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코로나19 사태. 그 전염 확산의 변수는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모든 뉴스마다 드러나고 있다. 당황한 우리에게 지금의 이 시련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전염병의 확산은 예측할 수 있을까?’ ‘그 변수인 인간 행동은 계산할 수 있을까?’ 촘촘한 데이터 사회를 살아가지만, 여전히 역병 앞에서는 무력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 WoW 공식 홈페이지
2005년 9월 13일은 어떤 팬데믹(Pandemic, 감염병 대유행)의 시작으로 기억되는 날이다. 발생지는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속 가상 세계. WoW의 제작사 블리자드는 업데이트를 통해 야심적인 '던전(지역)’ 퀘스트를 도입한다.
새로 생성된 그 던전에는 ‘학카르’라는 최종 보스가 있었는데, ‘오염된 피’라고 불리는 디버프(debuff, 능력치 약화 마법)를 걸어 유저들을 공격하는 몬스터였다. 이 공격을 당한 캐릭터는 짧은 시간 동안 일종의 병을 앓게 돼 방치할 경우 죽게 된다. 블리자드는 이 스킬에 ‘전염성’이라는 요소를 더해, 플레이어는 물론 병을 퍼뜨리는 보스까지 던전 안의 모든 캐릭터가 공격대상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던전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염된 피’가 가진 전염성을 역으로 이용해 보스인 학카르가 스스로 감염되도록 만드는 꼼수(?)뿐이었다.
여기까지는 그저 손에 땀이 날 만큼 영리한 게임 플레이를 요구하는 고난도의 설정에 불과했다. 이 디버프는 던전을 벗어나거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었기 때문이다.
▲ 사냥꾼 캐릭터가 펫(Pet)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모습.(출처 : WoW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문제는 사냥꾼 캐릭터들이 데리고 다니던 애완동물 ‘펫’에 있었다. 게임에서 펫은 보통 아이템 함에 넣어 뒀다가 필요할 때만 소환해 사용한다. 한 유저가 학카르 던전 안에서 감염된 펫을 넣어뒀다가, 던전을 빠져나간 뒤 마을에서 소환했다. 그러자 펫이 감염된 상태 그대로 마을을 활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버그 현상이라기보다 애초에 블리자드 측이 테스트 단계에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사용자 행동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시작점으로 알려진 우한 수산시장에서도 이런 예상외의 전개가 벌어졌을 것이다. 누가 0번 감염자인지는 이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동물을 매개로 잠복기를 거쳐 그렇게 도심으로 내려왔을 터. 누구의 의도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 사람의 별 뜻 없는 행동 하나를 통해 바이러스는 방출된다.
‘오염된 피’를 통한 디버프 저주의 효과는 단 3초로 매우 짧았다. 그 사이에 숙주를 찾아 옮겨가지 않으면 자연 소멸하는 셈. 하지만 NPC(Non-player character, 유저가 아닌 게임 속 등장인물)들이 문제였다. WoW의 NPC들도 ‘오염된 피’에 대거 감염되었는데, 이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므로 죽지 않는다. WoW 속 감염된 NPC들은 체력이 회복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감염돼 디버프가 걸려도 자신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NPC들이 일종의 슈퍼 전파자가 된 것.
▲WoW 게임 내 대도시 오그리마, NPC인 경비병들이 곳곳을 지키고 있다.(출처 : WoW 공식 홈페이지)
그러자 당장 게임 속 사회의 약한 고리인 초보자 캐릭터들부터 쓰러져갔다. 최종 보스를 만났을 때나 겪어볼 법한 재난이 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몰랐던 낮은 레벨의 플레이어들은, 평소처럼 무기를 팔고, 퀘스트를 나누거나 말을 걸기 위해 NPC에 접촉하다가 이유도 모른 채 디버프에 휩쓸려 나갔다. ‘만렙’도 움찔할 만 한 저주가 평범한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현실의 지역사회 감염 양상을 살펴보면 무증상이나 경증의 젊은 보균자가 일체의 자각 없이 순진무구한 일상을 보내면서 전파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태평한 모습은 마치 NPC들의 모습과도 같다.
그렇게 일상적인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해지자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동안에도 감염 지역에 접근하는 저레벨 초보자들에게 경고하는, 일종의 자생적인 ‘방역 활동’이 시작된 것.
▲힐러(아래 가운데)가 팀원들을 치유하고 있는 모습(출처 : WoW 공식 홈페이지)
타인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 ‘힐러’들은 적극적으로 병에 걸린 이들을 회복시켜주며 의료진의 역할을 자처했다. 사실 이들의 행위는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었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했다. 치료 불능의 동료 옆을 떠나지 않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는 게임을 다시 시작해도 캐릭터는 죽은 그 자리에서 소생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감염과 죽음의 무한 루프를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감염된 NPC를 확인하는 확진자 검사도 벌어졌다. 유저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감염되었다며 적극적으로 알려 감염 확산을 방지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스스로 자가격리를 하는 사람들,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조용한 곳에 은둔하거나 심지어 게임에 접속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유저까지 등장했다.
