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가 급변하고 있다. 특히 최근 1~2개월은 사상 초유의 M&A, 제재 등이 쏟아지면서 시장의 시계를 희뿌옇게 만드는 시기였다.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의 팹리스’라고 불리는 ARM이 또다시 매물로 나와 엔비디아(NVIDIA) 품에 안겼고, 미국 정부는 중국 ‘테크 굴기(倔起)’의 양대 축인 화웨이(Huawei)와 SMIC에 고강도 제재를 가했다. 이런 움직임이 반도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자.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메가 딜’이 지난달 마침내 성사됐다. ARM의 새로운 주인으로 미국 GPU 기업 엔비디아가 낙점된 것. 엔비디아는 ARM의 대주주인 일본 소프트뱅크(Softbank)와 협상을 통해 약 400억 달러(약 47조 원)에 ARM을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소프트뱅크는 2016년 ARM을 320억 달러에 인수한 지 4년 만에 다시 매각해, 차익을 남겼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과거 소프트뱅크의 인수보다 훨씬 파급력이 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소프트뱅크의 경우 반도체 기업이 아니어서 전략적 인수보다는 재무적 인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엔비디아는 ARM의 아키텍처(Architecture, 시스템 설계 방식 또는 하드웨어 구조나 동작 및 논리 구조의 개념)를 활용해 GPU(Graphic Processing Unit, 그래픽 처리장치)를 개발하는 고객사였다가 ARM의 대주주가 됐기 때문이다.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ARM은 주로 비메모리 반도체의 원천 설계를 개발하고, 이를 엔비디아, 퀄컴, 애플, 삼성전자 등 반도체 기업들에게 공급하는 반도체 설계 업체다. 주력 품목은 모바일용 칩셋이나 사물인터넷용 반도체 등으로, 삼성전자의 엑시노스(Exynos), 퀄컴(Qualcomm)의 스냅드래곤(Snapdragon), 애플(Apple)의 A시리즈 모두 ARM의 원천 설계를 활용한 제품이다. ARM이 설계한 제품 비중이 95%에 달할 정도로 세계 모바일용 반도체 시장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어, ‘팹리스들의 팹리스’로 불린다.
이에 향후 ARM을 인수한 엔비디아가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핵심 설계 IP(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를 독점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Jensen Huang) CEO는 ARM 인수 발표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ARM의 설계는 거의 모든 모바일 제품에 들어간다”며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들(GPU 및 AI 기술)을 ARM 제품에 접목해 판매하겠다”고 말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을 고객사로 둔 ARM을 발판 삼아 엔비디아의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의도다.
또한, 엔비디아는 이번 인수를 통해 사업 분야를 확장할 방침이다. ARM의 원천 설계에 엔비디아의 GPU를 결합한 방식으로 현재 ARM의 영향력이 약한 서버용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동안은 중립을 지켜왔지만, 앞으로는 ARM도 본격적으로 반도체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것. 엔비디아와 ARM은 이를 통해 웨어러블(Wearable, 몸에 착용하는 방식의 IT 기기), 모바일, 자율주행 자동차, PC, 데이터센터 등 모든 영역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장악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이 같은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약 엔비디아가 ARM의 IP를 독점한 채 사용료를 대거 인상하거나 IP 자체를 공급하지 않을 경우, 다른 업체들이 받을 타격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삼성전자, 퀄컴, 애플 등은 예상보다 빠르게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독자적인 행보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최근 미국 반도체 설계 전문 스타트업 사이파이브(SiFive)를 필두로 한 새로운 반도체 설계 기술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당장은 사물인터넷용 반도체 위주로 활용되는 상황이지만, 빠르게 모바일, 웨어러블 등으로 적용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ARM이 과거 퀄컴, 애플, 삼성전자 등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기업이 엔비디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ARM 대신 사이파이브에 힘을 실어주면 ARM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줄어들 가능성도 있다. 엔비디아가 거액을 투자해 ARM을 인수했음에도 큰 실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주요 국가의 반독점 당국으로부터 합병 승인을 받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미 중국 정부는 엔비디아와 ARM의 합병을 승인해주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기업인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할 경우 반도체 업계에서 미국의 입김이 지나치게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이번 인수가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회사 사이에서 이뤄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엔비디아는 손 회장이 일찌감치 인수 타깃으로 낙점했던 기업이었다. 하지만 손 회장은 2019년 초 보유 중이던 엔비디아 주식을 전량 매도했다. 2018년 가상화폐 열풍 등으로 엔비디아 주가가 크게 올랐다가 그해 연말부터 가상화폐 붐이 가라앉아 급속도로 투자심리가 위축되자 매각을 선택한 것. 하지만 엔비디아는 이후 데이터센터용 GPU, 자율주행 자동차용 반도체 등에 집중해 빠르게 회사를 키웠고, 결국 손 회장이 “50년 이후를 생각하고 인수했다”며 애지중지했던 ARM을 인수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에 이어 중국을 대표하는 파운드리 기업인 SMIC까지 제재 대상에 올리면서 중국 IT기업에 대한 압박 강도를 점점 끌어올리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완제품 IT기업의 숨통을 틀어쥔 데 이어 중국 대표 반도체 기업까지 압박하기 시작한 것.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자국 반도체 기업들에 보낸 공문을 통해 “앞으로 SMIC에 반도체 장비나 기술을 수출하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화웨이를 압박하면서 썼던 수단과 동일하다.
