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은 이제 기업을 넘어 국가의 전략과 실행력을 시험하는 단계에 들었습니다. 이번 [시선:時] 시리즈에서는 기술 · 금융 · 정책 · 인프라 · 생태계 · 글로벌 · 환경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대한민국이 AI 시대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조건과 선택이 필요한지 각 전문가의 시선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첨단산업 환경 속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방향과 가능성을 함께 짚어봅니다.
<시리즈 순서>
① AI 반도체 국가 대항전, 피지컬 AI 주도권을 향한 총력전에 돌입하다
② AI 강대국으로의 전환점, 투자를 위한 법제 정비가 필요한 순간 – 최승재 교수
③ AI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 자본과 에너지 인프라
④ AI 반도체에서 AI 서비스까지, 생태계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떠오르다
⑥ 소버린 AI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르는 대한민국의 미래
파괴적 혁신을 몰고 오는 AI
기술 혁신에는 ‘점진적 혁신’과 ‘파괴적 혁신’이 있다. 점진적 혁신이 기존의 질서와 시스템을 유지한 채 성능과 효율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파괴적 혁신은 산업의 판 자체를 다시 짜는 변화다. 산업 주도권은 대체로 이러한 파괴적 혁신의 국면에서 이동해 왔다.

▲ 우리나라는 디지털 전환에 성공하며, 수많은 성과를 이뤄냈다.
2000년대 초반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되던 시기, 우리 기업들은 파괴적 혁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사활을 건 전략적 투자를 단행한 결과, 10년 뒤 우리 기업들은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섰다. 당시의 성취는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결과가 아니라, 파괴적 혁신의 방향을 읽고 제한된 자원을 집중한 전략의 승리였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인공지능(AI)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AI 시대에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 파괴적 혁신 현장에서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할 것 등을 판단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지만, 제한된 자원을 집중해서 국가 전략을 수립한다면, AI가 촉발한 파괴적 혁신의 현장에서 글로벌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AI 반도체 시대, 투자의 스케일이 바뀌다
AI 시대가 도래하며,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학습하고 처리하기 위한 고성능 하드웨어, 즉 AI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칩 워(CHIP WAR)>의 저자이자 국제사 전문가인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제 반도체는 국가 간의 전략경제안보를 위한 물자라는 점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반도체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대한민국이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축적해 온 분야라는 사실이다. 결국, 대한민국이 글로벌 AI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잘하는 반도체 분야에 전략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정부와 반도체 업계는 이러한 판단 아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책 지원과 함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간과하기 어려운 변화도 있다. 반도체 산업의 투자 규모 자체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 수조 원 수준이었던 공장 설립 비용은 이제 수십조 원 단위로 확대되며, 산업 전반의 투자 구조와 리스크 관리 방식에도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비용 급증의 배경에는 구조적인 변화가 있다. 우선 공정 복잡성이 크게 증가했다. 미세화가 진행되면서 마스크 레이어 수와 제조 단계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공정 시간과 관리 비용 역시 함께 상승했다. 여기에 더해 EUV* 노광 장비와 같은 핵심 설비는 대당 수억 달러에 달하며, 가격뿐 아니라 제한된 생산 물량으로 인해 안정적인 확보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 EUV(Extreme Ultraviolet): 짧은 파장의 빛(극자외선)을 이용하는 리소그래피 기술. 웨이퍼에 회로 패턴을 새기는 장비에 사용

