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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를 이끈 행원자이(行遠自邇)의 자세

Written by 노경목 기자 | 2018. 9. 11 오전 12:00:00

 

행원자이(行遠自邇),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한국 속담과 의미가 비슷하죠. 중국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는 한국의 인식은 ‘벼락부자’와 비슷해 보입니다. 2010년 이전만 해도 중국 반도체 산업의 존재감이 미미했기에, 갑자기 외형을 키운 중국의 모습이 당혹스러울 수밖에요.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중국 반도체 산업의 첫걸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1956년,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다

1956년 중국 정부는 해외 선진 기술을 국산화하는 ‘과학진군’ 사업을 시작하며 4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반도체를 선정했습니다. 1947년 미국 벨연구소가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지 채 10년이 되기 전입니다.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한 후, 해외에서 초빙한 중국 출신 전문가들을 주축으로 중국과학원에 전문가 양성기관부터 만들었습니다. 베이징대와 푸단대 등 5개 주요 대학도 연합해 반도체 인력 양성 조직을 꾸렸습니다. 여기서 이듬해 말 100여 명을 시작으로 매년 졸업생이 배출돼 반도체 기술 개발의 핵심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이들 졸업자들을 중심으로 칭화대 등 주요 대학에도 반도체 관련 학과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트랜지스터 개발이 불러온 전자기기 붐

1957년에는 중국과학원이 실리콘보다 제작이 쉬운 게르마늄을 바탕으로 트랜지스터 제작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연구개발에 더 힘을 싣기 위해 중국 정부는 1960년 중국 과학원에 반도체연구소를 만들었고, 베이징 인근 스좌장에는 반도체 생산기술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이들 연구소에서 나온 성과와 1960년 7월 소련의 전문가 파견 및 기술 공여 중단 전까지 확보한 설비 등을 바탕으로 트랜지스터 생산 공장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4년부터 트랜지스터가 본격 생산되며 기존의 진공관을 대체해 갔습니다. 통신 기기 등 군사장비를 시작으로 라디오와 같은 소비재에도 트랜지스터가 공급됐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트랜지스터 장착으로 크기가 줄어들고 가벼워진 라디오를 ‘반도체’라고 부르며 높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재봉틀, 자전거, 손목시계와 함께 1960년대 중국인들이 가지고 싶은 4대 물품에 오르며 전자산업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습니다. 중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2세대 컴퓨터도 이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등 고급 전자기기에도 사용됐습니다.

문화대혁명에도 멈추지 않은 반도체 산업

1958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발명한 반도체 집적회로(IC)는 1965년 12월 중국과학원이 처음 개발했습니다. 품질과 기술 수준은 미국 등 서구 국가에 비해 낮았지만 1966년부터는 실제 양산에 돌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같은 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이 한창인 시기였지만 반도체 산업만은 꾸준히 육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중국 수뇌부 내에 있었습니다. 중국 전자공업부는 1968년 베이징 둥광공장과 상하이 우센공장 등 국영 반도체 생산공장을 새로 설립했습니다. 두 공장은 1970년대까지 중국의 반도체 생산을 이끌었습니다. 1970년대 초 연 수십 만개 수준이던 중국 내 IC 생산량은 1970년대 말, 둥광공장 한 곳에서만 500만 개를 생산하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반도체 산업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국 공산당의 이론가 천보다는 1960년대 말 마오쩌둥에게 ‘전자중심론’을 제안했습니다. “전자기술을 중심으로 공업혁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지만, 노력만 하면 늙은이들도 후미진 골목에서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도 담겨 있었습니다. 때문에 전문화와 대형화를 추구하던 반도체 공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는 반도체 생산능력과 품질 하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만 전자중심론으로 전자산업 및 관련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1970년대 중반부터 중국 내에서 반도체 관련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에만 있던 반도체 생산 공장도 전국 각지에 40여 곳이 생겼습니다. 회로 설계 및 집적 능력도 꾸준히 향상돼 집적회로의 집적도가 7년 만에 소규모집적(SSI)에서 대규모집적(LSI)까지 발전했습니다.

해외 반도체 기술 도입 시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의 긴장이 완화된 데탕트 시기를 활용해 서구에서 반도체 기술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과 국교정상화가 추진되던 1973년에는 중국 반도체 전문가 10여 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히타치와 도시바 NEC 등을 방문했습니다. NEC와는 구체적인 기술 교류까지 논의됐지만 이후 정치 사정과 자금 문제로 최종 결렬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중국 스스로 안간힘을 써서 반도체 산업을 육성했지만, 미국이나 일본 등 당시 세계 산업계를 주름잡고 있던 반도체 기업들에는 크게 뒤처진 수준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등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기술 유출은 물론 관련 장비 수출까지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 이후인 1980년대 중국도 반도체 기술의 후진성을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해외 기술 도입에 나섰습니다.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의 등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이미 1950년대부터 반도체 국산화에 나서며 산업 육성에 꾸준히 힘써왔죠. 한국 대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양산하기 시작한 80년대 이후부터 자체 기술에서 조금씩 뒤처졌지만, 이제는 ‘반도체 굴기’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매섭게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