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들이 혁신을 위한 발판으로 사내 벤처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이를 통해 기업과 구성원 모두 비약적 성장을 이룰 수 있기 때문. 기업 내 유능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도전할 기회를 얻는 한편, 기업 입장에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SK하이닉스 역시 2018년 사내 벤처 지원 프로그램 ‘하이개라지(HiGarage)’를 출범해 구성원들의 창업 아이디어를 지원하고 있다. 여기엔 경영 활동에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DBL(Double Bottom Line)을 통해 혁신 성장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올해 하이개라지는 비(非)반도체 분야까지 창업 아이디어를 확대해 3기를 선발했다. 1기와 2기에서 각각 4개, 5개 벤처 기업이 탄생했고, 지난 3월부터 3기 멤버들이 아이디어 실현을 위해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이에 뉴스룸은 선배 격인 하이개라지 1기 창업 멤버들을 한 팀씩 만나볼 예정이다. 첫 번째 주자는 칠러(Chiller) 전문기업 ‘차고엔지니어링’. 하이개라지를 통해 칠러 명장에서 어엿한 CEO로 거듭난 김형규 대표에게, 사내 벤처 프로그램을 통한 창업 과정과 그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김형규 대표는 2007년 10월 SK하이닉스 N-WT 제조기술팀의 장비 엔지니어로 입사해 ‘최연소 기술 명장’ 타이틀을 딴 실력파 엔지니어다. 특히 사내에서는 칠러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칠러는 반도체 장비용 온도 조절 장치로, 테스트 공정에서 저온 환경을 만들어 반도체가 북극, 남극과 같이 극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지 검사하는 데 활용된다.
그는 칠러 장비의 유지·보수 업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엔지니어였지만, 가슴 한편에는 늘 엔지니어로서 신규 장비를 개발하고 싶다는 갈망을 품고 있었다. 기존 장비를 보수해서 개선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칠러 장비 대부분이 외국산이라 운송 기간이나 비용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많았기 때문. 그러던 중 2016년, 해외 칠러 장비 업체에 출장을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앞선 기술은 물론 자재 관리부터 공정, 구성원들의 태도 등 기술 외적인 부분까지 하나같이 남달랐던 것.
이때 그에게도 꿈이 싹텄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를 제패하는 칠러가 나오면 좋겠다’는 꿈이었다. 그때부터 혼자 틈틈이 집 베란다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2018년 여름, 하이개라지 1기 공모 소식을 들었다. 칠러 국산화를 위한 포부를 갖고 아이디어를 내 선발됐고, 당당히 1기로 선정돼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이개라지는 예비 창업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제공했다. 시작부터 SK하이닉스의 창업 지원금과 정부 지원금 각각 1억 원씩, 총 2억 원의 준비 자금을 지원 받았고, 벤처 투자사 추천도 받을 수 있었다.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벤처 창업 전문가들의 컨설팅도 받았다. 무엇보다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3년 내에 회사에 복직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어, 실패에 대한 부담감을 덜고 연구 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오히려 배수의 진을 쳤다. 그는 “다시 현업으로 돌아갈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며 “혁신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시작한 이상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그런 각오 덕분이었을까, 결국 그는 2년 만에 ‘차고엔지니어링’ 창업에 성공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차고엔지니어링은 김형규 대표가 글로벌 칠러 대표 기업을 꿈꾸며 만든 칠러 전문기업이다. 칠러 개발, 수리, 개조, 개선 등 온도를 다루는 기술 솔루션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며 반도체 공정용 핵심 부품의 국산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그 결과, 구현 가능한 온도에 따라 Iron-3, Iron-7, Iron-10로 명명한 세 가지 칠러 장비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에어 칠러(Air Chiller), 전기 칠러(Electric Chiller), 열교환기(Heat Changer) 등 다양한 냉각 솔루션을 갖췄다. 준비된 제품뿐만 아니라 고객이 필요로 하는 스펙(Spec.)에 따라, 맞춤형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 이런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SK하이닉스를 비롯해 여러 고객사에 칠러 장비를 납품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공장을 확장·이전해 경기도 화성시에 새로운 기반도 마련했다.