▲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EUV 노광 장비(출처: ASML)
또한 대규모 클린룸 구축과 전력 · 가스 · 용수 등 고도화된 유틸리티 시스템 설계가 필수 요소가 되면서, 공장 건설 전반의 비용 부담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러한 구조적 비용 상승은 반도체 산업의 하방 사이클 국면에서 기업의 재무적 위험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도체와 같은 첨단 산업은 대체로 초기 단계에서 거액의 투자가 필요하고, 수익은 장기간에 걸쳐 회수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처럼 투자 회수 기간이 긴 산업에서는 투자 타이밍이 늦거나 방향이 어긋날 경우 회복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때문에 적시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AI 반도체 산업을 단순히 기업의 역량에 맡기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의 과제라 생각하고 지원과 투자,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성공은 특정 기업의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위해 국가적인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제도적인 뒷받침이다. 제도는 기업으로 하여금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는 근간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를 집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 환경 변화에 맞춰 관련 법제를 정비하고 지원 정책을 집행해 반도체 산업 성장을 통한 사회적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넘어, 그 선택을 뒷받침할 ‘지속가능한 투자와 실행 기반’의 치밀한 설계에 달려있다.
AI 반도체 산업을 위한 자금조달 수단 마련할 때
반도체 산업은 무엇보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한 번 기술 격차가 벌어지면 이를 따라잡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과거 글로벌 IT 생태계를 주도하던 기업이 투자 판단과 전략 전환의 실패로 경쟁력을 상실한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을 활용해 자금 조달의 용이성을 높이는 것이다. 특히,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반도체 회사가 스스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 미국은 칩스법 등의 입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육성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미 미국은 AI 시대,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반도체 산업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설정했다. 정권과 관계없이 초당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의 법안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반도체 산업을 비롯한 첨단 산업에 막대한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 「반도체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미국 정부가 반도체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제정한 법으로, 반도체 제조 시설 투자에 대한 보조금, 세제 혜택, 연구 개발(R&D) 지원 등을 포함한다.
* 「인플레이션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 미국의 기후·산업 정책 법안으로,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 제조업과 청정에너지 산업에 대한 세액 공제 및 재정 지원을 통해 전략 산업의 자국 내 생산을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나라 역시 AI 시대 선도를 위한 반도체 산업 관련 법제정비를 더욱 가속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 육성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자금 소요를 고려할 때, 산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기업이 GP*가 되고, 외부 투자자들이 LP*로 참여하는 구조를 제도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은행 중심의 전통적 금융 구조가 갖는 한계를 보완하면서, 시스템 리스크를 최소화해 대규모 자금을 산업 현장으로 유입시키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 GP(General Partner, 업무집행파트너): 펀드의 투자 전략 수립과 운용을 책임지는 주체로, 투자 대상 선정과 집행, 회수 전반을 담당
* LP(Limited Partner, 유한책임출자자): 펀드에 자금을 출자하되, 운용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출자금 한도 내에서 책임을 지는 투자자
게다가, 반도체 산업과 같이 ‘업턴’과 ‘다운턴’의 사이클이 큰 경우, 이러한 대안이 더욱 큰 도움이 된다. ‘슈퍼사이클’이라 불릴 정도로 상황이 좋은 지금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다운턴 상황이 오면, 재정 구조에 부담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제도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반도체특별법*」이나 「국가첨단전략산업육성법*」의 제·개정을 통해, AI·반도체 등 국가 핵심 전략산업 영역에서 민관 협력형 투자 구조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해외 대형 기술 프로젝트에 투자해 온 비전펀드* 사례 역시 참고할 수 있다. 또한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증손회사 100% 지분 규정과 같은 제도 역시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금 바라볼 필요가 있다.
*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안」: 반도체 산업의 연구개발, 인력 양성, 투자 촉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법안
*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 반도체, 이차전지 등 국가 전략산업을 지정해 규제 완화와 재정·행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 비전펀드(Vision Fund):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이 2017년에 설립한 대규모 기술 투자 펀드로, 약 1,000억 달러(약 100조 원) 이상 자금을 운용하며, AI, 반도체, 인터넷 · 플랫폼 등 첨단 기술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세계 최대급 벤처캐피털형 투자 펀드다. 대표적으로 ARM, 우버(Uber), 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술 기업에 전략적 투자를 진행해 왔다.
AI가 촉발한 파괴적 혁신의 시대에 국가 경쟁력은 선언을 넘어 구체적인 실행으로 완성된다. 기술의 방향을 읽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자원과 제도를 집중하는 전략적 선택만이 미래를 만든다. 반도체 경쟁력 없는 AI 산업 경쟁력은 존재할 수 없으며, 오늘의 생존 전략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미래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의적절한 결단과 그 결단을 지속 가능한 투자와 제도로 뒷받침하는 실행력이다.

※ 본 칼럼은 AI/반도체 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