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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업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산업을 지탱해온 PC는 몇 년 째 수요가 줄어들고 있고, 이를 대체해온 스마트폰마저 수요 정체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업계를 지배해온 '무어의 법칙(Moore's Law)'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죠. 지금까지 공정 미세화만 이뤄내면 수익을 낼 수 있었던 반도체 회사들은 이제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급변하고 있는 반도체 시장의 흐름을 살펴보고, 이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한계에 봉착한 기술개발, 변화하는 소비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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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미국 호놀룰루에서 열린 세계 3대 반도체 학회 중 하나인 'VLSI 기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논문 570개 중 220개는 10나노미터(nm)와 그 이후의 차세대 공정 기술에 대해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350개는 IoT와 자율주행차 등을 위한 기술을 다뤘죠. 이는 업계의 현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 동안 반도체업계는 1년반~2년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해오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10나노미터대 벽에서 기술 개발은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회로 선폭을 5나노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 해도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만큼 수익을 낼 수 있을 지 불투명해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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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시장도 바뀌고 있습니다. PC 시장은 스마트폰에 밀려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세계 PC 출하량은 전년 동기 대비 9.6% 감소한 6480만대에 그쳤고, 6분기 연속 하락했습니다. 전세계 PC 출하량이 6500만대 이하로 떨어진 것은 2007년 이후 처음인데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PC 대신 시장을 견인해온 스마트폰마저 심각한 정체를 겪고 있습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스마트폰 출하량은 2억9300만대로 작년 동기 대비 1.3% 감소했습니다. 게다가 더 이상 성능 좋은 스마트폰보다는 싼 가격의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점차 흐름이 바뀌고 있죠. 여기에 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국인 중국은 스스로 반도체 생산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중국이 반도체를 자급한다면, 그만큼 기존 업체들은 파이가 줄 수 밖에 없습니다.

미래지향성 산업으로 나아가는 반도체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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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반도체 업계는 이제 '무어의 법칙'을 벗어나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는데요.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기 위해 불가피한 몸집 줄이기에 나섰습니다. 시장 변화에 따라 돌파구를 찾기 위한 선택 중 하나인 거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인 인텔이 대표적입니다. 인텔은 내년까지 전체 인력의 11%인 1만2000명을 감원한다고 밝혔는데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사업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 대신 다른 미래지향성 산업에 주력한다는 방침입니다. 세계 1위 스마트폰 AP 제조사인 퀄컴도 작년부터 전체 인력의 15%를 감원 중에 있습니다. AP의 성능이 균일화된데다 대만 미디어텍, 중국 스프레드트럼 등 중저가 시장을 노린 업체들이 약진하며 시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도 마찬가지입니다. 3D 낸드플래시 경쟁력 확보에 고전하면서 영업손실이 점점 늘어난 것이죠. 이에 따라 마이크론도 대응책으로 구조조정 계획을 밝혔습니다.

이들이 새로 개척하려는 시장은 클라우드, IoT 등으로 대표됩니다. 과거 반도체의 수요처는 컴퓨터와 휴대폰이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 다양한 제품이 등장하면서 사용처는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들 기기엔 프로세서와 이미지센터(CIS), 모뎀칩, 커넥티비티칩, 위성항법장치(GPS)칩, 전력관리칩 등 다양한 반도체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들 기기는 커넥티비티칩을 통해 서로 연결되며 여기서 수집된 수많은 데이터는 클라우드 서버에 모여 빅데이터로 가공되죠. 인텔의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최고경영자(CEO)는 "PC 부문을 축소하고 AP 분야에서 철수하는 대신 클라우드와 IoT, 메모리, 프로그래머블 솔루션, 5G(5세대 이동 통신) 등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반도체 업계

