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ESG 관련 뉴스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ESG 펀드로 자금이 몰린다든가 ESG 채권 발행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부터 기업마다 ESG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이사회 산하에 ESG 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는 등 내용도 다양합니다. 심지어 국내 유수의 법무법인과 회계법인까지 나서 ESG 관련 웨비나 개최에 열을 올리고 있고, 언론사 주도의 ESG 교육 프로그램과 민간 네트워크까지 만들어지는 등 말 그대로 ‘ESG 열풍’입니다.
아이러니한 건, ESG가 이처럼 주목받는 ‘핫 이슈’로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는 점입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ESG나 CSR이나 그게 그거 아냐?’라는 인식입니다. 물론 각각 다루는 주제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CSR의 국제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ISO 26000에서 규정한 CSR의 핵심 주제는 ①조직 지배구조(Organizational Governance) ②인권(Human Rights) ③노동 관행(Labor Practices) ④환경(Environment) ⑤공정운영관행(Fair Operating Practices) ⑥소비자 이슈(Consumer Issues) ⑦지역사회 참여와 발전(Community Involvement and Development) 등 총 7개로 나뉩니다. 토픽만 보면 ESG에서 이야기하는 환경(④), 사회(②③⑤⑥⑦), 지배구조(①)와 잘 대응이 되지 않나요? 이렇게 구성 요소만 놓고 봤을 때 서로 잘 매치가 되다 보니, CSR이나 ESG가 비슷하다고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CSR과 ESG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누구의 ‘관점’이냐는 것이죠. CSR은 기업이 고객과 협력회사, 지역사회, 시민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모든 활동을 전반적으로 아울러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반면 ESG는 철저하게 ‘투자자’ 관점의 개념입니다. 투자자들이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과거와 달리 재무적 정보 외에 비재무적 요소까지 고려하겠다고 나서면서 대두된 것이 바로 ESG입니다.
혹시 ‘누구의 관점이냐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구글 검색창에 ‘관점의 차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이미지 검색을 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구글 ‘관점의 차이’ 이미지 검색 캡처본
관점의 차이는 비단 시각적 이미지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용어에 대한 개념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관점, 어떤 맥락에서 나온 개념인가를 이해해야 그에 따른 질문과 요구 사항에 제대로 답할 수 있습니다. 자칫 이 부분을 놓친다면 엉뚱하게 ‘동문서답’을 하면서 헛다리를 짚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ESG가 투자자 관점의 개념이란 말은, ESG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투자자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투자의 사전적 정의는 ‘미래의 수익을 얻기 위해 현재의 소비를 유보하고 각종 자산을 매입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투자의 궁극적 목표는 ‘수익 창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블랙록을 포함한 자산운용사와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의 목표는 ‘장기 수익률 극대화’라는 말로 보다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원금 손실 가능성을 최대한 피하는 것, 즉 리스크 최소화입니다.
투자자들이 기업들을 향해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하라”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하라” “폐기물을 줄여라” 등의 주문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100% 순수한 마음에서 지구를 살리고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싶어서 일까요? 물론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전부일 리도 만무합니다. 투자자들의 이 같은 요구는, 현재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면서, 그간 화석연료 기반의 경제성장 하에서 자신들이 투자해 왔던 자산에 막대한 재무적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즉, 자칫하면 투자 원금 손실이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투자자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죠.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맨 먼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뭘까요? 바로 자신들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얼마나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ESG 측면에서 중대한 재무적 손실이 예상되는 리스크에 대한 비용을 산정해야겠죠. 투자자들이 기업들에 ESG 관련 공시 수준을 높이라는 요구를 하는 이유입니다. 당장 자신들의 투자 자산이 좌초자산이 될 지도 모르니, 관련 리스크가 얼마나 되는지, 또 이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기업들에 밝히라는 겁니다.
기업 입장에선 사실 좀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만 하더라도 이미 10년도 넘게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면서 필요한 정보들은 다 제시해 온 것 같은데, 대체 뭘 더 하라는 걸까 싶기도 하죠. 하지만 여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지금까지 주로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 글로벌 보고 이니셔티브)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됐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GRI 표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채택된 글로벌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입니다. 하지만 투자자뿐 아니라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작성된 가이드라인이다 보니, 투자자들은 이것만으론 중대한 재무적 임팩트가 예상되는 ESG 리스크를 산정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가령, 기업이 지역 사회에 얼마나 기부를 하고 어떤 사회공헌을 펼쳤는지 같은 내용은 해당 커뮤니티나 시민단체에는 매우 가치 있는 정보지만 투자자에게 동일한 정도로 가치가 있는 정보는 아닙니다. 냉정한 자본주의 논리로 무장한 투자자들은 막연하게 가슴 따뜻한 이야기보다는 재무적 손실이나 이익과 관련된 정보에 보다 직접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ESG 관점에서 투자자들이 유용하게 느끼는 건 리스크를 ‘정량화’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 환경, 사회 측면에서 중대한 재무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리스크가 얼마나 되고, 이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지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측정 기준과 항목에 따라 투명하게 공개해 달라고 기업들에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ESG와 관련해선 IFRS(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 국제회계기준)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단일한 국제 기준은 아직까지 없습니다.1) 다만, 현재 상태에서 블랙록을 위시해 가장 많은 투자자들이 지지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SASB(Sustainability Accounting Standards Board)2) 기준입니다.