이번에 미국이 총구를 겨눈 SMIC는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아직 4~5%로 5위 수준이지만, 중국 정부가 공들여 육성 중인 기업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최근 “SMIC에 2조 7,000억 원을 투자하고, 15년간 법인세를 면제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위해서는 메모리와 함께 파운드리를 육성해야 하는데, 중국은 SMIC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이 SMIC를 제재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화웨이 때와 비슷하다. SMIC가 제조하는 반도체가 중국의 군사 및 첩보 활동에 활용돼 세계 안보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 화웨이가 통신장비를 통해 각국의 주요 정보를 감청해 중국 정부에 넘긴다는 기존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인텔 같은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종합 반도체기업)에서 엔비디아, 퀄컴 같은 팹리스 업체로 옮겨가면서 파운드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미국이 SMIC를 제재하는 이유로 꼽힌다. 팹리스와 파운드리는 하나의 세트 메뉴처럼 함께 가는 존재다. 만약 SMIC의 파운드리 역량이 올라갈 경우 중국에서 자체 육성한 팹리스 기업들의 경쟁력이 올라가고, 이는 미국 입장에서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SMIC 제재는 화웨이를 직접 타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화웨이는 해외 반도체 기업들과의 거래가 중단되면서 자사 스마트폰, 통신장비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SMIC에 위탁 생산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SMIC는 삼성전자, TSMC 수준의 7나노, 5나노 공정은 개발하지 못했지만, 14나노 수준의 공정 기술을 주력으로 확보하고 있다. 화웨이는 자체 생산시설이 없다 보니 SMIC와의 협업이 더욱 중요해진 상황. 화웨이 입장에서 초고성능 제품에 들어가는 칩셋을 구하긴 힘들어도, 중저가 제품은 충분히 납품받을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을 미국이 SMIC 블랙리스트 등재로 원천 봉쇄하고 나선 것.
한편, SMIC 제재는 단기적으로 한국 파운드리 업체들에게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중국의 파운드리 공급이 수요 대비 절반 수준에 그치는 상황에서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가 제재에 직면한다면, 수요가 한국으로 몰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삼성전자 등 한국 파운드리 기업들이 기존에 거래하지 않았던 고객사를 새롭게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미국의 중국 압박이 점점 더 거세지면 한국 기업들 역시 비슷한 제재나 압박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달 15일부터 중국 최대 스마트폰 업체인 화웨이에 반도체 등 핵심 부품 납품이 사실상 중단됐다. 미국 정부는 이날부터 미국의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만든 모든 반도체를 미국 허가 없이 화웨이에 공급할 수 없도록 했다. 화웨이는 하루 전인 14일까지 전세기를 띄워가면서 반도체 수급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6개월가량의 재고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중국 현지 매체들은 “화웨이에 비장함이 감돌고 있다”며 “확보한 재고가 소진되면 화웨이의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화웨이는 중국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IT기업이다. 세계 2위 스마트폰 업체로 작년에만 2억4,050만 대의 스마트폰을 판매했다. 통신장비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세계 1위다. 화웨이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도 엄청나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주요 고객사로, 연간 삼성전자는 약 7조3,700억 원, SK하이닉스는 약 3조 원이 화웨이향(向) 매출로 추산된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에게도 화웨이는 핵심 고객사다. 약 14%의 매출이 화웨이로부터 발생했다. 일본 기업들도 타격을 피하기 힘들다. 일본 기업들은 화웨이가 쓰는 부품의 약 30%를 공급해 왔다. 소니(Sony)는 스마트폰용 이미지센서를, 무라타제작소는 MLCC(Multilayer Ceramic Capacitor, 전자제품 회로에 전류가 일정하게 흐르도록 제어하는 핵심 부품), 키옥시아(Kioxia)는 낸드플래시 등의 메모리 반도체를 각각 화웨이에 판매하고 있다.
