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뉴스룸 기사

‘원더우먼 1984’로 읽는 80년대 IT

Written by 자그니 칼럼니스트 | 2021. 2. 5 오전 5:00:00

 

스포일러 있습니다

‘잼을 넓게 바르면 바를수록 더 얇게 발라진다(The wider you spread jam, the thinner jam gets)’

‘컨설팅의 비밀’의 저자 제럴드 와인버그가 만들어낸 ‘딸기잼의 법칙’이다. 상충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러 업무를 경험해본 ’이나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디자인’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종종 이런 모순된 욕망을 품는다. 


▲ 스승 안티오페와 어린 다이애나의 모습(사진제공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원더우먼 1984’ 오프닝에서, 어린 다이애나(릴리 아스펠 분)가 편법을 써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마음도 이와 비슷하다. 실수하긴 했지만, 아마존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그를 편법으로 이끈다. 하지만, 엄격한 스승이었던 안티오페(로빈 라이트 분)는 그런 잘못된 욕망을 곧바로 간파하고, 억울해하는 어린 다이애나에게 일갈을 날린다.

“No true hero is born from lies”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을 리 없다. 영화 원더우먼 1984는, 그렇게 핵심 주제를 처음부터 강조하며 시작한다. 

‘워크맨’이 유행하던 1984년,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사진제공: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4년이 됐다. 그사이 원더우먼은 인간 세상에 나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평소에는 박물관 직원으로 일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시민의 영웅으로 활약하며, 위기에 빠진 시민을 돕고 나쁜 일을 하려는 악당을 퇴치한다. 슈퍼 히어로가 하는 일은 항상 비슷하다. 친절한 자경단 또는 민간 경비다.

하는 일은 2021년의 슈퍼 히어로와 다르지 않은데, 배경은 다르다. 1984년에는 누구도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않다. 걸으면서 전화하는 사람도 없다. 새로운 소식을 접하기 위해서는 TV나 신문을 봐야만 한다. 당연히, 마스크를 쓴 사람도 없다. 

영화 초반 원더우먼이 위기에서 구해낸, 조깅 중이던 여성은 귀에 유선 헤드폰을 끼고 있다. 사용 중인 기기는 당시 큰 인기를 끈 최초의 휴대용 오디오 플레이어 ‘워크맨’이다. 1979년에 처음 출시된 이 제품은 우리 삶에 3가지 영향을 끼쳤다. 하나, 걸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둘, 혼자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셋, 녹음 매체로 주로 쓰이던 카세트테이프를 음악 감상 매체로 쓰게 됐다. 요약하면, 워크맨은 개인주의를 처음 실현한 전자기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레코딩(Digital Recording) 기술과 반도체 기술 발달이 가져온 변화다. 

이처럼 기술이 발달하면 발상의 전환도 가능해진다. 이제는 노래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버에 저장된 디지털 파일을 실시간으로 개인 기기로 옮겨와 스트리밍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미리 저장해놓은 음악만 들을 수 있는 ‘카세트’도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SK하이닉스의 소비자용 SSD ‘Gold P31’, ‘Gold S31'

이제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웹에서 원하는 음악을 검색해 바로 들어볼 수 있고, 누군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바로 재생할 수도 있다. 음악을 담는 저장매체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10여 곡만 겨우 저장할 수 있었던 카세트테이프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CD와 MP3의 시대를 지나, 지금 우리는 테라바이트(TB) 단위까지 저장이 가능한 SSD(Solid State Drive)와 같은 반도체 계열 저장 매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관련 기사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음악 매체의 시대, 반도체가 음악을 담는다’)

‘테트리스가 처음 등장한 해’ 1984년, 컴퓨터의 모습은 어떨까?

1984년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기기가 ‘워크맨’만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는 디지털 게임과 개인용 컴퓨터, 카세트테이프와 비디오테이프 같은 자기 매체, 컬러 TV 등이 세상을 사로잡았던 시대다. 일례로 원더우먼이 도둑질하려던 악당을 잡은 쇼핑몰 안에 있는 오락실을 들 수 있다. 

1984년은 전자오락이 붐을 이뤘다가 꺼져가던 시기로, 오락실은 지금의 PC방 같은 공간이었다. 오락실은 1985년에 개봉한 영화 ‘구니스’ 오프닝에도 등장한다. 게임 프로그래머가 주인공인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밴더 스내치’의 배경도 1984년이다. 

당시엔 게임 소프트웨어 하나가 기판 하나였다. 주로 쓰인 CPU는 속도가 3.54MHz인 Z80. 그때보다 1,000배 이상 빠른 약 3.8GHz에 달하는 지금의 CPU 속도와 비교하면 성능 수준은 보잘것없지만, 그 시절 오락기는 하나하나 그 게임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컴퓨터였던 셈이다. 


