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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무역전쟁에도 멈추지 않는 중국 반도체굴기

Written by 노경목 기자 | 2018. 12. 18 오전 12:00:00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이가 없으면 입술에 의지한다는 의미의 한자성어입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로, 특정한 기능이나 수단이 사라졌을 때 다른 방법으로 변통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난달 말 중국과학원은 주목할만한 발표를 했습니다.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최첨단 노광기를 국산화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인데요. 미중 무역전쟁으로 반도체 장비 수입이 막힌 중국이 ‘치망순역지’ 전략으로 결국 자체 장비 개발에 성공하며 위기 돌파에 나선 것입니다.

무역전쟁 속에 탄생한 자체 개발 노광기

중국과학원이 개발한 노광기의 미세화 공정 수준은 22나노미터(㎚·10억분의 1m)로, 회로를 두 번 그리는 더블패터닝 기법을 사용하면 10㎚까지 미세화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현존하는 노광기 중 가장 성능이 좋은 네덜란드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기)는 7㎚ 공정까지 가능합니다. 중국 과학원 발표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의 노광기를 자체 개발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이 같은 발표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미국 반도체 장비 및 관련 소프트웨어의 중국 수출이 제한된 가운데 내려진 조치라 눈길을 끕니다. 미국은 10월 말부터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와 같은 대표적인 자국 반도체 장비업체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때문에 아직 완전히 장비를 구비하지 못한 푸젠진화, 허페이창신 등 D램 제조업체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노광기 개발이 미국의 장비 수출 제한 조치 등 각종 제재를 자체 장비 개발로 우회하는 것에 성공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중국 매체들은 “그 누구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을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노광기 개발에 참여한 중국 과학원의 후숭 연구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국산 반도체 장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섰다. 이는 해외의 각종 제재를 뚫고 반도체 산업을 성공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해외의 장비 수출 금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반도체 제조 설비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노광기 자체 제조에 성공하면서 수출 금지에 대한 우회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으로 노광기 시장 최강자 노린다

▲ ASML의 EUV 노광장비 (출처: ASML)

 

눈여겨볼 것은 노광기의 원리입니다. 중국이 개발한 노광기는 파장 365㎚의 광원을 사용했습니다.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반도체 노광기의 광원 파장은 193㎚, ASML이 만드는 EUV의 파장은 13.5㎚입니다. 빛을 쪼여 웨이퍼에 회로패턴을 찍어 넣는 노광기의 원리상 파장이 가늘수록 더 미세화된 공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기존 노광기 대비 훨씬 파장이 넓은 광원을 이용해 미세화 공정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과학원은 구체적인 원리는 공개하지 않고 “광 분별력을 높였기 때문”이라는 설명만 내놨습니다. 중국이 제작한 노광기가 실제로 넓은 파장으로 미세 공정에 성공했다면 이는 노광기 산업 자체를 새로 재편할 수 있는 기술에 해당합니다. 지금까지 광원의 파장이 짧아지면서 기술 난이도와 노광기 제조원가는 빠르게 올라왔습니다. 최근 중국 SMIC가 구매한 ASML의 EUV는 1억 2000만 달러(약 1360억 원)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중국 과학원은 넓은 파장으로 노광기를 제조하면서 이 같은 제조 가격도 크게 낮아졌습니다. 일각에서는 제조원가가 2000만 위안(33억 원)을 밑돌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옵니다. 실제로 양산에 성공하면 ASML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미세공정 노광기 시장이 재편될 수 있습니다. 중국 과학원은 “넓은 파장을 이용한 만큼 더 쉽게 미세화 수준을 진척시킬 수 있다”라며 “조만간 ASML에 맞먹는 수준의 노광기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같은 노광기가 실제 생산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것과 양산에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여러 업체들이 ASML에 뒤지지 않는 노광기를 개발했다며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업체에 판매를 시도했지만 실제 도입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기계 자체로는 정밀한 노광 작업이 가능하더라도 전체 공정 흐름 속에서 정확도와 속도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과학원의 노광기 개발 발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단순히 반도체 제조뿐 아니라 소재와 장비부터 적극적인 개발에 나서면서 전체 반도체 생태계 단계마다 예상치 못한 돌파구를 통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은 강점입니다. 하지만 산업 전반에 투자가 분산되고 있다는 것은 약점입니다. 중국 과학원의 이번 노광기 개발 역시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얼마가 들어갔는지는 알기 힘듭니다. 수백조 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했다지만 여러 분야에 분산되면서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일단 당분간은 중국산 노광기가 어느 정도의 성능을 낼지 지켜볼 일입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