1) 지난 2020년 9월 IFRS 재단은 Sustainability Reporting에 대한 자문 보고서(Consultation Paper)를 발표하며 지속가능성 보고를 위한 기준 제정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2) SASB는 2020년 11월 IIRC(International Integrated Reporting Council, 국제통합보고위원회)와의 합병을 선언했습니다. 두 기관은 2021년 중반 Value Reporting 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해 보다 종합적인 기업 비재무정보 공시 표준을 제공한다는 계획입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보고할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2011년 설립된 SASB는 투자자들에게 비교 가능한(Comparable) 비재무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투자자들이 산업별로 중요한 ESG 이슈에 대해 성과를 비교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드는 걸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지난 2018년 77개 산업별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만들어 발표했죠. GRI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 시장에 뒤늦게 등장했지만, 현재 SASB는 많은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산업별로 중대한 이슈(Materiality)에 집중해 재무적 성과와 연계된 ESG 요소를 중심으로 간결한 지침을 내놓음으로써 동종 업계 내 기업 간 비교가 가능한 지표를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비교 가능성’은 SK그룹의 핵심 가치인 SV(Social Value)에 비춰 ESG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SV는 기본적으로 화폐화를 위한 측정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 회사는 지난해 저전력 반도체를 통해 얼마만큼의 소비자 편익(전기요금 절감)과 얼마만큼의 환경영향저감(CO₂절감) 효과를 거둬 OO억 원의 SV 성과를 창출했다고 대내외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죠. 우리가 기업활동을 영위하며 하는 일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수치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SV 측정은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한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우리의 SV 측정 방법론이 SK 고유의 방법론이다 보니, 여기서 나온 정보를 토대로 다른 기업과 비교해 투자 의사결정을 내리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선 A회사 주식을 사느냐, 혹은 B나 C회사 주식을 사느냐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동일한 기준에서 비교할 수가 없다면 유용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우리가 SV 외에 투자자 관점에서 ESG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3)
3) 이와 관련해 SK 그룹은 지난 2019년 6월 출범한 VBA(Value Balancing Alliance)의 창설 멤버로 참여해 SV 측정 체계의 글로벌 표준을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VBA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며 기업 간 비교가 가능한 표준화된 SV 측정 방법론 개발을 위해 바스프(BASF), 노바티스(Novartis), 라파지홀심(LafargeHolcim) 등 다국적 기업들 주도로 형성된 글로벌 협의체입니다. 현재 우리 회사 SV추진 산하 구성원 한 명이 독일 VBA로 파견돼 COO(Chief Operating Officer)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투자자들이 SASB 기준과 함께 기업들에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 하나가 또 있습니다. 바로 TCFD(Task Force on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s, 기후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 권고안입니다. SASB와 함께 주요하게 요구되는 TCFD 프레임워크를 잘 살펴보면, 투자자들이 ESG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TCFD 권고안은 크게 4가지 영역으로 제시된 프레임워크에 따라 기후변화와 관련한 리스크 및 그에 따른 기회 요인을 식별해 예상되는 재무적 영향을 공개하라는 것인데요, 프레임워크의 맨 처음 나오는 게 지배구조(Governance)입니다. 그 다음으로 전략(Strategy), 리스크 관리(Risk Management), 지표와 목표(Metrics and Targets) 순서로 돼 있죠. 거버넌스가 프레임워크의 맨 처음 나왔다는 건, 기업의 최상위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최종 책임을 묻겠다는 뜻입니다.
특히 투자자들은 이사회 멤버 중에서도 사내이사가 아닌 사외이사들이 ESG 이슈에 대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SG는 대부분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관리해야 할 이슈이기 때문입니다. 경영진들은 단기 인센티브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감시하는 역할을 사외이사들이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죠. 블랙록이 기후 리스크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거나 관련 공시를 소홀히 한 회사들에 대해 주총에서 이사 재선임에 반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흔히 ESG는 투자자들을 상대하는 IR 부서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만드는 CSR 부서 등 단일 부서차원에서 대응하면 되는 문제라고 여기는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ESG를 둘러싼 또다른 오해 중 하나는 리스크 관리 잘 하고 운영 효율 높이는 게 ESG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현업에서 ESG 이슈를 다루다 보면 탄소를 얼마나 줄였는지, 폐기물은 얼마나 줄였는지 등의 지표 관리 측면으로 접근하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TCFD 프레임워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해를 풀 수 있습니다.
TCFD 프레임워크에서 보면, 현업에서 챙기는 지표와 (감축) 목표는 가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맨 처음에 지배구조가 나오고 그 다음으로 제시되는 게 전략이라는 점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투자자들이 ESG를 기업의 장기 경영전략에 반영돼야 하는 이슈라고 본다는 뜻입니다. ESG 전략을 실행하려면 운영과 전략 측면에서 대규모 변화가 필요하고, 이 변화는 이사회와 함께 최고경영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거죠. 그 전략 하에서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맥락 하에 지표와 목표가 나오는 겁니다. ESG를 단순 오퍼레이션 이슈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 전략으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SG 측면의 성과에 비춰 기업을 평가하려는 투자자들의 움직임은 갈수록 강해질 것입니다. 그만큼 ESG 경영에 대한 요구도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지겠죠. ESG 활동을 통해 차별화된 가치를 창출하려면, 단순히 운영 효율성 제고만을 목표로 삼아선 안됩니다. ESG 리스크와 기회 요인을 기업의 장기 전략에 반영하고, 그 전략에 맞춰 의미 있는 목표치를 세워놓고 리스크를 관리하며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 나가야 합니다. 진정한 ESG 경영은 특정 부서 직원 몇몇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강력한 리더십 하에 경영 활동 전반에 걸쳐 ESG 리스크와 기회 요인을 반영하려는 전사적 노력이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SK하이닉스 구성원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