위를 확장하는 기술)과 120fps(Frame Per Second, 초당 프레임 수)를 지원하는 기능을 탑재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실시간 리마스터링 중 가장 흥미로운 기술은 실시간 3차원화다. 2D 고전 게임을 분석해서 3D로 만들어주는 기술로, 닌텐도 패미컴용 고전 게임을 롬(ROM, Read Only Memory 컴퓨터의 읽기 전용 기억장치)에서 그대로 읽어 들이면 어셋을 적절히 3차원화해 즐길 수 있게 하고, 이를 다시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용으로 업스케일하기도 한다.
이런 일을 제작사나 유통사가 아닌 재야의 독지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다. 바야흐로 참여형, AI 업스케일링, 실시간 리마스터링의 시대가 오고 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