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시장의 키워드는 ‘전쟁’이다. 인텔이 차세대 메모리 제품 ‘옵테인 메모리’ 신제품 관련 정보를 이례적으로 한국에서 최초 공개하며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선전포고를 날렸고,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TSMC와 글로벌파운드리의 특허 소송전이 한창이다. 미중 무역분쟁, 일본 수출규제 등 글로벌 경제전쟁 여파로 반등의 계기가 절실하던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소재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연이어 들려와 한숨을 돌렸다.
메모리 영역에도 발 내딛는 인텔, 차세대 메모리 경쟁 격화되나
▲롭 크룩 인텔 비휘발성 메모리 솔루션 그룹 총괄 수석부사장이 자사 제품군을 소개하고 있다.(사진 제공 : 인텔코리아)
인텔이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 JW메리어트호텔에서 진행한 글로벌 기술 발표회에서 옵테인 메모리 신제품 관련 정보를 공개했다. 인텔이 글로벌 제품 프리미어(첫 공개)를 한국에서 한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양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인텔이 본격적인 메모리 시장 진출을 위해 한국에서 선전포고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이 관련 기술 정보를 공개한 2세대 옵테인 DC 퍼시스턴트 메모리(DCPM)는 마이크론과 공동 개발했던 3D 크로스포인트(3D Xpoint)의 후속제품으로, 차세대 메모리 중 하나인 상변화메모리(P램)에 기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D램과 낸드플래시의 특징을 모두 갖춘 제품으로 물질의 상이 바뀜에 따라 D램으로 작동할 수도, 낸드플래시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반도체 업계의 분석.
인텔은 이미 기존에 출시했던 옵테인 DC 퍼시스턴트 메모리를 통해 서버용 D램 시장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D램처럼 사용하지만, 낸드플래시처럼 데이터를 영구 저장할 수 있어 두 제품을 하나로 대체해 원가경쟁력을 키운다는 것. 초기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 사이에 위치하면서 두 반도체를 보완해주는 성격으로 쓰이겠지만, 향후에는 대체할 가능성이 높다. 인텔은 D램과 옵태인 DC 퍼시스턴트 메모리를 병행 설치하면 비용은 30% 낮출 수 있고 SAP 하나(HANA)와 같은 인메모리 기술 기반 데이터베이스를 실행했을 때 성능 향상 효과가 높다고 강조한다.
인텔 관계자는 “D램 미세화 속도는 둔화됐고, D램 분야에서 무어 법칙은 깨졌다”면서 “인텔 옵테인 기술은 D램의 부족한 용량을 채우면서도 낸드플래시 대비 응답속도가 100배 빨라 폭증하는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솔루션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고객사도 속속 늘고 있다. 미국 오라클과 버라이즌, 중국 바이두 등이 인텔의 옵테인 DC 퍼시스턴트 메모리를 탑재해 서버 운영에 나선 상태이고, 국내에서는 네이버 등이 인텔과 손잡고 차세대 메모리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TSMC(대만) VS 글로벌파운드리(미국), 파운드리 시장서 특허대전 ‘빅뱅’
잠잠했던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특허 전쟁이 불붙었다. 무대는 세계 반도체 업계의 미래 성장동력 중 하나로 꼽히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시장이다.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의 TSMC와 한때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했던 미국의 글로벌 파운드리가 미국, 싱가포르, 독일 등 세계 각지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특허소송전을 시작한 것.
먼저 소송전을 시작한 건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다. 글로벌파운드리는 대만의 TSMC가 자사의 파운드리 공정 기술 특허등 16건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독일에서 지난 8월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TSMC가 제조하는 주력 파운드리 공정 전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것. 글로벌파운드리는 TSMC가 글로벌파운드리의 28나노, 16나노, 12나노, 10나노, 7나노 관련 특허를 침해해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벌어들였다고 주장했다. 글로벌파운드리는 TSMC뿐만 아니라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 TSMC의 주요 고객사들을 대상으로도 비슷한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TSMC가 불법 취득한 특허로 제조한 반도체를 사용했다는 이유에서다.
TSMC도 이에 맞서 글로벌파운드리를 대상으로 맞불을 놨다. 이달 초 25건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미국, 싱가포르, 독일 등에서 글로벌파운드리에 연이어 소송을 제기한 것. TSMC는 글로벌파운드리가 40나노부터 12나노까지의 주요 공정 기술 가운데 더블 패터닝, 게이트 구조 등 핵심 설계, 제조 기술과 관련한 특허 25종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 역시 글로벌파운드리의 주력 생산 품목들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글로벌파운드리가 TSMC가 독점하고 있는 파운드리 시장의 영향력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이번 특허소송전을 벌인 것으로 분석한다. TSMC는 현재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49%를 차지하고 있는 압도적인 1위 기업. 반면 글로벌파운드리는 수년 전만 하더라도 세계 수위의 파운드리 기업이었지만, 최근 투자 부족, 기술력 부재 등으로 7나노급 파운드리 공정 진입을 포기하면서 시장에서 밀리고 있다. 최근에는 후발주자 격인 삼성전자에도 점유율에서 크게 뒤처진 상태다. 궁지에 몰린 글로벌파운드리가 미세공정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시장 영향력을 확인하고, TSMC를 견제하기 위해 특허 소송 카드를 빼든 것. 반면, TSMC 역시 이번 기회에 글로벌파운드리의 원천 기술을 완전히 견제하고, 시장에서 밀어낼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다.
