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한 달 전, 코로나19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세계에 확산해 전 세계를 사실상 폐쇄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는 반도체 시장의 수요 감축, 공급 부족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가 유례없는 ‘경기 침체(recession)’를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희망은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기술 개발만큼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세계 반도체 업계가 ‘블랙스완’에 직면해있다고 하더라도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은 계속 등장해야 한다.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업계의 기술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기술 경쟁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파운드리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는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5나노 공정을 활용한 반도체 양산에 돌입한다고 대만 디지타임스 등이 최근 보도했다. 디지타임스는 “TSMC는 이미 5나노 공정용 제품 고객을 대거 확보한 상태”라며 “사실상 100% 판매를 완료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TSMC 5나노 공정을 활용한 반도체로는 애플의 차세대 칩셋인 A14, 중국 화웨이의 기린 반도체 차세대 모델, 퀄컴의 X60 시리즈 5G 모뎀칩과 스냅드래곤 875 등이 포함돼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반기 시장에 출시될 주력 스마트폰용 반도체는 대부분 TSMC의 차세대 공정을 활용해 만들어지는 셈.
이뿐만 아니다. PC용 CPU 시장에서도 TSMC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인텔에 도전장을 내민 AMD가 TSMC의 극자외선(EUV) 공정을 활용한 7나노, 5나노 공정으로 CPU를 제조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 여기에 업계에서는 인텔이 TSMC에 일부 물량을 파운드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디지타임스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보도했다. 과거 인텔 역시 일부 반도체 제조 물량을 파운드리로 전환한다는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한편, TSMC에 맞서는 삼성전자 역시 올해 안에 5나노 공정을 통한 반도체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지난 2월 경기도 화성 공장에서 EUV 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한 삼성전자는 현재 6나노, 7나노 반도체를 주력으로 생산한다. 5나노 양산 기술은 작년에 이미 확보했지만, 고객사 제품 출시 일정에 맞추다 보니 아직 양산(Ramp-up)에 돌입하지 못한 것. 하지만 삼성전자 역시 퀄컴의 차세대 5G 모뎀칩 양산을 수주했고 5나노 파운드리 라인 투자에도 착수해, 조만간 양산을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사는 5나노와 별개로 차세대 미세공정인 3나노 기술 개발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미 삼성전자는 연구소 수준에서 3나노 반도체 제조 공정을 개발 완료했으며, 이르면 2022년부터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TSMC 역시 오는 4월 미국에서 기술 설명회를 열고 3나노 기술을 공개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TSMC의 기술 시연이 제대로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에 들어섰지만, 반도체 수요 자체는 작년보다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며 “이런 상황에서 TSMC의 차세대 파운드리 공정 가동과 삼성전자의 거센 추격전은 파운드리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역대 최악의 불황을 경험하고 있다. 스마트폰은 모바일 D램, 낸드플래시 등이 탑재되는 핵심 완제품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PC, 서버와 함께 3대 제품군으로 꼽힌다. 스마트폰 시장이 위축되면 모바일 반도체 수요 역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는 2월 세계 스마트폰 판매량이 6,180만대로 전년 동기 대비 38% 줄었다고 밝혔다. SA는 “올 2월은 세계 스마트폰 역사상 가장 감소 폭이 컸던 달”이라며 “중국의 스마트폰 공급, 수요가 모두 급감하면서 아시아 시장 판매량이 전부 감소세에 접어들었고, 다른 지역의 성장세도 크게 둔화했다”고 밝혔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왔던 중국에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시작된 공급망 붕괴, 소비 감소의 직격탄을 스마트폰 시장이 맞은 것.
SA는 3월에도 시장이 회복하긴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SA는 “새로운 스마트폰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소비자들이 많고, 구매할 능력이 있는 소비자들도 구매 의사가 없다”며 “3월에도 약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애플은 올 상반기 출시를 계획했던 중저가형 아이폰9(가칭)을 정상 출시할 계획으로 전해졌다. 아이폰9은 애플이 매년 하반기에 내놓는 아이폰X 시리즈와 별개로 중저가 시장을 겨냥한 제품이다. 애플은 이에 앞선 2016년 상반기에도 아이폰SE를 내놓은 바 있다.
