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이제 기업을 넘어 국가의 전략과 실행력을 시험하는 단계에 들었습니다. 이번 [시선:時] 시리즈에서는 기술 · 금융 · 정책 · 인프라 · 생태계 · 글로벌 · 환경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대한민국이 AI 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조건과 선택이 필요한지 각 전문가의 시선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첨단산업 환경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방향과 가능성을 함께 짚어봅니다.
<시리즈 순서>
① AI 반도체 국가 대항전, 피지컬 AI 주도권을 향한 총력전에 돌입하다
② AI 강대국으로의 전환점, 투자를 위한 법제 정비가 필요한 순간
③ AI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 자본과 에너지 인프라
④ AI 반도체에서 AI 서비스까지, 생태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떠오르다 – 노근창 전무
⑥ 소버린 AI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르는 대한민국의 미래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 ‘경기 · 충청’
경기도와 충청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주요 생산 거점으로 다양한 국내외 기업들이 고객사 지원을 위해 신규 공장과 해외 법인을 설립하는 지역이다.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이천과 충청북도 청주에 팹(Fab)을 운영하고 있으며, SK키파운드리 역시 청주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이외에도 기흥 · 화성 · 평택 · 부천 · 음성 등지에 국내 주요 반도체 제조 시설이 포진해 있어, 경기 남부에서 충청권으로 이어지는 이 일대를 이른바 K-반도체 벨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 국내 주요 반도체 생산 시설이 밀집한 K-반도체 벨트
또한 인근 지역인 인천에는 세계적인 OSAT* 기업 앰코(Amkor)와 스태츠칩팩(STATS ChipPAC)이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노광장비 업체인 ASML 역시 화성 · 평택 · 이천 · 청주에 한국 법인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ASML의 경우, 지난 2025년 11월 경기도 화성에 2,400억 원을 투자해 ‘리유즈 앤 리페어(Reuse & Repair) 센터’를 개소하기도 했는데, ASML이 이 같은 대규모 캠퍼스를 구축한 곳은 대만과 한국뿐이다.
* 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 반도체 제조 공정 중 웨이퍼 제작이 끝난 후 칩을 패키징하고 성능 및 품질을 검사하는 후공정 작업을 외부 전문업체에 맡기는 방식으로, 팹리스 · 파운드리 등이 설계 · 웨이퍼 제작을 마친 제품을 외주 OSAT 업체에 보내 패키지 조립 및 기능 테스트를 수행하는 산업 체계를 말한다.
이 외에도, 반도체 장비 전문 업체인 램 리서치(Lam Research)는 용인 · 화성의 생산 능력을 2배로 확대하고 있으며, 반도체 장비 전문 업체 도쿄일렉트론(TEL) 역시 2024년 10월 화성에 세 번째 R&D 센터를 준공, 현재 네 번째 R&D 센터 건설을 진행 중이다. TEL은 2029년까지 한국에 5년간 1조 엔(한화 약 9조 원) 이상 투자할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세계 1위 반도체 전공정 장비 기업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는 분당 · 화성 · 이천 등 국내 12개 사업장을 운영하는 데 이어 경기도 오산에 R&D 협업 센터를 설립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용인, 622조 원이 향하는 차세대 생산 거점
특히 경기도 용인은 한국과 해외 반도체 소재 · 부품 · 장비(이하 소부장) 기업들까지 생산 시설과 R&D 센터를 확대하는 핵심 거점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HBM 시장 점유율 1위이자 2025년 D램 시장 1위를 차지한 SK하이닉스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총 126만 평 부지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 중이다. 이곳에는 SK하이닉스 팹(Fab) 4개(약 60만 평)를 비롯해 소부장 협력 단지(약 14만 평), 인프라 부지(약 12만 평)가 들어설 예정이며, 2025년 2월, 1기 팹 건축 허가 승인 이후 공사를 본격화했다.
SK하이닉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향후, HBM과 프리미엄 D램 등 AI 메모리 중심의 생산이 이뤄질 계획이다. 총투자 규모는 122조 원 이상으로 1기 팹은 2027년 2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를 포함해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참여한 경기 남부 권역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프로젝트*에서는 2047년까지 총 622조 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질 예정이며, 향후 20년간 300만 개 이상의 직 · 간접 고용 창출을 전망하고 있다.
* 2024년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 방안으로 현재 조성되고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포함해 경기도 이천 · 평택 · 화성 · 안성 · 성남 · 판교 · 수원 등에 운용되고 있는 기존 반도체 연구 및 제조 시설을 포함한다.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단순한 반도체 생산시설이 아닌 ‘반도체 토탈 설루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 외 다수 기업이 동시에 용인시 처인구를 신규 생산 거점으로 선정하면서 용인은 단순한 반도체 생산 기지에서 나아가 R&D, 설계, 전공정, 후공정, 소부장을 아우르는 반도체 산업의 토탈 설루션 제공 지역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026년 1월 29일 「반도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전력 · 용수 등 인프라 구축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용인시 처인구는 기존 입지해 있던 반도체 생산 시설들과 지리적인 연결성이 좋으며 교통 인프라 개선으로 우수 인력 확보에도 유리하다.
