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오는 아침, 한 남자가 외딴 통나무 집에서 눈을 뜬다. 부엌에 내려오니 5년간 같이 지낸 한 남자가 요리를 하고 있다. 5년간 같이 살았지만,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다. 오늘도 외면하려는 데, 요리하는 남자가 말을 건다. 크리스마스인데, 아무 말이나 해보자고. 그때부터 두 남자의 입에서 풀려 나오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야기.
영국의 채널4에서 방영되는 SF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2의 마지막 단편이자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방영된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야기입니다. <블랙 미러>라는 제목처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타날 지도 모를, 조금 우울한 미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요. 그 중에서 특히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꼭 추천하고 싶은 에피소드입니다. 어쩌면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충분히 실현 가능한,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하나. 내 눈에 삽입된 카메라, 제드 아이로 보는 혼합 현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제드 아이’라는 기기를 이식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제드 아이는 카메라이자 디스플레이 장치로, 이 기기 덕분에 여기서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필요한 작업이 있으면 단추 모양의 작은 컨트롤러를 손에 쥐면 그만입니다.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떠오르고, 그 중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찍고 싶나요? 카메라를 선택하고, 그 사람을 바라보며 버튼을 누르세요. 내가 보는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중계할 수도 있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차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마이크로소프트에서는 혼합 현실(Mixed Reality)이라 부르고, 인텔에서는 융합 현실(Merged Reality)이라 부릅니다. 마치 눈뜨고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과 가상이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져 보이는 거죠.
▲ 내가 사는 세계에서 타인을 블락할 수 있는 제드아이(출처: 블랙미러 공식 홈페이지)
제드 아이의 다른 장점은 우리가 보는 이미지와 소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가 꼴 보기 싫으세요? 안면 인식 기술이 적용되었기에 버튼 한 번만 누르면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그 사람이 내는 소리도 잡음으로 변합니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 누군가를 지워버리고,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내가 지워질 수 있는 거죠.
이런 기술이 진짜로 등장할까요? 관련 기술 연구는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도체와 세포막을 결합한 생체 반도체 기술이나 반도체와 신경 세포를 결합한 뉴로칩(Neurochip)은 이미 선보였습니다. 구글 자회사 베릴리에서는 인간 눈의 수정체를 교체해 여러 능력을 부여하는, 전자 부품이 담긴 인공 수정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소니는 영상 촬영이 가능한 스마트 콘택트 렌즈 특허를 이미 출원했고, 매직리프는 눈에 직접 영상을 보여주는 콘택트 렌즈 디스플레이 기술 특허를 냈습니다. 막연한 상상은 아닌 셈입니다.
둘. 나와 꼭닮은 인격을 지닌 인공 지능, 쿠키의 탄생
▲ 카피된 쿠키(출처: 블랙미러 공식 홈페이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중요한 다른 기술은, 바로 한 사람을 카피한 인공 지능 ‘쿠키’입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비서를 가지고 싶은 꿈, 다들 있지 않나요?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지금, 나 대신 내 맘에 쏙 들게 잡다한 일을 대신 처리해줄 사람을 한번쯤 상상해 봤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나를 오랫동안 관찰했다는 것! 나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요. 쿠키는 이쯤에서 등장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기록하기 위해 사용되는 파일 이름이지만, 미래엔 내 안에 설치해 내 생각을 그대로 카피하는 인공 지능의 이름으로 변할 것입니다.
▲ 본인이 쿠키임을 인정하고 일을 하기 시작한 인공지능(출처: 블랙미러 공식 홈페이지)
앞서 등장한 요리하는 남자의 진짜 직업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쿠키를 사용하기 위해선 먼저 인간의 몸에 설치해 주인의 생각을 카피해야만 합니다. 카피된 쿠키를 수술을 통해 뽑아낸 후에 스마트홈 허브에 설치해 사용하는 거죠. 문제는 카피된 인격이, 처음엔 자신이 카피된 인공 지능이란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질 않으니 당연히 일도 하지 않죠.
인공 지능을 설득 또는 굴복하게 하는 일을 이 남자가 합니다. 남을 코치하거나 설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인격이 카피된 인공 지능 역시 업무 범위에 포함되는 것이죠. 물론 인공 지능을 사람처럼 대하지는 않습니다. 보다 보면 조금 섬뜩합니다.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격입니다. 그것을 길들이는 과정은 다른 이가 우리를 길들이는 과정으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인격을 전송한다’는 개념은 SF 영화나 만화에 지겹도록 많이 나왔으니, 쿠키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겁니다. ‘정신 전송’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데, 주로 불로장생을 꿈꾸는 악당들이 몸을 옮겨 다니면서 쓰는 방법으로 많이 나오죠. <공각 기동대>에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기술이 인간과 일체화된, 미래 인간을 지칭하는 ‘트랜스 휴먼’을 다룰 때도 자주 등장합니다.
실제로 트랜스 휴먼을 추진하고, 정신 전송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2007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주최한 워크숍에 모인 이들은 인간의 뇌를 호환하기 위해 두뇌 지도를 그리자는 로드맵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2013년엔 백악관에서 뇌 지도 연구 프로젝트 실시를 발표했으며, 작년엔 실제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자세한 뇌 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도를 이용해 자폐나 알츠하이머 등 여러 뇌 질환 치료의 가능성을 보게 된 것도 큰 성과 중 하나입니다.
▲ 미래 기술을 상상할 수 있었던 영드 블랙미러 (출처: 블랙미러 공식 홈페이지)
자, 이쯤에서 마지막 상상이 펼쳐집니다. 우리 눈에 카메라 센서와 디스플레이를 내장하는 것, 정신을 카피하는 것 모두 트랜스 휴먼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일단 장착된 것은 쓰이게 되고, 어느새 당연하게 받아들여 집니다. 우리가 전기와 상하수도 등을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 제드 아이와 쿠키가 일상화된, 인간이 반도체를 탑재하고 반도체 기술로 이뤄진 것들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요? 어쩌면 미래에 우리가 보게될 거리 풍경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드라마를 보면 그런 상상력이 어떻게 발휘되는 지 볼 수 있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이기도 하고요. 이런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오늘 밤 자기 전에 한번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여기서 제 상상을 풀어놓는 것은 읽는 분들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 테니, 꾹 참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만나요!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