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이 은은히 날 것 같은 공간이 있다. SK하이닉스 품질보증 박정식 담당의 집무실이 그랬다. 책상 주변에 쌓여 있는 각종 서적들, 오랫동안 공들인 손길이 느껴지는 난 화분들,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손때 묻은 장식들이 정갈하게 어우러져 마음이 차분해졌다. 직접 만나본 박정식 담당도 이 공간을 닮은 모습이었다.
박정식 담당은 인터뷰 내내 푸근한 웃음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고, 매 질문마다 그의 삶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 말을 신중히 골랐다. 인터뷰 내내 ‘원칙’과 ‘배움, 성장’을 강조하는 그의 철학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가 SK하이닉스의 미래와 구성원 행복을 위해 고민해온 시간도 느낄 수 있었다.
박정식 담당은 1990년 입사 후 제조와 테스트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았고, 2002년부터는 여러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로서 메모리생산본부, 제품개발본부, PKG&TEST제조본부를 두루 거치며 탄탄하게 경력을 쌓아왔다. 이러한 역량을 인정받아 2018년 12월 품질보증 담당으로 부임해, SK하이닉스의 품질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최고에 걸맞은 품질을 디자인하고 리드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평가와 기대감에 대해 박정식 담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혼자가 아니라 품질보증 구성원과 함께여서 가능하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소명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해 기대에 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SK하이닉스는 아직 업계 최고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답습하면 업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품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소명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SK하이닉스를 업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품질관리 고도화에 더욱더 매진하겠습니다”
박정식 담당은 그동안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맡았지만, 모두 불량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관심사는 양품(良品)보다는 불량품(不良品). 성공보다는 실패를 찾아내야 하는 업무지만, 그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실패에서 배움을 얻고자 그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죠. 회사 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고 싶었던 일의 절반은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 이상을 건지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매번 실패에서 무언가 얻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매사에 긍정적으로 임했기에 실패들을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업무의 특성상 다양한 분야를 다룰 수 있었던 만큼, SK하이닉스 제품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도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박정식 담당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이번 기회에 해당 분야에 대해선 전문가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그 결과 한 번 담당했던 분야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가 못지않은 이해도를 갖출 수 있었다.
“따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일에서 배우면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어떤 일을 맡을 때마다 해당 분야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업무에 필요한 역량을 하나씩 쌓아 올릴 수 있죠. 이슈가 생겼을 때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보다 ‘이 분야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늘 배우는 자세로 실력을 갖춰 마침내 SK하이닉스의 품질을 이끄는 리더로 자리매김한 박정식 담당.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제공하기 위해 회사 전체의 품질을 높이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변화하는 고객 니즈에 맞춰 제품이 다변화되는 시장 환경 속에서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1등 제품으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문화품질 확산 즉, 구성원 전체의 품질관리에 대한 의식 변화와 전사적인 품질관리 시스템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등 품질은 1등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품질보증 업무를 맡기 전엔 우리 제품의 완성도가 떨어져 고객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 제품은 이미 Global TOP 수준입니다. 문제는 제품 완성도가 아니라 완벽하지 못한 품질관리 방식이었죠. 어쩌면 ‘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막연한 낙관론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낙관론은 금물입니다. 업계 최고가 되려면 임기응변만으로는 한계가 있겠죠. 구성원 모두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규정을 준수하고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난해는 ‘문화품질’, 올해는 ‘규정준수’를 목표로 일하는 방식을 개선해 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해 품질보증 담당으로서 느낀 고객품질의 중요성을 고려해 고객 중심 조직 체제로 재정비했고, 장기적으로 생산공정 중 발생 가능한 여러 복합변수를 효율적으로 분석해 관리할 수 있는 품질관리시스템(Quality Management System, QMS)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위해 선행&품질System 담당조직을 신설했고, 마스터 플랜이 수립되는 대로 관련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웨이퍼 한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축적되는 데이터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죠.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데이터 기반 QMS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고품질의 제품은 기나긴 공정에서 아무런 오류 없이 꽃길만 걸은 제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QMS는 가능한 많은 우리 제품이 꽃길만 걸을 수 있는 루트(Route)를 찾아 줄 것입니다. 단기간에 완성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빨리 이 시스템을 완성해 SK하이닉스의 제품 품질 향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확산해, 전세계 모든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 품질보증 업무에도 영향이 없을 수 없는 상황. 박정식 담당은 이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 안정화 이후 시장 회복기에 치고 나가기 위한 계획도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고 고객과의 소통도 대부분 정지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품질과 관련해 어떤 불만이 있는지도 접수되지 않고 있죠. 사태가 진정되면 누적된 것들이 한꺼번에 문제로 불거질 것 같아 그 이후를 대비한 비상 대응 체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지나가고 다시 시장이 회복될 때는 분명히 품질 이슈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를 대비해 내실을 다지고 탄탄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박정식 담당은 ‘리더십’에 대해서도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리더라면 짧게는 2~3년, 길게는 5~10년 앞까지 미리 내다보고,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예측해 미리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슈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슈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은 리더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노루는 늘 같은 길로 다닙니다. 이 길을 노루목이라고 하는데, 사냥꾼들이 덫을 놓아 노루를 잡으려면 노루목이 어딘지 파악해야 하죠. 그러려면 먼저 노루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업무를 할 때도 노루목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리더죠. 리더는 맡은 분야를 꿰뚫어 보고 미래를 예측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통찰력(Insight)이 없다면 리더라고 할 수 없죠. 그래서 저도 늘 그런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정식 담당은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업계 최고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늘 ‘오늘은 어제와 똑같이 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에게도 이런 자세를 많이 요구하고 있죠. 보고서 하나를 쓸 때도 관례대로 일하던 방식으로만 작성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 같으니 결론이 똑같을 때가 많아요. 하지만 똑같은 문제는 없거든요. 당연히 분석의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죠. 사소한 보고서라도 늘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어제와는 다르게 새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게 보이죠. 이런 차이가 바로 1등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경쟁력입니다”
박정식 담당은 SK하이닉스에서 거둔 가장 주요한 성과로, 품질보증의 지향점을 ‘우리가 만족하는 품질’에서 ‘고객이 만족하는 품질’로 바꾼 성과를 꼽았다. 이 역시 현재에 안주하기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뤄낼 수 있었다.
