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태어난 에니악(ENIAC)은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이 저장장치에 프로그램을 저장하고 실행하는 방식을 정립한 '폰 노이만 구조'를 적용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후에 등장한 거의 모든 컴퓨터, 지금 손바닥에 있는 스마트폰 역시 모두 이러한 형태를 근간으로 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컴퓨팅’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컴퓨터는 어떻게 변할까요? '워크스테이션'을 통해 컴퓨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슈퍼컴퓨터를 책상으로… 워크스테이션의 등장
컴퓨터는 복잡한 계산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어원도 '계산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죠. 초기 컴퓨터는 탄도미사일 궤도나 천체물리학과 같이 수학적인 계산이 많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는데요. 에니악을 포함한 이후에 선보인 컴퓨터는 진공관을 사용해 방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덩치가 매우 컸습니다.
그러다가 트랜지스터를 활용한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가 등장하면서 냉장고 정도 크기로 줄어듭니다. 곧바로 여러 대의 컴퓨터를 연결한 '슈퍼컴퓨터'가 등장하지만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PC)는 1970년대 중반에서야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고(故) 스티브 잡스,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I’이 주인공입니다.
PC가 나타났으나 여전히 컴퓨터는 비싸고 무거우며 전문가의 영역이었습니다. 특히 메인프레임과 같은 대형컴퓨터는 사용하기에 너무나 까다로웠죠. 그래서 나온 것이 ‘미니컴퓨터’입니다. 요즘 말하는 미니컴퓨터는 한 손으로 들고 다니는 작은 데스크톱PC를 말하지만, 예전에는 대형컴퓨터의 크기를 줄이고 사용자 편의성을 높인 제품을 뜻했습니다.
이름은 미니컴퓨터였지만 책상에 올려놓고 사용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습니다. 붙박이장 크기이니 건물 한 층을 가득 채우는 슈퍼컴퓨터나 대형컴퓨터보다는 작은 정도였죠. 그때 PC 정도 크기의 성능은 미니컴퓨터가 목표였고, 선마이크로시스템스가 ‘SUN 1’이라는 이름의 제품을 1982년 내놓게 됩니다. 워크스테이션의 탄생입니다.
크기는 작았지만 워크스테이션은 미니컴퓨터와 거의 비슷한 성능을 냈습니다. 이를 위해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를 비롯해 각종 부품에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어차피 일반인이 구매할 제품(1대당 1000만원~1억원)이 아니었고 용도를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운영체제(OS)도 유닉스를 사용했습니다. 사실상 조그만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성능은 슈퍼컴퓨터와 연결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워크스테이션으로 기본적인 작업을 하고 슈퍼컴퓨터로 본격적인 계산에 들어가는 방식이었죠.
▲ SK하이닉스 전신인 현대전자도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해 판매한 바 있다. (출처: 컴퓨터와 게임)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도 이 시장을 눈여겨봤습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 호환 워크스테이션을 1990년 개발했으며 1993년에는 전용 CPU를 개발한 바 있죠. 당시 워크스테이션은 밉스(MIPS) 아키텍처 기반의 '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RISC)' CPU를 주로 사용했고, SK하이닉스는 모델명 ‘썬더 1.5’라는 제품으로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미국에 이어 1998년에는 중국에 워크스테이션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짧고 화려한 전성기, PC에게 자리를 내주다
▲ SGI가 1995년에 출시한 O2 워크스테이션
1990년대는 워크스테이션의 전성기였습니다. 1980년대 미항공우주국(NASA)이 인공위성과 우주탐사선 개발과 운영에 워크스테이션을 적극 도입하면서 각 기업은 제품 개발 및 활용에 열을 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실리콘그래픽스(SGI) 워크스테이션도 이 당시 개발해 판매된 제품입니다. <터미네이터2>, <쥐라기 공원>, <토이스토리> 등 당시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컴퓨터 그래픽(CG) 작업에는 SGI 제품이 쓰였습니다. 방송국의 특수효과(FX)에도 톡톡히 역할을 했죠.
SGI도 다른 워크스테이션 업체와 마찬가지로 유닉스를 개량한 자체 OS, 아이릭스(IRIX)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는 솔라리스(Solaris), IBM은 AIX, 휴렛팩커드는 HP-UX와 트루64라는 OS를 사용했습니다. 모두 전용 CPU와 플랫폼에서 작동했는데, 이를 x86 아키텍처 기반 PC에서 써먹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리눅스(LINUX)입니다. 조상은 모두 유닉스고요.
▲ 첫번째 이미지 : 모듈형 설계로 확장이 간편하다. / 두번째 이미지 : 각 모듈을 모두 분리한 모습.