김 대표는 무엇보다 그가 원하던 수준의 조직력을 확보한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첫 장비를 만들 때는 테스트하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렸다. 지금은 경험치 자체가 다르다 보니 새로운 솔루션을 개발하고 테스트하는 데 몇 개월이면 된다. 집 베란다에서 혼자 시작한 그는 하이개라지를 거쳐 이제 새로운 둥지에서 15명의 구성원과 함께 성장을 향한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
지금은 명실상부한 강소 벤처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칠러 분야 최고 명장에게도 벤처 창업은 분명 새로운 도전이었다. 김 대표는 하이개라지를 통해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기회를 얻은 만큼, 모든 걸 쏟아부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연구 개발에 매진했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고, 시행착오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 배워 가는 단계”라고 강조했다.
특히 회사 구성원일 때와 달리 대표가 되고 나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예전엔 엔지니어로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학교를 더 다니고 자격증을 따는 등 역량 강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보다도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그는 “기술을 만들고 다루는 건 결국 사람”이라며 “구성원들의 표정을 살피고, 고객과 협력사 등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말했다.
관점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시야도 넓어졌다. 회사 구성원일 때는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부터 열 가지 직접 나서야 하고 대표로서 전체 흐름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 그는 “구성원일 때는 관심도 없던 정책 동향이나 관련 분야, 기관에 대한 뉴스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고, 대표로서 고민할 것도 많아졌다”며 “무엇보다 맡은 일,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졌다”고 했다.
김형규 대표는 차고엔지니어링의 탄생 계기가 된 하이개라지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또한 차고엔지니어링을 더 키워 SK하이닉스의 성장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는 “아직도 SK하이닉스에 대한 애사심이 크다”며 “칠러를 통해 이루고 싶은 꿈을 이뤄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직군에 대한 미래가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많은 후배들이 사원일 땐 기장, 기장일 땐 명장을 꿈꾸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묻거나 그다음에 대해 물으면 쉽게 답하지 못하더라”며 “그래서 실패하든 성공하든 SK하이닉스 구성원에게 본보기가 되는, 새로운 길을 창출해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이개라지는 미래를 향한 도전에 든든한 지원군”이라며 다른 SK하이닉스 구성원들에게도 하이개라지 프로그램에 도전해 볼 것을 적극 추천했다. 사내 벤처를 꿈꾸는 구성원들에게도 “살다 보면 언제나 후회가 뒤따르지만, 안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응원했다.
김 대표도 여전히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구성원들과 다음 스텝을 위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첫 번째 계획은 범용적으로 쓸 수 있는 칠러를 개발하는 것. 글로벌 칠러 기업들은 칠러만으로도 많은 수익을 내지만, 우리나라의 칠러 업체들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고객사의 니즈에 따라 제작된 칠러를 납품하는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1) 방식이 일반적이기 때문. 김 대표는 “어떤 산업에서도 범용적으로 사용 가능한 칠러를 만들고 싶다”며 “전국의 어느 맥도날드를 가도 같은 햄버거를 사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차고엔지니어링의 칠러가 쓰이는 날을 꿈꾼다”고 포부를 밝혔다.
1) Customizing: 생산자가 고객의 요청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 주는 일종의 맞춤 제작 서비스
또한 오랜 꿈에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김 대표가 칠러를 직접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가 꿈꾼 무대는 세계 시장이었다. 지금은 이를 위한 투자 유치를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마지막 목표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 그는 SK하이닉스에서 근무할 때도 재능기부를 통해 버려지는 칠러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반도체 공정에서 버려지는 칠러는 공정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폐기가 결정된 것일 뿐, 못 쓰는 제품이 아니다. 그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라도 이를 개선해 농가나 어촌의 냉동기로 기부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그는 “불가피하게 폐기되는 칠러가 꼭 필요한 곳에 전달되면 자원 순환과 환경 보호 측면에서도 좋은 일일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그의 마지막 종착점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바쁜 일정 탓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하지만, 요즘엔 아들이 자기도 커서 CEO가 되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뿌듯합니다. 50대까지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강렬하게 불태울 때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엔 가족을 위해 모든 시간을 쓰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칠러 강국이 되고, 그 중심에 차고엔지니어링이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