웨이퍼 테스트에서 수율이 80~85% 수준에 머물던 당시, 내부적으로는 이를 두고 거의 완벽한 수준이라고 만족했다. 하지만 고객은 지속적으로 불만을 제기했고 패키지 테스트 단계에서 다시 테스트해야 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에 박정식 담당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고객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에게 돈을 받고 제공합니다. 그러면 고객이 기대하는 부가가치를 제공해야 하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업계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런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패키지 테스트에서 수율을 먼저 높였고, 이를 위해 웨이퍼 테스트를 강화했습니다. 또한, 제품 개발과 제조 파트에서도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냈죠. 이런 변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에 SK하이닉스가 지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힘을 보태준 동료,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박정식 담당은 후배들을 향해 그들이 걸을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로서 “업무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진심 어린 조언도 남겼다.
“늘 후배에게 업무 영역을 따지지 말고 경계가 모호한 Gray Area가 있다면 그 일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조언하는 편입니다. Gray Area를 최소화해야 문제가 원활히 해결되고 회사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회사는 하나의 조직입니다. 조직이 성장해야 소속된 개인도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박정식 담당은 ‘구성원의 행복’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런 만큼 구성원들과 ‘행복’에 관해 자주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들어보고 있다.
“구성원 대부분이 회사 바깥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회사 안에서의 행복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각자 생각하는 행복은 회사 바깥에 있는 거죠. 회사에서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 대해 오해를 하는 구성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말까지는 행복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이제 부정적인 생각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올해부터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어떻게 하면 회사 바깥이 아닌 회사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같이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박정식 담당은 구성원의 행복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했다. 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면 먼저 본인이 언제 행복한지부터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 행복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또 홀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그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이 과정에서 구성원이 회사 안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연세대학교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 ‘안전과 생명유지의 상태’란 문구가 있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걸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때 좋은 사람이란 ‘안전감을 주는 사람’을 의미하죠. 안전감은 안정감과 비슷한 말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안정감이 Stability 즉, 현재의 육체적, 정신적 편안함을 의미한다면 안전감은 거기에 더해 Security 즉, ‘내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감정이죠. 장기적으로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같은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왜 구성원들이 회사에서 행복을 못 느끼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회사에서 안전감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것 같아요. 긴장된 상태에서 일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죠. 그래서 회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더욱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런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요”
구성원들과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한편, 이런 결론을 바탕으로 올해부터는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해볼 계획이다. 구성원들이 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
“월급쟁이는 모두 출근을 싫어하지만(웃음), 저는 분석 결과가 궁금해서 새벽에 출근하곤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하는 것이 재밌었어요. 특정 이슈를 해결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죠. 또 새로운 일을 할 때나 스스로 일의 주체가 될 때도 재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구성원들도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재미가 SK가 지향하는 행복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정식 담당에게 ‘SK하이닉스의 리더 중 한 사람으로 박정식 담당’을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을 ‘소쿠리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소쿠리 같은 사람은 윤석미 작가가 쓴 ‘달팽이 편지’라는 책에서 인용한 표현인데,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잘 티가 나지 않아도 필요할 때는 꼭 필요한 만큼의 기능을 확실히 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소쿠리나 명절 때 사용하는 큰 밥상 같은 물건들은 1년 365일 중 360일은 어딘가에 보관돼 있지만, 어떤 일을 할 때는 꼭 그 물건을 가져다 쓰게 되죠. 저는 뛰어난 사람도 아니고 다재다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한 그 순간 맡은 일만큼은 확실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박정식 담당이 추천한 Next Top TL?
“NAND개발 최정달 담당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SK하이닉스는 NAND 분야에서 몇 년 동안 공을 많이 들여서 기초공사를 마쳤습니다. 올해는 그 결과물이 나올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가 굉장히 중요한 해인 것 같아요. 최정달 담당은 이런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줄 역량을 갖고 있습니다. 꼭 좋은 성과를 내달라는 당부의 의미로 다음 Top TL 인터뷰의 주인공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