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장 경쟁의 축은 기업에서 정부로 넘어가는 것일까. 세계 반도체 패권을 두고 미국, 중국뿐 아니라 유럽까지 경쟁에 참전해 규제와 유인책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각국 정부는 자국 우선주의에 입각해 거대 반도체 인수합병(M&A)도 매번 막아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는 세계 고지에 올랐지만, 메모리 가격 변동에 따른 그 위상은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반도체 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M&A…거대 기업 간 합종연횡으로 확산

작년부터 반도체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M&A였다. 당초 군소 반도체 기업이나 반도체 기술 스타트업 위주로 진행됐던 M&A가 이제는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 기업 간의 합종연횡(合從連衡)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는 국가 기술 패권의 중추 역할을 하는 산업 분야이다 보니, 각국 정부와 각 기업의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에 기업과 기업 간의 결합 수준을 넘어 국가 핵심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며 M&A 시장도 흔들리는 분위기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 M&A 현황

최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일본 키옥시아(KIOXIA)와 미국 웨스턴디지털(Western Digital) 간의 합병 이슈로 뜨거웠다. 트렌드포스(TrednForce) 리포트가 발표한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키옥시아는 세계 2위, 웨스턴디지털은 3위의 낸드플래시 업체다. 양사가 합병할 시 시장점유율은 약 33%로, 세계 1위인 삼성전자와 견줄 수 있는 수준이다.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에서도 양강 체제가 탄생할 가능성이 생긴 상황. 웨스턴디지털은 키옥시아 인수를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고, 현재 협상 중인 인수금액은 약 200억 달러 수준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키옥시아와 웨스턴디지털 간의 합병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일본 정부는 유일하게 남은 자국 반도체 기업을 미국 기업에 넘길 수 없다는 입장이고, 반도체 핵심 기술 유출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키옥시아의 낸드플래시 기술력이 웨스턴디지털을 앞선다는 시각이 우세한데, 웨스턴디지털 주도로 두 기업이 합병하면 일본의 반도체 핵심 기술이 고스란히 미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일본 경제산업성이 양사의 합병을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또한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반도체 기업의 특성상 양사 간 M&A는 미국, 일본뿐 아니라 중국, 유럽연합(EU) 등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 이중 중국은 양사의 합병을 불허할 것이라는 예측도 지배적이다. 이에 최근에는 키옥시아가 M&A가 아닌 일본 증시 상장을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격변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의 엔비디아(NVIDIA)와 영국 ARM의 M&A도 각국 정부와 고객사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ARM의 본사가 있는 영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빌미로 반대 입장을 내비쳤고, M&A를 통해 엔비디아가 반도체 시장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는 상황을 경계한 글로벌 기술 기업들 역시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ARM은 세계 모바일용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95%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 있고, 엔비디아도 GPU 시장에서는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두 회사가 합칠 경우 시스템 반도체 설계부터 GPU까지 아우르게 되면서 차세대 AI, 빅데이터 등 첨단 기술 분야의 반도체 권력을 쥐게 된다.

엔비디아가 ARM의 설계도를 손에 쥐고 각국 반도체 기업 및 IT 기업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현재 주요 반도체 기업들은 대부분 ARM의 원천 설계를 기반으로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어, 엔비디아가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이하 IP) 이용료를 대폭 인상할 경우 기업 실적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에 삼성전자, 아마존, 테슬라 등은 이미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도 미국 FTC(Federal Trade Commission, 연방거래위원회)에 해당 M&A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렇다 보니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제 대형 M&A가 성사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 브로드컴이 퀄컴을 1,300억 달러에 인수하고자 했던 시도가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고, 퀄컴의 NXP 인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의 일본 코쿠사이일렉트릭 인수 등은 중국 정부가 불허해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문 인수는 순조롭다는 점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중국을 제외한 7개국(한국, 미국, EU, 대만, 브라질, 영국, 싱가포르) 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마지막으로 중국 정부의 승인만 받는다면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승부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된다. 이에 업계에서는 “이미 다른 국가 정부에서 다 승인한 만큼, 중국이 반대의 명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각국의 반도체 주권 확보 움직임 가속화… EU “단순한 기술 경쟁 아닌 주권 문제”

