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이 된다. 바쁜 일상이 고될 때 추억을 꺼내 다시 힘을 얻기도 한다. 때론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띵작은 회로를 타고’ 시리즈를 통해 ‘추억의 명곡’과 함께 SK하이닉스의 ‘그 시절 그 반도체’를 함께 추억해보자.
아날로그의 시대 2008년, 복고 열풍 불러일으킨 추억의 명곡은?
추억의 명곡을 찾아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12년 전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는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이 들어 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스마트폰 1세대인 아이폰 3G가 출시됐지만 아직 한국에는 보급되지 않았던 때다. 사람들의 손에는 MP3 혹은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가 들려 있고, 이어폰에는 당연히 기기와 연결할 수 있는 선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은 상상 속에나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이어폰에서는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을까? 2008년 가요계는 변화의 흐름 한가운데 있었다. 바이브레이션을 강조하는 ‘소몰이 창법’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발라드 가수들의 자리를 아이돌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 ‘Tell me 신드롬’을 일으켰던 원더걸스, 다섯 명의 동방신기, 지금은 볼 수 없는 완전체 소녀시대, 누나들의 심장을 저격한 샤이니, 혜성처럼 등장한 2PM이 그 시절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 The Wonder Years - Trilogy 앨범 (출처 - 개인소장)
당시 히트곡들은 대부분 쉬운 멜로디에 특정 가사가 반복되는 ‘후크송’이었다. 짧고 중독성 있는 후렴구로 귀를 사로잡고 남녀노소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해 인기를 끈 것.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기를 얻은 곡이 원더걸스의 ‘Nobody’다.
Nobody는 원더걸스 싱글 3집 ‘The Wonder Years – Trilogy’ 수록곡으로, 한 남자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I want nobody nobody but you”라는 반복되는 가사에 담은 댄스곡이다. 1960년대풍 드레스와 헤어, 스탠딩 마이크를 활용한 콘셉트로 복고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따라 하기 쉬운 총알춤으로 전국에 춤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Nobody는 주요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 각종 디지털 음원 사이트 1위를 기록했으며, 당연하게도 그 해 각종 시상식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을 이끈 터닝포인트가 됐다.
추억의 명곡 ‘Nobody’가 SK하이닉스의 전투식량이 된 사연은?
Nobody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국민송’이었지만, SK하이닉스에서 D램 설계 업무를 수행하는 김동균 담당에게는 색다른 의미를 가진다. Nobody가 인기를 끌던 시절 김 담당이 반도체 신제품을 개발할 때 이 곡이 사기를 북돋아준 ‘전투식량’ 역할을 했기 때문. 원더걸스의 선율이 어쩌다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회로까지 흘러 들어갔을까? 그 사연의 해답을 듣기 위해 김동균 담당을 찾았다.
2008년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엘피다, 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 4사 체제 시절로 기업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SK하이닉스는 엘피다, 마이크론 등 기업과 D램 시장에서 치열한 2위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확고한 2등이 되기 위해선 ‘비장의 무기’가 필요했다. 당시 SK하이닉스의 최신 D램 제품은 44나노급 2Gb DDR3로, 이를 뛰어넘는 고용량(High Density) D램을 기한에 맞춰 개발해야만 시장의 주류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것.
이를 위해 SK하이닉스는 고용량 D램 개발 프로젝트 TF를 구성하고, 신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994년에 입사해 D램 개발사업본부 설계2팀에서 근무했던 김동균 담당이 있었다. 그는 당시 프로젝트팀에서 제너레이터(Generator) 회로 설계를 맡아 외부 파워를 칩 내부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프로젝트가 미국 산호세 법인에서 진행됨에 따라 2008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 개발자들과 협업하며 일했다.
김동균 담당은 전혀 다른 문화권의 나라에서 가족과도 떨어진 채, 주어진 개발 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낮을 잊고 일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런 그에게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게 힘을 준 노래가 바로 ‘Nobody’였던 것. 당시 원더걸스는 한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미국에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고된 업무에 지친 김동균 담당에게 머나먼 타국에서 들려온 고향의 노래가 버팀목이 돼주었다.
“그 시절 Nobody는 ‘노동요’이자, 에너지를 채워준 ‘전투식량’ 같은 존재였습니다. 설계 엔지니어는 자신이 맡은 파트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막중한 부담감으로 힘들 때가 있죠. 더욱 힘들고 외로웠던 건 타지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Nobody를 들으며 조깅을 했는데, 그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죠. 노동요를 들으며 업무를 할 때는 Nobody 가사처럼 ‘너밖에 없다 - I want nobody nobody but YOU(30나노급 4Gb D램)’는 생각으로 제품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덕분에 외롭고 고된 싸움을 이겨내고 D램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죠”
세계 최초 30나노급 4Gb D램 탄생, SK하이닉스의 터닝포인트가 되다
이때 탄생한 제품이 바로 2010년 12월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한 30나노급 4Gb D램이다. 이전 세대 제품인 40나노급 2Gb D램과 달리, 기존 반도체 레이아웃 디자인 기술인 8F2(38nm)보다 더 작은 면적으로 셀을 구현한 6F2(35nm) 기술이 적용됐다. 또한, 2Gb에서 4Gb로 칩 용량이 2배 증가함에 따라 제품의 리프레쉬(refresh) 특성 등 품질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제어 기술이 적용됐다. 아울러 시장의 요구에 맞춰 동작 스피드 증가 및 소모 전력을 감소시키는 여러 기술들이 탑재됐다. 이런 성능 개선을 바탕으로 당시 프리미엄 제품으로 시장에 우뚝 섰다.
▲ 30나노급 4Gb D램
30나노급 4Gb D램은 그 당시 서버용 메모리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많은 데이터센터에 탑재됐다. 데이터센터는 컴퓨터 시스템과 통신장비, 저장장치인 스토리지 등이 설치된 시설로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데, 파워를 감당할 수 있는 고용량 메모리가 필요했다. 이 제품의 동작 전압은 1.25V로 당시 최저 수준이었고, 이를 통해 전력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데이터 처리 속도도 빨랐다. 이전 세대의 D램의 데이터 처리 속도는 1333Mbps이었는데 이 제품은 최대 2133Mbps까지 기록했다. 이는 이전 세대보다 60% 이상 빠른 속도였으며, 700MB의 데이터를 3초에 처리할 수 있었다.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아야 하는 데이터센터에 꼭 필요한 제품이었던 것. 다음 세대 제품인 20나노 4Gb DDR3가 출시되고서도 약 4년 동안 양산을 이어왔다.
이 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SK하이닉스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물론 그 효율성을 인정받아 서버 메모리 시장의 강자로 올라섰다. 그 시절 SK하이닉스는 일반 PC와 같은 클라이언트 시장에 주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에선 서버용 메모리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4Gb D램을 개발을 함으로써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서버용 메모리를 확대하는 씨앗이 됐다. SK하이닉스는 이때 확보한 고객사의 신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반도체 시장 Top Tier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제품을 직접 개발한 김동균 담당에게 30나노급 4Gb D램은 어떤 의미일까?
“30나노급 4Gb D램은 새로운 시도에 대한 자신감을 탑재해준 제품입니다. 본사와 다른 환경에서 프로젝트를 개시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과 혁신적인 개발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설계에서 새로운 기술력을 확보해야 했죠. 이로 인해 프로젝트 초반에는 본사와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본사에서는 설계 변화가 더 좋은 퍼포먼스를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우리 구성원들에게 ‘늘 새로운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SK하이닉스가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