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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반도체업계가 ‘슈퍼사이클(초호황)’로 호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습니다. 이른 바 ‘D램 치킨게임’이었죠. 치킨 게임은 서로 양보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말하는데요. 1970년부터 시작된 D램의 역사에서 변곡점을 찍었어다고 볼수 있는 두 차례의 치킨게임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습니다. 이러한 D램 치킨게임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제1차 반도체 치킨게임, 폭락한 D램값 팔면 팔수록 손해!

4.png▲출처: 이데일리 DB

 

2007년 대만 D램 업체들이 앞다퉈 생산량을 늘리며 제1차 치킨게임이 발발합니다. 대만 업체를 필두로 반도체 업체들은 극단적인 가격인하 경쟁에 나서고,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당시 주력제품이었던 512메가비트 DDR2 D램의 가격이 2009년에 0.5달러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불과 3년 전에 최고가인 6.8달러를 찍었던 제품이 ‘10분의 1’ 가격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폭락한 겁니다. 비슷한 시기 1기가비트 DDR2 D램의 가격도 0.8달러 수준으로 주저앉으면서 D랩업체들은 2년 가까이 눈물 나는 출혈 경쟁을 펼칩니다.

이 치킨게임은 결국 2009년 독일의 D램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키몬다(Qimonda)’ 파산으로 마무리됩니다. 키몬다는 2006년 인피니온(Infineon)의 자회사로 출범할 당시만 해도 세계 2위의 D램 생산업체였지만, 파산 직전에는 5% 수준으로 점유율이 곤두박질쳤습니다. 특히 2008년부터는 당기순손실이 매출액을 초과할 정도였는데요. 2007년 3분기부터 2008년 4분기까지 누적 적자가 25억유로(한화 약 3조 3,400억원)에 달하자, 결국 백기를 듭니다.

사실 키몬다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치킨게임이 정점으로 치닫던 2008년 3분기 실적을 보면 짐작이 가능한데요. ‘빅3’ D램 업체 가운데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만이 2,400억 원의 흑자를 냈을 뿐,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각각 4,600억원, 3억 3,800만 달러(한화 약 5,000억원)의 적자를 봤습니다.

그나마 ‘규모의 경제’가 되는 기업들이니까 버틸 수 있었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대만 업체들의 상황은 눈물 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파워칩(Powerchip Semiconductor)은 5,900억원 매출에 5,900억원 손실을, 난야(Nanya Technology Corporation)는 4,500억원 매출에 3,500억원의 손실을 봤습니다. 쉽게 말해 팔면 팔수록 적자가 커졌던 것입니다.

제2차 반도체 치킨게임, D램 시장 ‘BIG3’로 재편

종전(終戰) 후, 반도체 시장이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살아남은 메모리 업체들은 조금씩 흑자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D램값이 오르면서 당시 ‘호황’이라는 단어도 심심찮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평화 시대’가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역사는 정말 반복되는 걸까요? 2010년 들어 대만과 일본 기업들이 다시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와 증산을 선언하면서 ‘2차 치킨게임’이 발발합니다. 또 한번의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조금 오르나 싶던 D램값이 다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출혈경쟁이 극단으로 치닫더니, 당시 주력 제품이었던 1기가비트 DDR3 D램 가격이 2010년 10월엔 1달러 밑으로 떨어집니다.

속절없는 D램값 하락으로, 이번에는 일본의 D램 업체인 엘피다(Elpida)에서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당시 D램 시장 점유율 3위(16.2%)였던 엘피다가 2011년 4분기 적자로 돌아선 겁니다. 일본 유일의 D램 업체였던 엘피다는 1차 치킨게임을 거치면서 2007년과 2008년 모두 2,000억엔(한화 약 2조 9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낸 기업입니다.

6.png▲출처: 이데일리 DB

 

2009년 키몬다가 파산할 당시 엘피다의 동반 파산을 점치는 전문가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2009년 300억엔의 공적 자금을 지원하고, 4개 은행으로 이뤄진 채권단도 1,000억엔을 융자하면서 가까스로 살려냅니다. 그야 말로 ‘기사회생’한 거죠.

그러나 약해진 엘피다가 2차 치킨게임을 견디기는 버거웠었나 봅니다. D램 가격 급락과 엔고(円高)로 힘겨워하던 엘피다는 5분기 연속 적자에 쓰러지고 맙니다. 엘피다가 파산 직전에 기록한 분기 영업이익률은 무려 ‘-73%’였습니다. 엘피다의 경영권은 끝내 미국의 마이크론(Micron)으로 넘어갑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SK하이닉스는 강도 높은 자구노력을 통해 두 차례의 치킨게임을 이겨냈습니다.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지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에 임직원이 똘똘 뭉쳤기에 ‘격랑(激浪)’을 헤쳐나올 수 있었습니다.

치킨게임 이후 시작된 ‘슈퍼사이클’, 2018년이 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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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데일리 DB

 

1995년 20여곳에 달했던 D램 업체는 두 차례의 치킨 게임을 끝낸 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빅3’ 체제로 재편됩니다. 치킨게임이 힘들었던 걸까요? 2014년말 D램업계는 다시 한번 불황에 직면하지만, 출혈경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차례 홍역을 치르면서 ‘더 이상의 치킨게임은 안 된다’는 인식이 생겼을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빅3 기업은 최근 들어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D램은 물론, 낸드플래시 수요도 급증하면서 사상 유래 없는 초호황을 누리고 있죠. SK하이닉스를 봐도 실적은 매 분기 사상 최고치를 찍고, 주가는 신고가를 경신했습니다.

하지만 슈퍼사이클도 하나의 ‘사이클’일 뿐입니다. 끝없이 ‘우상향’만 지속될 수는 없죠. 산이 높을 수록 골이 깊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부 증권사에서는 내년쯤에는 반도체 가격이 고점을 찍은 뒤, 하락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옵니다. 푸젠(Fujian Jin Hua Semiconductor), 칭화(Tsinghua Unigroup), 허페이(Hefei Chang Xin), YMTC(양쯔강메모리테크놀로지, Yangtze Memory Technology) 등 중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이 2018년 2분기쯤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를 양산하려 하는 것도 우려되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향후 중국 기업들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내년이 또 한번의 치킨게임 도래도 예상해볼 수 있는 시점입니다. 물론 국내 빅2 기업의 기술력이 다른 기업을 압도하지만, 승자 역시 출혈경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내상’이 적지 않기에 상처뿐인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슈퍼사이클’ 이후 맞닥뜨릴 미래 준비에도 소홀해서는 안될 때입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이데일리

윤종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