▲각국의 반도체 주권 확보 움직임 가속화… EU “단순한 기술 경쟁 아닌 주권 문제”

각국 정부 차원에서의 반도체 주권을 강화하려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의 변방으로 불리던 EU에서 반도체 기술 주권 확보를 위한 ‘유럽 반도체 법’ 제정에 나선 것.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작년 세계 주요 권역별 반도체 생산능력 점유율에서 유럽은 9%에 그쳤다. 이는 한국(21%)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유럽의회 연설에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주권 문제”라며 “최첨단 유럽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R&D부터 생산 체계 구축까지 나서겠다”고 밝혔다. EU 집행위는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20%까지 늘리겠다는 ‘2030 디지털 캠퍼스’ 계획도 발표했다.

EU가 이처럼 반도체 주권을 강조하고 나선 배경에는 반도체 공급 부족에 따른 산업 가치사슬(Value Chain)의 붕괴가 있다.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유럽의 핵심 산업인 자동차 산업에서 공장 가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유럽 경제 성장률에 악영향이 미치고 있다. 이에 반도체 공급을 미국, 중국, 한국 등에 계속 의존할 경우 유럽의 경제 패권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EU는 영내로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공장을 유치하는 한편, 주요 국가의 대학에 반도체 전공 과정을 신설하는 등 관련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 정권부터 반도체 주권 확보에 여념이 없는 미국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하면서 패권 장악에 나서고 있다. 최근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면서 삼성전자 등 주요 업체들에 “반도체 재고, 주문, 판매 현황 자료를 공개하라”고 압박했다. 사실상 삼성전자의 영업 비밀을 공개하라고 주장한 것. 미국 정부는 이들이 자료 공개를 거부할 경우, 특정 제품 생산과 공급에 대한 협조를 강제할 수 있는 DPA(Defense Production Act, 국방물자생산법) 발동까지 염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삼성전자와 TSMC는 미국 내 공장을 갖고 있어 해당 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유럽, 미국 등에서 정부 차원의 압박이 지속될수록 각 기업이 정부에 더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 TSMC 등의 판매, 주문, 재고 현황을 파악할 경우, 향후 자국 기업에 해당 정보를 제공하거나 추가적인 기술 정보 제공까지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다.

주요국 정부들이 반도체 기업에 대한 러브콜과 압박을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우리나라 주요 기업이 해외로 공장이나 기술을 이전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에 정부 차원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메모리 호황에 잘나가는 K-반도체… 삼성전자, 3분기에도 인텔에 앞서

K팝, K드라마도 잘나가지만, K-반도체도 세계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3분기에도 인텔을 꺾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자리를 지킬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IC Insights Semiconductor Market Research)는 3분기 삼성전자의 매출이 223억 2,000만 달러(약 26조 6,000억 원)로 전 분기 대비 10% 늘어 1위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인텔은 전 분기보다 3% 줄어든 187억 8,500만 달러(약 22조 4,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D램, 낸드플래시 등의 수요 증가로 인해 매출이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인텔의 경우 마땅한 신성장동력이 없어 매출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인텔은 상위 15개 반도체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매출이 역성장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호황기가 이어지던 2018년 3분기 인텔을 꺾고 분기 매출 1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후 D램, 낸드플래시 등 주력 품목의 가격 하락세가 이어지면서 인텔에 약 3년여간 1위 자리를 다시 내줬다. 하지만 올해 들어 메모리 가격이 다시 상승세를 보이면서 1위 자리를 다시 거머쥐었다.

▲주요 반도체 기업 2021년 2분기 D램 매출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주력 반도체인 D램에서 지난 2분기 매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2018년 3분기 이후 처음으로 100억 달러 고지를 다시 넘어섰다. 1분기 대비 삼성전자의 D램 매출은 무려 30.2%나 늘어나면서 시장점유율 43.6%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난야 등 주요 D램 업체들의 매출 역시 모두 상승세를 탔지만, 삼성전자가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SK하이닉스는 67억2,000만 달러(약 7조 5,300억 원)의 D램 매출을 기록해 전 분기보다 20.8% 늘었고, 3위인 마이크론은 54억4,800만 달러(약 6조 1,1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전 분기보다 22.6% 늘었다.

