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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석출(水落石出). 하천에 물이 빠져 돌이 모습을 드러내듯, 시간이 지난 뒤 사건의 진상이나 배후의 흑막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중국은 여전히 국가가 경제 및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기업도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과 그 실체가 다를 때가 많죠. 국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부풀려진 경우도 있지만, 복잡한 소유구조 등을 통해 실제 규모를 축소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여러 통신칩 설계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 중 하나로 알려진 다탕(大唐)전신은 규모와 역할이 축소된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제조업체) SMIC의 최대 주주이면서 중국 정부 산하의 국영기업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서는 칭화유니 이상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에서 중요한 기업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베일에 싸인 반도체 굴기의 중심

2.jpeg                          ▲다탕전신 로고 (출처: DATANG TELECOM TECHNOLOGY & INDUSTRY GROUP)

1998년 창업한 다탕전신은 중국 팹리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기업 중 하나입니다. 2003년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기술 및 재정 지원하에 3세대 이동통신(3G) 칩을 독자 개발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다탕전신의 모회사인 다탕그룹은 전자업뿐 아니라 발전, 전력인프라,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 발을 들이고 있는 국영기업입니다. 한국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원 소속 기관인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가 경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다탕그룹 및 주요 자회사의 최고경영자 선임, 주요 투자는 모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의 결정을 거칩니다.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가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다탕전신은 여기의 손자회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같은 배경은 2008년 SMIC의 최대 주주가 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당시 SMIC는 설비 증설을 위한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설립 초기에 아직 많은 고객을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파운드리 라인을 채울 주문을 추가로 수주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다탕전신은 SMIC에 필요한 자본을 댈 수 있는 것은 물론 자신이 개발한 통신칩 생산을 SMIC렌신커지에 의뢰했습니다. SMIC 입장에서는 투자자와 고객을 한번에 유치한 것입니다.

다탕전신은 자체 반도체 설계 이외에 여러 팹리스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중 비교적 많이 알려진 업체가 렌신과기입니다. 다탕전신이 상대적으로 통신 관련 칩에 주력하는 사이 렌신과기는 백색가전 등에서 필요한 각종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반도체 독립을 위한 중국 정부의 의지가 다탕전신을 통해 체계적으로 구현되고 있다고 분석되는 대목입니다. ‘대륙의 기적’으로 불리는 전자업체 샤오미도 렌신과기와 전략적 제휴를 통해 각종 시스템 반도체를 공급받았습니다. 최근에는 1억 위안을 들여 렌신커지의 각종 특허를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미국 통신업체 퀄컴과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다탕전신과 퀄컴의 주력 분야가 통신칩인 점을 감안하면 링셩과기라는 이름의 이 합작회사 역시 통신칩 개발에 주력할 전망입니다. 퀄컴이 굳이 기술격차가 큰 다탕전신과 합작회사를 차린 이유는 중국 시장 진출에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물론 작년 하반기부터 미중 무역전쟁이 달아오르면서 합작회사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차 드러나는 다탕전신의 흑막(黑幕)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다탕전신은 그러나 최근 여러 어려움을 맞고 있습니다. 주력 분야인 통신칩에서 화웨이, ZTE 등에 뒤지고 있어서입니다. 이렇다 할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서 지난해에는 베이징에 있는 연구개발센터 빌딩을 13억5000만 위안(약 2300억 원)에 매각하기도 했습니다.

칭화유니와의 경쟁도 부담스럽습니다. 두 곳 다 중국 정부가 지원하고 있지만 다탕전신은 기술개발이나 인수합병 등 여러 방면에서 칭화유니에 미치지 못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칭화유니는 SMIC의 지분을 점차 늘리고 있어 다탕전신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중국 내에서는 “통신칩이 경쟁력을 잃은 다탕전신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다양한 첨단 기술로 영역을 확장하는 칭화유니가 SMIC를 가져가는 것이 시너지가 크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중국에서는 정부가 특정 업종의 여러 기업을 동시에 지원해 경쟁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 투자의 비효율성을 업체 간 경쟁을 통해 상쇄하기 위해서인데요. 이같은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은 세계적인 기술력을 가진 회사로 떠오르지만 패배한 기업은 그대로 사라집니다. 수락석출은 경쟁 과정에서 실력의 밑천이 드러나고 있는 다탕전신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사자성어이기도 합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노경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