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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심장을 만들어 낸, SK하이닉스의 역전 드라마 「슈퍼 모멘텀: SK하이닉스의 언더독 스토리」 서평

『슈퍼 모멘텀』은 SK하이닉스가 최태원 회장의 결단과 기술 혁신으로 13조 원에서 650조 원 기업으로 성장한 과정을 담았다. HBM 개발, ‘시프트 레프트’ 등 기술 집념과 AI 생태계 동맹이 핵심이다.
STORY
AI의 심장을 만들어 낸, SK하이닉스의 역전 드라마 「슈퍼 모멘텀: SK하이닉스의 언더독 스토리」 서평

13조 원에서 650조 원으로, 판을 바꾼 첫 번째 결단

2025년 10월,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이 400조 원을 돌파했다. 놀라운 일은 그 기세가 멈추지 않고 2026년 1월 초 500조 원, 1월 말에는 650조 원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2011년 SK그룹 인수 당시 13조 원에 불과했던 기업 가치가 14년 만에 50배 이상 폭증한 것이다. 플랫폼 9와 3/4에서 펴낸 『슈퍼 모멘텀: SK하이닉스의 언더독 스토리』는 이 극적인 반전의 서사를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과 톱 팀(Top Team) 중심의 경영 결단,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 엔지니어들의 피, 땀, 눈물이 어린 기술적 집념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한다. 반도체 공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은 단순한 기업 성공담을 넘어 ‘메모리 반도체의 재발견’이자 ‘기술 경영의 정수’를 담은 교과서라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의 핵심은 최태원 회장이 어떻게 ‘만년 2등’ 하이닉스 반도체를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으로, 나아가 AI 생태계의 대체 불가능한 ‘이네이블러(Enabler)’로 체질 개선을 했는가에 있다. 이야기는 2011년 11월, 그룹 안팎의 비관론을 뚫고 “내가 밀고 가겠다”며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를 결단한 최 회장의 승부수에서 시작된다. 최 회장은 모바일과 데이터 시대로의 반도체 지형 변화를 읽었고, 재무제표에 보이지 않는 하이닉스 반도체 구성원들의 ‘절박함’과 ‘결코 죽지 않는 DNA’를 간파했다.

최 회장의 첫 번째 통찰은 인수 구조 설계에 있었다. 그는 인수 자금 3조 4천억 원 중 3분의 2에 달하는 2조 3천억 원을 신주 인수로 설계해, 그 돈이 채권단이 아닌 하이닉스 내부로 직접 수혈되도록 했다. “돈이 회사로 들어가야 하이닉스가 산다”는 명확한 논리로 채권단을 설득한 이 결정은 훗날 하이닉스가 불황에도 투자를 멈추지 않을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다. 인수 직후 진행한 ‘100:1 릴레이 면담’에서 최 회장이 발견한 것은 하이닉스 특유의 ‘야성’이었다. 화장실에도 붙어 있던 ‘독하게’라는 표어, 이 치열함을 그는 그룹 전체에 전파하고 싶었다.

책은 하이닉스라는 조직이 현대전자, LG반도체, SK그룹이라는 이질적인 세 문화의 융합체임을 강조한다. 청주의 LG 출신과 이천의 현대 출신, 그리고 SK의 관리 문화가 섞이며 충돌하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혁신의 용광로가 되었다는 분석은 흥미롭다. 또한 SK텔레콤이라는 안정적인 캐시카우가 반도체 산업 특유의 변동성을 완충해 주면서, SK하이닉스는 불황기마다 투자를 멈춰야 했던 ‘천수답 경영’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었다. SK그룹 전체를 관통하는 ‘따로, 또 같이’라는 경영철학이 여기서 구현된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백미는 ‘반도체 겨울’을 뚫고 피어난 HBM(High Bandwidth Memory, 고대역폭 메모리) 기술 개발의 디테일한 서사에 있다. 책은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져 있던, 일명 ‘이천 캠퍼스 체육관 옆 낡은 건물(TSV동)’에서 시작된 눈물겨운 도전기를 상세히 기록한다.