이처럼 D램 업체들의 실적이 나란히 상승세를 보인 배경에는 급성장세를 보인 D램 가격 흐름이 있다. 실제로 2분기 D램의 평균판매단가(ASP, Average Selling Price)는 전 분기 대비 18~23%가량 상승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중에는 PC용 D램의 ASP 상승분이 23~28%로 가장 높았고, 서버 및 그래픽용 D램도 20~25%가량 ASP가 올랐다. 서버, 스마트폰 등 주요 완제품 고객사들이 다시 메모리 반도체 재고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가격이 상승세를 보인 영향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원격근무, 화상 교육 등 비대면 경제가 지속 성장하며 수요가 성장한 영향도 크다.

하지만 K-반도체의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당장 하반기부터 시작된 메모리 가격 하락 흐름이 시작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하락이 우려되기 때문.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가격 변동 폭이 크지 않아 주요 기업들은 비교적 실적을 꾸준히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IP 신흥강자’ 리스크파이브(RISC-V), 점유율 95% ARM에 도전장

▲‘반도체 IP 신흥강자’ 리스크파이브(RISC-V), 점유율 95% ARM에 도전장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기업은 어디일까.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인텔, TSMC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겠지만, 반도체 IP 분야의 강자인 영국의 ARM도 빼놓을 순 없다.

반도체 IP는 특정 반도체 회로를 반복 구성할 수 있는 설계도를 뜻한다. 스마트폰, 서버, PC, 자율주행차 등 각종 전자기기에 탑재되는 대부분의 반도체는 이 반도체 IP를 활용해 각 기업이 추가로 개발된 제품이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Counterpoint Research)에 따르면 반도체 IP 시장 규모는 작년 52억 달러에서 2025년 86억 달러 수준으로 2배 가까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ARM은 스마트폰용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95%에 달하는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삼성전자, 퀄컴, 애플 등 스마트폰용 칩셋을 개발∙생산하는 대부분의 기업은 ARM의 원천 기술을 활용한다.

하지만 최근 ARM의 경쟁자로 리스크파이브(RISC-V) 진영이 주목받고 있는데, 그 배경에는 개방성과 간편함이 있다. x86이나 ARM의 경우 정해진 구조대로만 아키텍처를 활용할 수 있고 설계도를 이용할 때마다 개당 책정된 로열티를 내야 한다. 하지만 리스크파이브는 기본적으로 ‘재단’ 형태로 운영돼, 마치 오픈소스처럼 누구나 원하는 대로 설계도를 가져가 자유롭게 개발할 수 있다. 또한 개발자들이 더 나은 구조를 구현할 경우 자유롭게 설계도를 수정할 수 있도록 했다. 전 세계 반도체 아키텍처 개발자들이 모두 참여해 기술 개발에 공헌할 수 있다는 의미다.

편의성과 전력 효율성도 리스크파이브의 경쟁력이다. 일반적으로 x86의 경우 성능은 좋으나 전력 효율은 비교적 떨어진다. ARM은 전력 효율성을 개선해 모바일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지만, 사물인터넷(IoT) 등 저전력 기기에 쓰이기에는 여전히 전력 소비량이 많다.

이에 반해 리스크파이브 기반 반도체는 소비전력이 매우 낮아 IoT 시대의 핵심 반도체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2025년까지 리스크파이브가 IoT 분야에서 25%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것”이라며 “산업용 전자제품, 자동차, HPC 등 다른 영역에서도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다 보니 리스크파이브 진영에서도 주목받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미국 사이파이브(SiFive)가 대표적이다. 사이파이브는 리스크파이브 기술을 활용한 반도체 설계도를 개발하는 기업으로, 한국에도 세미파이브라는 한국 법인을 운영 중이다. 대기업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구글 IBM,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주요 IT 기업들이 모두 리스크파이브 진영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그동안 인텔, ARM 등이 장악해왔던 반도체 원천 설계 분야에 리스크파이브라는 새로운 도전자가 등장해 시장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기술 발전 속도를 높일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특히 저전력이라는 경쟁력에 기반해 성능을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향후 도래할 IoT 시장에서는 ARM보다 리스크파이브 진영이 더 유리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테크 칼럼니스트 / 전 조선일보 기자

강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