SGI 워크스테이션(모델명 O2)을 자세히 들여다보죠. 겉보기에는 이쁘장한 데스크톱PC로 보이지만 무게가 상당합니다.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철판과 냉각용 방열판을 본체에 두른 덕분입니다. 10Kg은 훌쩍 넘죠. 상위 라인업인 ‘옥테인’이라는 제품은 30Kg에 육박합니다. SGI O2는 모듈식 설계가 적용됐는데 메인보드를 비롯해 전원공급장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각종 입출력(I/O) 장치를 전용 슬롯에 장착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시대를 고려할 때 상당히 선진적인 방식입니다.
▲ 메모리는 특별 주문한 제품이다. ECC와 레지스터드를 모두 지원한다. 듀얼채널 구조라 무조건 짝수로 이뤄져야 한다.
HDD 인터페이스는 SCSI(Small Computer System Interface)를 사용합니다. 패럴렐(병렬) 프로토콜을 사용하며 데이터센터 스토리지로 흔히 볼 수 있는 SAS(Serial-Attached SCSI)의 이전 버전이죠. 2개의 HDD가 장착됐고 하나는 OS, 다른 하나는 데이터 백업용입니다. 각 부품을 모두 제거하고 난 다음 메인보드를 꺼내면 빼곡히 박혀 있는 메모리가 보입니다. 그런데 PC와 달리 핀(Pin) 개수(278개)가 다른 특수 메모리입니다. 에러수정코드(ECC)는 기본이고 레지스터드(Registered)까지 제공합니다.
참고로 레지스터드는 별도의 컨트롤러 칩을 메모리 모듈에 장착한 형태로, 데이터 신호를 정렬하고 병목현상을 최소화해줍니다. 작은 메모리 컨트롤러가 메모리 모듈에 하나씩 마련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덕분에 CPU 부담은 줄이고 각 부품의 잠재력을 100% 끌어낼 수 있죠.
▲ 64비트 CPU가 사용됐으며 안정성을 극도로 높인 것이 특징이다.
CPU는 밉스 호환으로 SGI O2는 R5000, R10000, R12000, RM5200, R12000A, RM7000A가 시대와 모델에 알맞게 쓰였습니다. 미세공정, 클록, 캐시메모리, 지원 비트에 차이가 있습니다. 분해한 제품에는 RM5200이 사용됐는데 64비트 기반에 300MHz의 클록, 64KB 레벨1(L1) 캐시메모리, 1MB의 레벨2(L2) 캐시메모리가 적용됐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보잘것없지만 1997년 기준으로는 PC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컴퓨팅
영원할 것 같았던 워크스테이션은 x86 CPU의 성능이 높아지고 호환성, 사용자 편의성, 가격 등이 맞물리면서 점차 사그라들었습니다. SGI도 파산한 지 오래죠. 지금 출시되는 워크스테이션은 모두 PC 기반으로 설계된 것들입니다. 미니컴퓨터의 탁상용 버전인, 엄밀한 의미의 워크스테이션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최신 스마트폰의 성능은 과거 슈퍼컴퓨터, 혹은 워크스테이션에 필적합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손에 들고 다니는 1980년대 슈퍼컴퓨터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죠. 그렇다면 이 순간에 데이터센터에 있는 슈퍼컴퓨터나 서버가 가진 성능은 언제쯤 스마트폰 크기로 줄어들 수 있을까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했을 때 10년이면 충분하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 손가락 위에 올려져 있는 칩이 아니다. 그 위에 있는 작은 알갱이 하나가 1990년대 PC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 (출처: IBM)
얼마 전 IBM에서 내놓은 좁쌀 크기의 '크립토그래픽 앵커(Cryptographic Anchors)' 컴퓨터는 1990년대 PC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과 같은 기술이 접목되면 성능은 높이면서도 크기는 더 줄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앞으로 좁쌀이 아니라 머리카락 굵기의 컴퓨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이때의 컴퓨터는 단순히 계산을 넘어서서 컴퓨팅의 한계를 극복, 순식간에 데이터를 빨아들이고 상상하지 못할 세계를 펼쳐줄 수 있습니다. 적용 분야는 무궁무진하죠.
SK하이닉스 역시 새로운 컴퓨팅 시대를 대비해 사람의 뇌를 모사(摹寫)하는 뉴럴프로세서유닛(NPU)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스탠퍼드대학교, 램리서치, 버슘머티리얼즈와 함께 뉴로모픽(Neuromorphic·뇌신경 모방) 칩의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워크스테이션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슈퍼컴퓨터에서 시작해 점차 하방 전개가 이뤄질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구나 쉽게 만나볼 수 있겠죠. SK하이닉스도 단순히 반도체가 아니라 컴퓨팅 그 자체를 판매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구석에서 먼지를 폴폴 날리며 처박혀 있던 워크스테이션을 꺼냈을 때 먼저 든 생각은 스마트폰이었습니다. 당시 워크스테이션에서만 가능했던 작업은 이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해졌죠. 지금 시대는 엄청난 빅데이터,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는 AI 등이 등장하고 있으나 여전히 생각의 속도와는 격차가 있습니다.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고를 체계화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앞으로의 컴퓨팅은 단순 연산에만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가능성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