TSV동에서 시작된 집념, HBM이라는 반전의 기술사

HBM은 2000년대 후반, 메모리의 성능 한계를 넘으려는 하이닉스 엔지니어들의 고민에서 시작됐다. 프로세서의 연산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지만, 데이터를 나르는 메모리의 대역폭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전체 시스템 성능이 저하되는 병목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세 공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칩에 수천 개의 구멍을 뚫어 수직으로 연결하는 TSV(Through Silicon Via) 기술에 매달렸다. 그렇게 2013년 AMD와 손잡고 세계 최초의 HBM을 탄생시켰지만, 시장은 냉담했다. 성능은 좋지만, 너무 비싼 ‘슈퍼카 메모리’였기 때문이다. 더 큰 시련은 HBM2(2세대) 때 찾아왔다. 원가 절감과 성능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설계에 실패했고, 시장 주도권을 경쟁사에 뺏기고 만 것이다. 사내에서는 HBM 팀을 두고 ‘아오지 탄광’이라 부르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중단’ 대신 ‘전면 수정’을 택했고, 엔지니어들은 ‘안정’ 대신 ‘모험’을 선택했다. 첫 번째 반전의 열쇠가 바로 ‘MR-MUF’ 공정의 도입이다. 기존 필름 방식(TC-NCF)은 칩을 쌓을 때마다 고압과 고열을 가해야 해 칩 손상과 휨(Warpage) 현상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를 넘기 위해 SK하이닉스 패키징 팀은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해 굳히는 MR-MUF(Mass Reflow Molded Underfill)라는 미지의 기술을 과감히 선택했다. SK하이닉스는 나믹스(소재), 토와(장비) 등 해당 분야의 2~3등 기업들과 의기투합해 50번이 넘는 배합 실험 끝에 이 기술을 성공시켰다. 이는 방열 성능과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판을 뒤집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두 번째는 ‘시프트 레프트(Shift Left)’와 ‘스텝 퀄(Step Qual)’로 대표되는 일하는 방식의 혁신이다. 시프트 레프트는 개발 단계에서 미리 양산의 문제를 해결하고, 스텝 퀄은 품질 부서가 개발 초기부터 함께 머리를 맞대어 제품 퀄리티를 조기에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장에 선제적으로 신제품을 내놓는 ‘타임 투 마켓’ 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 HBM3E 개발 과정에서 “안타만 쳐도 된다”는 안정론을 뒤로 하고, 당시 아직 개발 중이던 ‘1b* 공정을 과감히 도입해 “홈런을 치겠다”고 결정한 대목은 SK하이닉스의 기술적 자신감을 보여준다. 2023년 사상 최악의 적자 시기에도 청주 M15 낸드 공장을 HBM 라인으로 전환하는 과감한 베팅을 감행했던 것 역시 “준비하는 데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2024년 9월, 세계 최초 HBM3E 12단 양산이라는 쾌거로 이어졌다. 1,024개의 I/O를 통해 초당 1.2TB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이 제품은 단순한 메모리가 아니라,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을 구동하는 AI 가속기의 심장이 되었다.

* 10나노(nm)급 미세공정 기술은 세대순으로 1x->1y->1z->1a->1b->1c(6세대)로 진화함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최태원 회장의 파트너십도 책의 중요한 축이다. 2021년 첫 만남에서 젠슨 황은 “칩의 가격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AI 학습을 제대로 구현해 주면, 그게 저렴한 것”이라는 ‘CEO 수학’을 역설했고, 최 회장은 이에 깊이 공명했다. 이 만남은 하이닉스-엔비디아-TSMC로 이어지는 ‘AI 트라이앵글’ 동맹으로 발전해 현재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의 85%를 장악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했다.

“Happen to be, 적시에 적소에 있어야 한다”는 최 회장의 철학처럼, 『슈퍼 모멘텀』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진리를 웅변한다. 엔지니어들이 허름한 ‘TSV동’에서 쏘아 올린 작은 공이 15년 뒤 전 세계 AI 혁명의 핵심이 되었다. 반도체 산업의 냉혹한 경쟁 속에서 언더독이 챔피언으로 거듭난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적 기록이자, 기술을 향한 집념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서 증명한 AI 리더십, HBM으로 쓴 ‘슈퍼 모멘텀’의 기록

▶ 피·땀·칩으로 만든 SK하이닉스의 ‘슈퍼 모멘텀’… 집필진이 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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