Cj2QMvfWYAAHHRj.jpg▲ 인텔이 참석한 Computex 2016, 출처: Intel 공식 트위터

신 시장에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메모리, CPU, 통신칩 등으로 나뉘어 공존하던 업체들이 이제 클라우드, IoT로 대표되는 시장 선점을 위해 한꺼번에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인텔은 2010년 독일 인피니온 인수로 확보한 커넥티비티칩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폰용 모뎀칩을 개발해 애플 아이폰7에 공급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퀄컴이 독점으로 납품해오던 시장이죠. 인텔은 또 메모리 시장에도 진출합니다. 지난해 공개했던 3D 크로스포인트 메모리의 경우, 올해 말 양산에 돌입한다고 하는데요. 인텔은 올 하반기 중 주요 거래처를 중심으로 자체 생산한 서버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을 공급할 계획입니다. 건설중인 중국 대련공장에서는 3D 낸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과 경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다른 업체들은 어떤지 살펴볼까요? 퀄컴은 인텔이 시장의 99%를 지배하고 있는 아성인 서버칩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미래 전쟁터로 지목되는 클라우드 서비스의 핵심이죠. 삼성전자도 미국의 데이터센터용 서버시스템을 연구하는 스텔러스테크놀로지를 인수하는 등 서버칩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텔의 가장 큰 캐시카우인 중앙처리장치(CPU)는 GPU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컴퓨터의 두뇌 역할은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CPU가 맡아왔지만 빅데이터, 인공지능, 3차원(3D) 그래픽 등을 통해 정보량이 늘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GPU가 주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CPU업계 1위는 인텔, GPU 업계 1위는 엔비디아입니다. 양측은 이미 2009년 ‘CPU-GPU 전쟁(CPU-GPU debate)’을 벌였는데요. 2009년 인텔은 엔비디아가 인텔 CPU에 엔비디아 GPU를 통합한 칩셋을 통합해 출시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이라고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엔비디아는 2004년 두 회사가 맺은 크로스 라이선스 계약을 인텔이 무시하는 처사라며 맞소송에 나섰죠. 두 회사의 소송은 2011년 양측 합의로 종결됐지만, CPU와 GPU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소컷1.png▲ (좌) 인텔 제온파이 프로세서, 출처: Intel 공식 뉴스룸, (우) 엔비디아 드라이브PX2, 출처: NVIDIA 공식 뉴스룸

인텔은 최근 14일 병렬 처리 방식을 도입한 ‘제온파이’ 프로세서를 내놨습니다. 이 프로세서는 칩 하나에 64~70개 이상의 코어를 탑재해 GPU처럼 병렬처리 성능을 높인 제품입니다. 반면 엔비디아는 지난 1월 ‘드라이브PX2’ 시스템을 공개했습니다. 2개의 차세대 테그라(Tegra) 프로세서와 파스칼(Pascal) 아키텍처 기반 GPU 두 개를 탑재해 1초에 최대 24조 회에 달하는 작업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시스템입니다.

정부차원의 협조가 필요한 국내 반도체 산업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먼저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해서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장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신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최근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이 자동차용 반도체 분야에 보폭을 넓히고자 시동을 걸고 있는 점도 사업 구도 다각화를 위한 것이죠.

또한 정부 차원의 과감하고 적극적인 투자가 필요합니다.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도 등한시해서는 안 될 분야가 바로 반도체 산업입니다.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 반도체 그룹이 기술 개발에 노력을 박차를 가하고, 정부 차원에서도 지원이 지속해서 이루어 진다면 국내 반도체 산업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새로운 돌파구 마련에 힘쓰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반도체 업계의 역사는 이미 60년을 넘었습니다. 성숙기에 접어든 다른 산업처럼 성장률도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앞서 살펴봤듯이 반도체 업계는 몸집을 줄이며 강도 높은 체질개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 사업으로 눈을 돌리며 영역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차세대 기술개발에 속도를 내며 연구개발을 지속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노력 중입니다. SK하이닉스를 포함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를 바라겠습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김현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