▲사진제공: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범용 컴퓨터는 없었을까?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회사 사무실, 나중에 ‘치타’라는 이름의 적이 되는 박물관 동료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 분)의 사무실, 사이먼 스 (올리버 코튼 분)의 사무실 등 영화 속 곳곳에서 익숙한 듯 낯선 형태의 컴퓨터를 찾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바바라 미네르바의 사무실에 놓인 컴퓨터는 지금은 아는 사람이 드문 ‘코모도어 PET’ 기종이다. 1980년에 출시된 컴퓨터로, CPU는 1MHz 속도를 가진 MOS 6502를 사용한다. 메모리는 32KB다. 화면에 보이는 건 당시 쓰이던 PC 통신 게시판(BBS)으로 짐작된다.

사이먼 스 의 사무실에 놓인 컴퓨터는 같은 PET 시리즈이긴 하지만, 1977년에 출시된 코모도어 PET 2001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PC라고 볼 수 있다. 옆에 놓인 휴대용 컴퓨터는 TRS-80 모델 100이란 제품으로, 1983년에 출시된 컴퓨터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신 컴퓨터인 셈. Oki 80C85 CPU를 써서, 처리 속도가 2.46MHz 정도로 당시 일반적인 컴퓨터 대비 훨씬 빨랐다. 계산기처럼 보이지만, 출시 가격은 1,099달러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821달러(약 312만 원)에 달한다. 

램이 1GB(=104만 8,576KB)이고, 프로세서 속도가 1.4GHz(=1,434MHz)인 ‘카카오 미니 AI 스피커’가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2만 5,000원 정도에 거래되는 것과 비교하면, 지난 40년간 IT 기기의 가격은 정말 미친 듯이 싸졌다.

소원을 이뤄주는 돌(드림스톤)로 세계를 핵전쟁 위기에 빠트리게 되는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 분)의 사무실에 놓인 PC는 1981년 IBM에서 출시한 개인용 컴퓨터다. 실제로 모델명이 ‘IBM Personal Computer’였던 이 제품은 1983년에만 75만 대 이상이 판매되며, 사무용 컴퓨터 시장을 말 그대로 쓸어 담았다. CPU는 4.77 MHz 속도를 가진 인텔 8080이고, 2개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가 장착됐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니터 화면의 색상은 대부분 화이트 계열이고 맥스 로드가 전 세계 방송을 해킹한 이후에는 컬러 화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적 허용이다. 당시 주로 쓰이던 모니터는 그린 컬러 단색 모니터였고, 당연히 컬러 화면은 절대 구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못난이 컴퓨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컴퓨터의 위상은 지금보다 예전이 더 높았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흔하게 볼 수 없었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마법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실제로 저 컴퓨터로도 할 건 다 했다. PC 통신이나 채팅을 할 수 있었고,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엑셀 같은 계산 프로그램도 많이 사용했다. 데이터베이스 작업이나 프로그래밍도 할 수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추가 부품을 장착하면 음악 작업을 하거나 컬러 그래픽도 볼 수 있었다. 컴퓨터의 쓰임새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기술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기술 자체가 세상을 바꾸지는 않는다. 기술이 발전하면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고, 생각이 바뀌면 세상에 영향을 끼칠 무언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욕망에 충실하되, 속임수를 쓰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의 메인 빌런(Villain, 악역)인 맥스 로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이 남의 소원을 이뤄주는 대신 그 사람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알게 되자마자 미 대통령을 만난 그는 원하는 핵무기를 주고, 대신 대통령이 가진 영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미국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프로젝트 하나를 알게 된다. 인공위성을 이용해 전 세계 방송을 해킹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의 목표. 이후 그는 이 시스템을 이용해 세계를 상대로 자신의 능력을 써먹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사진제공: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마침내 원더우먼 1984의 최종 국면, 맥스 로드는 해킹한 TV를 통해 감언이설을 쏟아내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왕이 되고 싶어? 만들어 줄게. 저 나라가 망했으면 좋겠어? 망하게 해줄게.”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노력 없이 쉽게 충족되는 잘못된 욕망이 낳은 결과는? 대혼란이다. 세계는 정말 멸망 직전까지 무너졌다. 

이에 맞서 원더우먼은 “당신은 오직 진실만 가질 수 있으며,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때 ‘진실’이란 우리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원하고 꿈꾸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책임한 욕망이 아니라, 가능한 기술적 영역 안에서 정말 원하는 것 하나를 찾아 스스로 이뤄가는 힘이다. 

원더우먼 1984의 쇼핑몰 오프닝 씬에서는 에어로빅 시연을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1982년에 발매된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이라는 에어로빅 비디오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미국 사회에 에어로빅이 일상이 된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사실 제인 폰다는 자신이 레오타드를 입고 운동하는 모습을 불특정 다수가 매일 아침 보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많은 여성이 운동하길 원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래서 ‘누가 이런 걸 보겠어?’라고 생각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담아 비디오를 촬영했다. 또한, 대역을 쓰기보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에 에어로빅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다. 편하게 전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휴대폰을 만들어냈다. 아무 데서나 인터넷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스마트폰을 만들어 냈다. 단,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을 만든 그 누구도 이런 기술을 쉽게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술 발전을 위해 매일을 충실하게 보냈다. 이처럼 자신의 진짜 욕망에 충실하되 하나씩 자기 손으로 이뤄가는 것, 이것 하나면 세상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