한편, 이번 특허 소송전은 한국 반도체 업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일단 한국업체들 입장에서는 양사의 소송전이 벌어지면서 기술 개발 역량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이에 치고 나갈 수 있는 여력이 발생할 수 있다. 또 글로벌파운드리가 TSMC에 패소할 경우, 막대한 로열티 부담 등으로 시장에 헐값에 매물로 나올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파운드리 경쟁력을 끌어올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2개월 연속 보합세 그친 D램 가격, 반등 시점은?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언제 회복될까? 대만의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가 지난 1일 발표한 9월 D램, 낸드플래시 고정거래가에 따르면 D램(DDR4 8Gb 기준) 평균 고정거래가는 1개당 2.94달러로, 지난 7월 이후 3개월 연속 반등 없이 보합 상태에 머물러있다. 1년 전과 비교해보면 가격이 64%나 떨어진 상태다.
D램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전체 70% 가량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시장이다. 한국 수출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다. D램 가격이 저점에서 보합세를 보이는 것은 결국 한국 양대 기업인 SK하이닉스,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한국 수출 경쟁력에도 타격을 주는 것.
반도체 업계에서는 반등 기미가 보이지 않는 D램 가격 추이의 원인으로 미중 무역전쟁의 장기화를 꼽는다.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양국의 무역전쟁이 1년여가 다 되어가도록 완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반도체에 대한 수요 자체가 얼어붙은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은 세계 양대 메모리 반도체 수요국이다.
이에 따른 세계 경기 침체를 우려한 기업들의 투자 위축 역시 D램 가격을 끌어내린 주요 원인이다. 작년 하반기까지 계속된 메모리 호황기를 이끈 주체는 클라우드 서비스용 서버 시장이었다. 인공지능, 5G 같은 차세대 기술의 보급이 빨라지면서 데이터 처리 용량이 급증하자 각국 주요 기업들은 이를 처리할 데이터센터를 확충하고 여기에 필요한 반도체를 대거 충당했는데, 기업들의 재고 증가와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인한 경기 침체 우려 등이 겹치면서 투자가 위축되고 반도체 수요도 꺾인 것.
업계에서는 올 연말까지는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당장 미국과 중국이 합의에 도달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단기간에 상황이 바뀌진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대신 기업들의 반도체 재고량 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황이기 때문에 올 연말, 내년 초부터는 다시 수요가 올라가면서 반도체 가격이 반등하고,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의 실적도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실제 대만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난야의 페이 잉 리 CEO는 최근 투자자 행사에서 D램 수요에 대해 “견조하게 올라가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D램 가격이 내년 1분기부터 다시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서버용 메모리와 스마트폰, 고사양 PC용 D램 수요가 하반기부터 늘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마이크론이 쌓아둔 재고량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를 소화할 경우 4분기까지는 가격이 유지되다가 내년 1분기부터 다시 상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소재 국산화 러시 가속화…소재 독립 가시화되나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로 인해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감에 휩싸인 상황에서, 반도체 소재 국산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 동안 일본에 대부분 의존해왔던 불화수소, 감광액 같은 핵심 반도체 소재를 국산화해 공급하는 기업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것.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이달 초부터 반도체 세정, 식각에 쓰이는 액상 불화수소를 국내 중소기업인 램테크놀러지로부터 공급받아 투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액상 불화수소는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를 단행한 지난 7월 이후 단 한 건도 수출 허가가 내려지지 않았던 소재. 하지만 한국 중소기업이 이를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산 소재 활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국내 대표 불화수소 업체인 솔브레인은 제2공장을 준공하고 불화수소 생산량을 기존의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솔브레인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와 함께 세정, 식각용 불화수소 테스트를 진행 중이며, 올 연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량 납품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SK의 소재 계열사인 SK머티리얼즈 역시 기체 상태인 에칭 가스(기화 불화수소)를 양산해 내년부터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게 납품할 계획이다. EUV(극자외선)용 식각액의 경우 동진세미켐 같은 기업에서 국산화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 동안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분업화가 가장 철저히 이뤄져 왔던 분야였지만, 앞으로는 각국 간 보호 무역주의의 가속화로 인해 글로벌 분업이 예전처럼 잘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일본이 액상 불화수소에 대해서만 유독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액상 불화수소가 식각, 세정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제품으로 수요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소재 기업들이 속속 액상, 기체 불화수소를 국산화할 경우 한국 기업들이 해외에 해당 핵심 소재를 의존할 필요가 없고, 그만큼 협상력이 커져 시장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