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이 된다. 바쁜 일상이 고될 때 추억을 꺼내 다시 힘을 얻기도 한다. 때론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띵작은 회로를 타고’ 시리즈를 통해 ‘추억의 명곡’과 함께 SK하이닉스의 ‘그 시절 그 반도체’를 추억해보자.
2013년 봄, SK하이닉스에 전해진 벚꽃 감성
이 기사가 나오는 10월은 비록 봄은 아니지만, 추억 소환을 위해 ‘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본다. 봄은 새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다. 꽁꽁 얼어붙었던 나무에서 새순이 간지럽게 피어나고, 눈 깜짝할 새 꽃들이 만개한다. 봄에 피우는 수많은 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단연코 벚꽃. 벚꽃 나무가 가득한 거리를 걸으면 벚꽃 내음에 취하며 감성에 젖게 되기 십상이다. 어떤 이와 함께 걸으면 그 감성은 배가 되고, 혹은 같이 거닐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봄은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법 같은 계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은 특히 봄의 감성과 어울리는 해였다. 그해 봄에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갓 대학생이 된 주인공들의 러브 스토리를 통해 이뤄지지 않는 첫사랑의 아련함을 대중들에게 선사했다. ‘음악’은 이 영화에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주인공 승민(이제훈 분)과 서연(배수지 분)은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서연의 가방에서 낡은 CD플레이어를 꺼내 승민과 함께 노래를 듣는다. 그들의 귀에서는 ‘기억의 습작(전람회, 1994)’이 흘러나온다. 이 장면은 봄과 함께 풋풋했던 그 시절 사랑의 감성을 소환해냈다.
영화계의 봄 향기는 가요계에도 전해졌다. 멜로디를 들을 때마다 눈앞에 벚꽃 풍경이 절로 그려지는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이 그 시절 대표적인 명곡. 가사에는 벚꽃길을 함께 걷고 싶은 사람에 대한 설렘이 담겨 있고 어쿠스틱 기타가 만들어낸 봄 내음 물씬 나는 선율에 장범준의 달콤한 목소리까지 어우러져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봄 캐롤’로 사랑받고 있다.
꽃놀이 대신 벚꽃엔딩을 들으며 반도체 개발에 매진하다
그로부터 1년 뒤, 2013년 어느 봄날. ‘벚꽃엔딩’은 또 한 번 음악 차트 1위를 차지하며 명곡의 부활을 알렸다. 이후 매년 봄마다 어김없이 인기가요 차트에 오르는 ‘벚꽃연금(벚꽃 피는 무렵이면 노래가 인기를 얻으며 작곡자인 장범준의 저작권료 수입이 많아짐을 뜻하는 가요계 유행어)’의 전설이 시작된 해. 같은 해 SK하이닉스에도 오랫동안 회사의 먹거리가 되어줄 명품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D램 PI(Process Integration)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김선순 DRAM PI 담당이다.
김선순 담당은 2009년~2012년 중국 우시에서 근무하다가 2013년에 본사로 돌아와 새로운 D램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당시 코어 개발부터 양산 이관 후 수율 증대(Ramp up)까지 제조공정 전반에 관여하는 PI 파트의 구성원이었던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는 20나노급 8Gb DDR4 개발. D램 소자 그룹의 D램 소자 PD(Product Development)팀 소속으로 당시 함께 근무했던 소자 엔지니어들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 업무에 투입됐다.
“당시 IT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IT 산업에는 초고속, 고용량, 저전력 제품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죠. 이 중 특히 고용량(High Density), 초고속(High Speed)에 대한 니즈(Needs)가 컸습니다. 따라서 고용량인 8Gb 제품에 스피드를 끌어올리면서 전력소모를 줄이는 DDR4가 경쟁력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20나노급 8Gb DDR4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여러 산을 넘어야 했다. 먼저 20나노급을 만들기 위해 기존 2xnm(20나노미터 초반) 공정 기술보다 더 발전된 2ynm(20나노미터 중반) 공정 기술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경쟁사는 이미 2ynm을 최적화한 상황. 8GB 용량을 확보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설상가상으로 2013년 중국 우시Fab 화재 사고로 프로젝트가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단 하나, 맡은 일에 집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김선순 담당의 하루하루도 쉴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그는 평소 등산을 하거나 가족과 탄천로와 공원을 걸으며 풍광을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해 봄에는 마음 놓고 벚꽃 나들이를 할 여유가 없었다. 봄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잠깐 산책을 나가거나 사무실에서 ‘벚꽃엔딩’을 틀어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것이 유일한 봄놀이였다.
“벚꽃이 한창인 계절, 다양한 등산로를 거닐며 그때 그때마다 다른 벚꽃을 감상하는 저만의 루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워낙 바빴기 때문에 짧은 산책으로 꽃놀이를 대신 했었습니다. 지금도 봄이 되면 ‘벚꽃엔딩’ 멜로디가 곳곳에서 들리는데,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시절을 잘 견뎠다는 것에 스스로 위로를 건넵니다. 그 노래가 당시 저에게 위안이 됐듯, 그때 가족과 주변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D램 개발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 초고용량 128GB DDR4 모듈 개발, IT 산업에 새 지평을 열다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집념을 발휘한 끝에 탄생한 제품이 바로 20나노급 8Gb DDR4 기반 세계 최초 초고용량 128GB DDR4 모듈이다. 이 제품은 20나노급 8Gb DDR4의 파생 제품으로, 당시 현존하는 최고 용량인 64GB의 2배에 이르는 최대 용량을 구현했다.
▲ 128GB DDR4 모듈
최대 용량을 구현하기 위해 TSV(Through Silicon Via, 실리콘관통전극) 기술이 처음으로 양산에 적용됐다. 이는 DRAM 칩을 수직으로 쌓은 뒤 전체 층을 관통하는 기둥 형태의 이동 경로를 만들어 명령어와 데이터를 전달하는 기술이다. 신호 전달을 위하여 칩 외부로 배선을 연결하는 기존의 와이어본딩(Wire Bonding)을 대체하는 기술로, 칩간 또는 PCB(Printed Circuit Board) 기판과의 거리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고속∙저전력 통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2배 이상의 적층이 가능했다.
그 결과, 이전 세대인 DDR3와 비교했을 때 스펙(Spec.)이 2배 이상 향상됐다. 기존 최고 용량인 64GB의 두 배에 이르는 최대 용량을 구현했고, 전송속도 역시 1,333Mbps에서 2,133Mbps로 업그레이드 됐으며 동작 전압도 기존 1.35V에서 1.2V로 낮췄다.
공정 기술 개발과 TSV 기술을 접목시키는 등 기술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이 제품은 SK하이닉스가 이후 서버 시장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버에는 고용량·초고속·저전력 제품이 요구되는데, 이를 모두 만족시키는 효자 제품이었기 때문. SK하이닉스가 서버 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을 고객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전환점이 됐다.
128GB DDR4 모듈은 새 출발과 변화를 상징하는 봄처럼 SK하이닉스에 또 한 번의 봄을 선물했다. 이를 개발한 김선순 담당도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지금 DRAM 사업의 리더로 맹활약 중이다. 그에게 128GB DDR4 모듈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저에게 128GB DDR4모듈은 ‘변화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제품 개발 이후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직책이 변화되면서 업무의 형태가 바뀌고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하면 항상 적극적으로 나섰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화를 즐기며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대로 멈춰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회사 차원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후배들도 자발적으로 변화를 주도하고 즐기며 다가올 세상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128GB DDR4 모듈이 새 시대를 연 것처럼 우리 구성원들도 변화를 즐기고 주도하며 다가올 세상의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