이번 제재로 세계 주요 메모리, 파운드리 업체들의 매출 중 약 10%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으로 인한 한국, 일본, 대만 기업들의 손실액이 2조8,000억 엔(약 31조2,40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이 중 한국 기업들의 손실분은 약 13조 원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세계 반도체 기업과 화웨이는 동시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화웨이는 최근 개최한 협력사 행사인 ‘화웨이 커넥트’에서 “화웨이는 큰 어려움에 처해있다”며 “지속적 탄압으로 경영상 큰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화웨이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동안 추진해왔던 자체 AP(Application Processor, 스마트폰 중앙처리장치) 개발 전략을 철회하고, 미국 퀄컴에 AP 공급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탈(脫)미국 전략 대신, 미국 의존도를 높이면서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겠다는 의도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가 우리의 생산, 경영에 확실히 큰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다”며 “앞으로 퀄컴의 반도체 칩으로 스마트폰을 제작할 의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반도체 기업들 역시 발 빠르게 미국에 거래 승인을 요청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미디어텍 등 한국, 대만 업체들은 물론이고 마이크론, 인텔, AMD, 퀄컴 등 미국 업체들까지 화웨이와의 거래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한편, 이런 와중에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에 대해서만 수출 허가를 내주고 있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인텔(Intel)과 AMD가 미 당국으로부터 화웨이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인 수출 품목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화웨이에 대한 본격적인 제재를 가한 이후 첫 수출 허가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화웨이의 목을 조르면서 자국 기업에게만 수출 허가를 내주고 있다”며 “이는 중국 압박과 자국 반도체 기업 육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조치”라고 분석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굳건히 버티며 실적을 견인해왔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하반기 들어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요동치는 모습을 보였던 D램 가격이 갑작스럽게 하락세로 전환한 것이 발단이다. 현 상황이 지속될 경우 그나마 한국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해줬던 반도체마저 위기에 빠질 우려가 있다.
지난 8월부터 약 한 달간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변동 폭이 상당했다. 화웨이가 제재 발효에 앞서 물량을 말 그대로 쓸어모으기 시작하면서 반도체 현물가격이 급격한 상승세를 보인 것. 하지만 지난달 15일 이후 화웨이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가격이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는 “8월 말부터 시작된 가격 오름세는 화웨이의 긴급 재고 축적으로 인한 것”이라며 “이는 일시적인 상승이었을 뿐 당분간 하락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또한, 트렌드포스 보고서를 통해 “올 4분기 서버용 D램 가격 하락 폭을 당초 10~15%에서 13~18% 수준으로 조정한다”고 밝혔다. 상당수의 서버 업체들이 3분기 중 D램 재고량을 쌓아둔 상황에서 수요 급락에 따른 가격 하락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D램익스체인지는 “재고가 정상화될 때까지 최소한 1~2분기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내년 초까지는 주문량 감소가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화웨이발 쇼크로 인해 모바일 D램 가격이 얼마나 하락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가 각국 기업들에게 화웨이에 대한 수출 허가를 얼마나 내줄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시장을 전망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업계에서는 “당장 올해는 대규모 수출 허가가 나오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에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들이 4분기 실적이 부진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의 경우 매출에서 D램이 차지하는 비중이 80% 수준에 달하는 데다 화웨이 의존도도 낮지 않다. 삼성전자 역시 영업이익 기준으로 반도체 의존도가 67%에 달해 D램 가격 하락 및 화웨이 수출 금지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한 수출 자체가 금지된 것이 아니라 화웨이에 대한 수출만 금지됐기 때문에 예상보다 타격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화웨이 압박에 따른 풍선효과(풍선의 한 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불룩 튀어나오는 모습에 빗대, 한 쪽을 억제하면 다른 쪽에서 새롭게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오포(OPPO), 비보(VIVO), 샤오미(Xiaomi) 등 중국의 다른 스마트폰 업체나 애플, 삼성전자 등의 중국 스마트폰 판매량이 늘고 이 기업들의 주문량이 늘어나면, 타격을 일부 상쇄시킬 수 있다는 분석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