당초 애플은 이달 말 아이폰9 출시 행사를 열고 다음 달부터 판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력 생산기지인 중국이 코로나19로 인해 사실상 ‘멈춤’ 상황에 처하면서 정상 출시가 불투명했다. 하지만 애플은 기존 주력 생산기지인 폭스콘 외에 중국의 배터리·전기자동차 업체인 BYD와 손잡고 아이폰9 양산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스마트폰 업계에서는 예상과 달리 아이폰9의 출시가 그리 늦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애플이 아이폰9을 정상적으로 출시할 경우의 판매 실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이폰9을 시작으로 모바일 수요가 다시 늘기 시작하면 반도체 업계에도 그 과실이 그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 반면, 애플의 신제품마저도 코로나19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스마트폰 업계는 물론, 모바일용 반도체 시장의 위축세 역시 점점 가속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일본 니케이비즈니스리뷰는 최근 “애플이 5G용 아이폰12 출시를 수개월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공급망 문제는 물론이고, 스마트폰 수요 자체가 올해 내내 위축돼 애플의 신작 판매량 역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애플의 주력 스마트폰 출시가 연기되고, 그만큼 모바일용 반도체 수요도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초 올해 세계 반도체 업계는 “지옥의 2019년이 가고, 희망의 2020년이 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기대감으로 시작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공급 과잉이 지속되면서 2019년 내내 반도체 가격이 급락했고, 이에 따라 반도체 업계도 위축됐기 때문. 하지만 반도체 업계와 전문가들은 2020년부터는 다시 서버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요 회복이 진행되고, 이에 따른 실적 향상도 기대해 볼 만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는 현재까지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코로나19가 중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지금은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에 빠지고 이에 따라 반도체 수요 회복세 역시 예상을 밑돌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코로나19는 반도체 업계의 블랙스완 같은 존재”라며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철학과 시장을 보는 관점을 완전히 재정비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블랙스완이란 자본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문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반도체 업계 전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IC인사이츠는 작년 9,673억 개의 반도체가 출하됐다고 분석하면서, 올해 세계 반도체 출하량은 1조363억 개에 달해 2018년 이후 다시 1조 개 선을 넘어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초호황기였던 2018년 이후 세계 반도체 출하량이 1조 개를 넘어선 적은 없다. 당시 IC인사이츠는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자율주행 자동차, 인공지능 등 차세대 기술의 성장으로 클라우드용 서버, PC 등 모든 제품군에서 반도체 수요가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IC인사이츠는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한 지난 10일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시장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며 “반도체 업계가 V자, U자, L자형 불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IC인사이츠는 코로나19가 4월 초에 종식될 경우에는 시장이 가파르게 하강했다가, 다시 급상승하는 V자형 구조를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5월까지 이어질 경우에는 급하강 이후 하락 국면을 한동안 벗어나지 못하다가 상승하는 U자형 구조가 될 것이라고 봤다. 여기에 6월까지 지속될 경우에는 올해 내내 반도체 시장이 불황을 겪는 L자형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하반기에도 수요가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2년간 반도체 불황에 휩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 반도체 업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불황기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대만의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의 트렌드포스 역시 비슷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당초 D램익스체인지는 올해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모두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전망했다. D램의 경우 올해 최대 30%, 낸드플래시는 20% 상승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팬데믹 수준으로 확산하면서 이 같은 전망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D램익스체인지는 3대 주력 품목 중 스마트폰은 역대급 하락세를 보이고, 노트북을 중심으로 한 PC 시장 역시 약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노트북은 당초 2.6% 감소에서 9% 감소로, 스마트폰은 3.5% 감소에서 7.5% 감소로 시장 전망치를 조정했다. 서버 역시 5.1% 성장에서 3.1% 성장으로 수정했다. 이에 따라 D램 가격은 30% 상승에서 15% 상승, 낸드플래시는 20% 상승에서 최대 5% 하락으로 수정한 상태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쓰는 팬데믹 상황으로 발전한 것과 달리, 중국 내 코로나19 확진자 증가 폭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이미 유럽과 미국의 확진자 수가 중국을 넘어선 지 오래. 심지어 중국은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발병지로 꼽히는 후베이성에서조차 신규 확진자가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오히려 반도체 굴기를 위한 투자를 늘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가 코로나19 여파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정부 주도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중국 쓰촨성 청두시는 최근 대규모 반도체 연구단지 착공식을 열었다. 여기에는 120억 위안(약 2조1,000억 원)을 투입해 시스템 반도체용 핵심 기술인 미세전자제어기술(MEMs), 시스템 반도체 설계 자산(IP) 등을 개발하는 허브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뿐만 아니다. 중국 장시성 간저우시, 안후이성 허페이시 등도 신규 반도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간저우시는 전력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에 60억 위안(약 1조 원)을 투자하고, 허페이시는 이스라엘 파운드리 업체인 타워재즈의 신규 공장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고성능 시스템 반도체부터 저가 전력 반도체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
여기에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이 장악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도 투자를 늘린다. 창신메모리는 지난달 D램 생산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장 진출을 알렸다. 이미 낸드플래시 양산을 시작한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YMTC)에 이어 D램 시장 공략에 나선 것.
중국은 5G 서버용 주문형 반도체(ASIC) 투자도 대폭 늘리고 있다. 디지타임스는 “최근 들어 중국의 서버 업체들과 클라우드 업체들이 5G용 ASIC 개발에 나서고 있다”며 “대만 기술을 흡수해 자체 기술력으로 다양한 ASIC를 개발해 5G 시장에 적용 중”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중국은 대만 반도체 설계 업체인 글로벌유니칩, AI칩, 피손 일렉트로닉스 등과 손잡고 물량을 대거 늘리는 추세다. 이뿐만 아니다. 중국 텐센트는 최근 ‘바오안완 텐센트 클라우드’라는 신규 법인을 설립하고, 반도체 개발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텐센트는 중국 내 IT 경쟁사인 알리바바, 바이두처럼 인공지능용 반도체 개발에 주력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 알리바바 역시 자체 연구기관인 ‘다모아카데미’를 통해 올해만 1,473억 위안(약 26조 원)을 투입해 인공지능 반도체 개발용 프로젝트 500여 개를 가동할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이처럼 투자를 늘리는 배경에는 미국 의존도를 줄이면서 5G 시장을 주도하겠다는 의도가 있다. 1개당 가격이 최소 100달러가 넘는 AI 반도체, 초고성능 PC용 반도체 등은 물론, 개당 600달러가 넘는 5G 기지국용 CPU 등을 미국 의존 없이 만들어내겠다는 것. 게다가 최근 들어 미국, 유럽 등이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lockdown) 상황에 돌입하면서 기술 이전을 받는 데도 점점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상황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지금이 자체 기술력을 향상시키고, 반도체 굴기를 이뤄낼 적기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