동시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호기심에 감염 지역을 잠깐 구경하다가 확진자가 되는가 하면, 이 혼란을 비즈니스 기회로 보고 포션(약)을 파는 사기꾼이 등장하고, 나만 당할 수 없다며 마을을 활보하면서 남들을 전염시키는 민폐형 슈퍼 전파자도 나타났다. 이들은 일부러 방역망과 힐러들을 회피하고 심지어 테러 행위에 가까운 행동도 보였다. 저레벨 플레이어가 대피해 있는 곳에 일부러 찾아가 감염시킨 것.
당황한 WoW의 제작사 블리자드는 사태 파악에 나섰다. 프로그래밍 된 코드에 불과하다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상 게임 속은 이미 하나의 사회. 그곳을 만든 창조주인 블리자드도 사용자 동선과 전염병의 파급효과를 완전히 파악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저레벨 플레이어를 격리, 피난시키고 감염된 고레벨 플레이어를 이동 금지하는 등 나름의 검역 활동을 벌였지만, 바이러스 종식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블리자드는 사태 발생 일주일 만에 ‘하드 리셋(Hard Reset)’이라는 결단을 내린다. 즉 서버 자체를 폐쇄하기로 한 것.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후 WoW는 한 달 동안 여러 번의 핫픽스(hotfix, 버그 수정을 위해 긴급 패치를 배포하는 것)를 거쳐 겨우 정상화되었다. 설령 신의 노릇을 할 수 있더라도 팬데믹을 끝내는 일은 이렇게 힘들다.
동물 감염이 기폭제가 되고, 인구 밀집으로 감염 폭발이 일어나자 대도시에서 지방으로 유저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약한 이들의 피해가 특히 컸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많은 역학 연구자들을 자극했다. 전염을 둘러싼 인간 군상의 행동 원리에 대한 연구자료로 삼아 다양한 논문이 만들어졌다.
역학은 의료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의 충격에 사회가 반응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기에 일종의 데이터 학문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가치판단이 순간적으로 동원되므로 행동 심리학도 될 수 있다.
▲중국 웨이보에서 6,00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해시 #魔兽世界堕落之血事件(WoW 오염된 피 사건)# (출처 : 웨이보 웹사이트 화면 캡처)
패닉의 발생, 말을 듣지 않고 감염을 확산시키는 슈퍼 전파자의 존재 등은 전염병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된다. 사람들이 실제 전염 상황에 어떤 행동을 보일지에 대한 실험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얼핏 훌륭한 실증 데이터로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만 하더라도 중국 웨이보에서 ‘오염된 피’ 사건을 다룬 해시 #魔兽世界堕落之血事件(WoW 오염된 피 사건)#는 6,00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하지만 생명이 좌우되는 팬데믹을 게임의 가상세계에 비유하는 일 자체가 철없는 일이라는 비난도 물론 뒤따랐다. 게임 속에서의 사람들의 행동에는 절실함도 절박함도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게임을 현실에 빗댈 수는 없는 일이다. 게임 속에서 장난에 앞장선 이들이라도 그들이 현실에서는 누구보다 앞선 이타적 행동으로 타인을 구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게임 속의 선인이라도 가족과 자신이 닥친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실제 2005년 사건 직후 미국 질병관리본부(CDC)가 블리자드에 자료 제공을 요청하며 연락했는데, 블리자드 측은 게임 속 버그였을 뿐이라며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전염병 창궐의 원인을 찾는 일도, 통제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려주는 사례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역학조사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해진 세상을 살고 있다.(출처 : 코로나 맵 애플리케이션 화면 캡처)
만약 인간 행동도 게임처럼 전지적 시점의 관찰이 가능하다면, 역학 조사의 결과 역시 계산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21세기의 존 스노우(19세기에 방문 조사와 통계로 콜레라를 잡아낸 역학의 아버지)는 방문 조사 대신 IoT의 센서 네트워크와 온라인에서의 행동 이력, 또는 지오펜스(Geofence) 데이터를 활용해 가설을 세울 수 있을 터. 미국 질병관리본부가 ‘오염된 피’ 사건의 기록부를 원했던 것도 그런 관찰이 가능해지는 시대를 대비해, 범주화될 수 있는 인간 행동을 추려보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일종의 ‘미리 보기’를 해보고 싶었던 셈이다.
블리자드는 이후 그들의 또 다른 게임인 ‘하스스톤(Hearthstone)’에서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학카르를 카드로 만들고 게임 요소 중 하나로 전염을 소환하는 등 '오염된 피' 사건을 모티브로 차용해 유저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게임은 결국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체험하게 하고, 그것을 다시 전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명작 게임의 조건이기도 하다. 블리자드는 역학 시뮬레이션의 발전에 데이터로 기여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오랫동안 살아남을 하나의 이야기를 남겨 주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나면 그곳에서 이야기를 찾아낸다. ‘오염된 피’ 사건 역시 그러한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겼다. 지금 인류에게 더 없는 시련을 안기고 있는 코로나19는 예측 불가능했기에 재난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그리고 또 다른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고 우리에게 남겨진 교훈을 이야기하게 되는 날이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