*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격상해 인허가 절차 간소화, 세제 지원, 전력 · 용수 등 인프라 구축 지원을 규정한 특별법
해외 반도체 생산 공장의 집적 ∙ 분산 사례 참고해야
반도체 공장들의 수도권 집중에 대한 일부 걱정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특히, 전력과 용수 인프라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최근 대규모 전력과 용수 인프라를 필요로 하는 데이터센터가 지방에 다수 건설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도체 공장의 수도권 집중을 비관적으로 볼 상황은 아니다.
먼저 해외의 사례를 살펴보면, 대만의 경우 TSMC가 대만 섬 서쪽 4개 지역(신주,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에 공장을 가지고 있다. 대만은 경상도 크기의 작은 면적에 고속철도망이 잘 발달해 있어 공장이 4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고 해도 지역 간 밀집도와 접근성이 다른 국가들 대비 양호한 편이다. 한편, 4나노 이하의 선단 공정은 남부 지역인 타이난과 가오슝 팹을 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반면 중국은 베이징, 상하이, 허페이, 우한, 선전 등 여러 지역에서 반도체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각 지방 정부가 공격적으로 반도체 공장을 유치한 결과이지만, 일각에서는 소부장 기업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별도의 법인들을 따로 설립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운영 효율성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사례를 참고해 더욱 효율적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 및 제조업 부흥을 위해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온 미국도 다양한 지역에 공장이 분산돼 있다. TSMC는 애리조나, 마이크론(Micron)은 아이다호와 뉴욕주에 공장을 지어 지역 간 이동 거리가 길다. 일본도 라피더스(Rapidus)는 홋카이도 치토세, TSMC는 규슈 구마모토, 마이크론은 히로시마, 키옥시아(Kioxia)는 요카이치와 기타카미 등 여러 지역에 공장이 나뉘어 있어 지역 간 이동 시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AI 전환기,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자리할 용인
우수 인재 확보와 교통의 편의성을 감안할 때, 경기도에 반도체 생산 시설과 인프라, 팹리스*까지 밀집해 있는 구조는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 분명한 강점이 될 수 있다. 해당 생태계 간 유기적인 협업이 가능해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반도체 설계와 생산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질 경우, 내부 효율성이 제고되고 상호 협력도 더욱 유연하게 진행될 수 있다. 예를 들면, TSMC 본사가 있는 대만 신주에는 PSMC 등 다른 파운드리 기업들과 미디어텍(MediaTek), 실리콘모션(Silicon Motion), 에즈피드(ASPEED), 누보톤(Nuvoton) 등 주요 팹리스 기업들의 본사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같은 단지 내 TSMC 팹에서 개발한 제품을 생산할 경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등 타임 투 마켓* 단축에서도 효율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 팹리스(Fabless): 반도체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는 기업
* 타임 투 마켓(Time To Market, TTM): 제품이 구상되고 시장에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한국판 실리콘밸리가 되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용인은 우리나라 팹리스 산업의 요람이 될 판교와도 인접해 있으며 해외 주요 소부장 기업의 국내 거점이 위치한 경기, 충청권과의 접근성도 양호하다. 특히, 반도체는 항공 물류를 활용한 수출 비율이 높은데, 용인은 국내 화물 처리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인천 공항과의 연결성도 좋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팹리스 등 비제조업 기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용인은 팹리스 · IDM · 파운드리 · 소부장을 아우르는 풀 스택(Full Stack) 구조를 갖췄다는 점에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용인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차별화된 반도체 벨트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역대 최대 자본이 투입되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인 만큼, 인근 지역에 대한 경제 활성화 효과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용인을 넘어 인접한 인근 지역에까지 확산되며, 경기 남부 전역에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수도권에 위치한 국내 주요 대학과의 산학 협력을 더욱 강화해 용인을 반도체 산학 협력의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국내외 유수 인재들이 용인에 모여 혁신을 이뤄내고 새로운 AI 반도체 기술을 개발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다.
산업 전반이 AI 중심으로 재편되며 인프라와 디바이스 양 측면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에이전틱 AI*와 피지컬 AI*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응용 분야별 고성능 반도체에 대한 수요 충족과 신속한 제품 출시 역량이 해당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용인은 이와 같은 역할을 원스톱으로 수행하는 한국형 실리콘밸리로 성장해, 향후 세계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 에이전틱 AI(Agentic AI): 고도화된 Agent AI로, 인간 개입 없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하며, 작업을 실행하는 AI 시스템
* 피지컬 AI(Physical AI): 로봇, 자율주행차 등의 실물 하드웨어에 탑재하는 AI로, 인공지능 기술을 실제 물리적 환경에 구현하고 적용하는 것을 가리킴

※ 본 칼럼은 AI/반도체 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