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시바가 지난달 24일 주주총회를 열고 반도체 자회사인 도시바메모리를 SK하이닉스가 참여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매각하는 안을 승인했습니다. 이로써 세기의 인수전이라는 불렸던 ‘도시바메모리 빅딜’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는데요. 한때 ‘낸드 종가’, ‘반도체 명가’로 불렸던 도시바가 메모리사업 매각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도시바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부터 ‘도시바메모리 빅딜’을 처음부터 끝까지 되새겨보려 합니다.
▲ 도시바 요카이치 낸드플래시 생산공장 팹2 전경/도시바 플래시메모리 (출처: TOSHIBA)
1875년 설립된 다나카(田中) 제작소를 모태로 한 도시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전제품 붐에 힘입어 급성장하면서 글로벌 IT기업으로 부상한 기업입니다. 하지만 연이은 회계부정과 미국 원전사업 손실로 인해 주력사업 가운데 하나인 반도체 사업을 매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계 바늘을 2년 전인 2015년으로 돌려 봅니다. 그해 2월12일 일본증권거래감시위원회는 도시바 내부고발자의 제보를 토대로 회사 측에 인프라 사업 관련 회계자료 제출을 요구합니다. 원가를 낮춰 이익을 부풀린 분식혐의가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른바 ‘도시바 스캔들’로 불리는 분식회계 사건의 시작입니다.
도시바는 안일한 대응으로 화를 키웁니다. 자체적으로 ‘특별조사위원회’라는 내부 조사팀을 꾸리고는 인프라 사업 쪽에서 회계 처리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며 얼버무린 겁니다.
주주를 비롯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도시바는 결국 석 달이 지나서야 5월8일 변호사와 회계사 등 외부인으로 구성된 ‘제3자위원회’를 발족합니다. 어이없는 사실은 도시바가 제3자위원회가 꾸려진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인프라 관련 사업에서 원가총액이 과도하게 축소됐다”며, 분석혐의를 인정했다는 겁니다.
며칠 뒤에는 전력· 사회 인프라 등의 사업에서 모두 9건의 회계오류를 발견했다며 회계상 잘못 처리된 금액은 모두 500억 엔 정도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짓말로 드러납니다.
두달 뒤인 7월21일, 제3자위원회는 도시바의 자진고백 액수보다 3배나 많은 1518억 엔(1조5300억원)의 이익이 7년간 부풀려져 있다고 발표하면서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집니다.
도시바가 자체적으로 조사해 적발해 낸 오류까지 합치면 과대 계상된 이익은 1562억 엔(1조5700억 원)에 달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분식회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제3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우에다 코이치(上田廣一) 변호사는 “경영진이 관여해 그룹 조직 차원에서 부적절한 회계 처리가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혁신의 아이콘’이라던 명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부패기업’으로 낙인 찍힌 도시바는 다나카 히사오(田中 久雄) 사장 등 경영진 8명이 사임한 뒤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직원 1만4000명을 솎아내는가 하면, 에너지와 사회인프라스트럭처, 반도체 3개 분야를 핵심 수익사업으로 설정한 뒤 나머지 사업들을 하나씩 정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의료기기는 일본 캐논에, 백색가전은 중국 업체 주도의 합작회사에 넘어갑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16년 3월, 다시 한 번 회계부정 사건이 터지면서 도시바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이번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도시바의 원전사업부 손실 은폐 의혹에 대한 조사를 시작합니다.
결국 도시바는 올 1월 미국 원전사업으로 7000억 엔(약 7조1620억 원)의 손실 입었다고 발표하고, 시가 시게노리 회장이 사임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도시바에게는 선택권이 많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돈이 되는 사업인 반도체사업부를 파는 것 외에 돈을 마련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독자생존이 여의치 않은 걸 깨달은 도시바는 메모리사업 매각작업을 빠르게 진행합니다. 지난 1월 27일에는 드디어 메모리사업 분사를 공식 발표합니다. 경영재건 중에도 꿋꿋하게 지켜온 메모리사업의 매각을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겁니다. 도시바의 메모리사업에 군침을 흘리던 글로벌 기업들의 눈치작전이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3월 29일 마감된 예비 입찰에 10곳 이상의 기업이 응하면서 ‘세기의 인수전’은 본격화됩니다. 하지만 인수전이 진행된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우선협상대상자를 발표한 후 두 달 만에 이를 변경하는가 하면, 그 과정에서 다른 측과도 협상을 병행하는 등 도시바가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흥행몰이에 성공한 도시바가 돈을 올려 받기 위해 진흙탕 싸움을 부추긴다는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인수전에 참여한 기업들의 속앓이도 심했습니다.
도시바는 6월 21일 이사회를 열어 도시바 메모리 매각 우선 협상자로 한미일 3국 연합을 선정했습니다. 한미일 3국 연합에는 SK하이닉스와 미국 투자펀드인 베인캐피털,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와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8월말쯤 황당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도시바가 반도체메모리 사업의 매각계약을 이달 내에 체결하기 위해 미국 WD 진영으로 우선협상자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한·미·일 연합과의 교섭이 진전되지 않아 마음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도시바는 일주일 뒤에는 다시 이사회를 열더니, 그동안 인수의사를 밝혔던 세 진영과 매각 협상을 동시에 지속하겠다고 밝힙니다. 미국 WD 등 ‘신(新) 미·일 연합’, 베인캐피털 주도한 ‘한·미·일 연합’, 대만 훙하이(鴻海)정밀공업(폭스콘) 등과 매각 협상을 진행한다는 얘기입니다. 사실상 ‘원점’으로 인수전을 돌린 겁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은 결국 9월 20일 도시바 이사회가 ‘한미일 연합’에 메모리 사업 부문 매각하기로 결정하면서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10월 24일, 도시바는 도쿄 인근 지바시 마쿠하리 메세에서 임시주총을 엽니다. 그리고 자회사인 도시바 메모리를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이 주도하고 SK하이닉스와 일본 산엽혁신기구(INCJ), 미국의 애플, 델, 시게이트, 킹스톤테크놀로지 등이 참여한 특수목적회사(SPC) 판게아에 매각하는 의안을 통과시킵니다. 1월 27일 도시바메모리 분사 발표 후 271일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판게아에는 도시바 3505억 엔, 베인캐피털 2120억 엔, 호야 270억 엔, SK하이닉스 3950억 엔, 미국투자자(애플ㆍ킹스톤ㆍ시게이트ㆍ델) 4155억 엔, 금융기관 및 은행 6000억 엔 등이 투자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한·미·일 연합은 의결권 지분 49.9%를 갖고, 도시바는 40.2%, 일본 장비업체 호야는 9.9%의 지분을 확보하게 됩니다.
도시바의 인수전은 우리 기업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깁니다. 세계 정상 반열에 오른 기업도 부정, 부패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또, 경영난을 타개하겠다며 원전사업에 ‘올인’했던 잘못된 판단이 치명타가 돼 그룹 해체로 이어진 것을 보면, 경영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사건이기도 합니다.
SK하이닉스와 도시바는 20년 이상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면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던 ‘오래된 연인’같은 사이입니다. 인수절차가 마무리 되어 파트너가 되면 두 회사가 서로에게 윈-윈 하면서 동반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인수 계약 체결 후 기자들과 만나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투자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도시바 등 일본 측이 지분 50.1%를 가져가면서 경영권은 유지한 만큼, 파트너가 되면 한·미·일 연합과의 상생을 통한 시너지도 기대해볼만합니다. 또한, D램 분야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SK하이닉스가 이번 인수전을 통해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어떠한 활약을 펼칠지 기대해 보아도 좋겠죠?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