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수외미(畏首畏尾). 머리가 어찌 될까 두려워하고, 동시에 꼬리도 어떻게 될지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크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음을 나타내는 사자성어입니다. 최근 중국의 간판 기업 화웨이가 그야말로 외수외미의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무역전쟁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이 특히 화웨이를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항전 의지를 밝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놀라운 성장세로 중국 내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팹리스 업체입니다.
미중 무역전쟁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많은 중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또 어떤 독설이 중국 산업 및 경제계를 향해 날아들지 노심초사하는 분위기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은 단연 화웨이입니다. 미국은 화웨이의 5세대 이동통신(5G) 통신설비는 물론 스마트폰에 대해서도 판매 및 제품 개발 제한에 나서고 있습니다.
5월 16일에는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와 화웨이 계열 68개사를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당국의 허가 없이는 미국 기업들이 이들 업체에 제품과 기술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인텔이 만드는 반도체를 비롯해 구글 검색과 유튜브 등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까지 막히면서 화웨이의 시장 확대는 큰 지장을 받게 됐습니다. 당장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은 “화웨이는 향후 2년간 예상 대비 300억 달러(35조6010억 원) 적은 돈을 벌어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화웨이와 그 계열사들을 큰 시름에 빠뜨린 미 상무부 발표 다음 날, 결사 항전을 선언한 업체가 있습니다. 바로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입니다. 허팅보 하이실리콘 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몇 년 전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대비해왔습니다. 결국 미국에서 제공하는 모든 첨단 기술과 칩을 사용할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화웨이가 고객들에게 안정적인 서비스를 계속 제공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수천 명의 하이실리콘 임직원들은 화웨이의 생존을 위해 기술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행진을 완수할 것입니다.”
▲ Kirin980 system-on-a-chip (출처: HUAWAY)
하이실리콘은 반도체 생산시설이 없는 ‘팹리스’입니다. 화웨이의 주력 제품인 통신장비와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각종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한 뒤 대만 TSMC 등에 위탁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화웨이 플래그십 스마트폰에 탑재된 AI(인공지능)칩 ‘기린’, 5G 통신장비의 핵심인 ‘바룽’칩도 하이실리콘이 만든 것입니다. 데이터센터용으로 만든 서버용 칩 시리즈인 ‘쿤펑’ 역시 높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화웨이는 스냅드래곤 시리즈 등 퀄컴의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인텔의 각종 시스템 반도체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칩의 종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는 버틸 수 있는 정도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화웨이에 대한 미국 상무부의 수출 금지 조치가 유지된다면 재고가 소진된 이후 화웨이가 정상적인 생산활동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하이실리콘의 역량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런정페이 회장을 비롯한 화웨이 수뇌부도 하이실리콘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이실리콘이 단순한 자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허팅보 사장의 위상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화웨이의 미래 준비를 책임지는 ‘2012 연구소’의 소장을 겸하고 있으며 런정페이 회장 등과 나란히 화웨이 이사회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화웨이로서는 초창기라 할 수 있는 1996년 엔지니어로 입사한 허팅보 사장은 20년 가까이 화웨이 이사회 회장을 맡았던 순야팡, 런정페이의 친딸이자 CFO의 멍완저우와 함께 중국내 손꼽히는 여성 리더입니다. 적극적인 여성 인재 활용은 화웨이의 가장 두드러지는 장점 중 하나이기도 하죠.
▲5G Multi-mode Chipset 'Balong 5000' (출처: HiSilicon)
하이실리콘은 중국 전체 반도체 산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에 따르면 올 1분기 매출은 17억5500만 달러(약 2조1000억 원)에 이릅니다. 중국 반도체 생산업체 중에 그나마 유의미한 매출을 올리고 있는 SMIC의 지난해 전체 매출은 33억60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중국 반도체 업계를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업체가 바로 하이실리콘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모회사인 화웨이는 올해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하이실리콘의 매출은 지난해 1분기 대비 41% 성장한 것입니다. 화웨이가 필요로 하는 칩 이외에도 다양한 제품을 설계해 판매하고 있는 것이 비결입니다. TV용 디스플레이 드라이브칩과 사물인터넷(IoT)칩, 보안 관련 각종 시스템 반도체도 하이실리콘이 진출한 영역입니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하이실리콘은 보안용 칩 시장에서 중국내 점유율 1위를 기록했고, TV용 칩에서도 3분의 1 정도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통신 및 스마트폰 관련 칩 중에 하이실리콘이 개발하지 못한 제품도 적지 않습니다. 통신장비의 핵심인 무선주파수칩은 하이실리콘이 전혀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용 무선통신칩 역시 전량 외부에서 조달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화웨이로 향하는 생명선을 조이고 있는 가운데 관련 제품은 하이실리콘이 자원을 집중할 분야로 꼽힙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화웨이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대응 과정에서 반도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의 역량 역시 한 단계 도약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무역전쟁이 반도체 업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