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멸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연상호 감독은 영화 <부산행>에서 좀비가 창궐한 열차 안 모습을 실감 나게 그려냈다. 특히 승무원이 좀비로 변해가는 모습이나, 구조 활동을 나온 군인들이 좀비로 변해 기차역 안의 민간인들을 덮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오싹하다. <부산행>이 끝난 이후의 한국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감독도 관객의 마음을 알았는지 <부산행>의 세계관을 이어, 4년 후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영화 <반도>에 담았다.
배경은 공유하지만, 주인공은 다르다. 반도의 주인공은 좀비 사태 당시 운 좋게 홍콩으로 피난을 간 한정석(강동원 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당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은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아간다. 이런 이들에게 범죄조직이 다가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국 오목교에 2,000만 달러가 들어 있는 트럭을 가져오는데 문제가 생겼으니, 이를 가져오면 돈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거부할 수 없는 조건에 몰래 한국에 숨어 들어간 이들이 마주한 것은 원자폭탄이라도 맞은 듯 황폐해진 서울이었다.
영화 속 서울은 말 그대로 ‘박살’나 있다. 황량해진 인천항과 고가도로에서 망가진 채로 버려진 차들, 유리가 다 깨진 채 방치된 고층 빌딩, 무너진 새빛둥둥섬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풍경이 폐허로 등장한다.
▲ <반도> 스틸 이미지(사진제공 : NEW)
어떻게 이런 장면을 찍을 수 있었을까? 답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바로 ‘컴퓨터 그래픽(Computer Graphic, 이하 CG)’이다. 이제는 CG를 안 쓰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이지만, <반도>에서는 특히 CG를 많이 사용했다. 연상호 감독이 온라인으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이번 영화는 CG로 ‘떡칠’을 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감독이 이 같은 발언을 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 한 편은 1,500~2,500컷으로 구성된다. <반도>에는 2,300여 컷이 쓰였으며, 그 가운데 CG가 사용된 컷은 1,270컷 정도다. 절반 이상을 CG가 쓰인 컷으로 채운 셈이다.
현재는 CG를 절반 가까이 사용할 만큼 기술이 발전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1993년에 개봉한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한국에서 가장 먼저 CG를 이용한 영화. 이 영화에는 1분 30초 분량의 짧은 특수효과 장면만이 담겼다. 그로부터 1년 후 개봉한 영화 <구미호>는 10분 정도의 CG 장면을 담았고, 덕분에 본격적인 한국 최초의 CG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CG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CG를 사용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원래 영화에서는 CG가 시각 효과(VFX, Visual Effect)를 얻는 데 사용됐다.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찍기 위했던 것. 사람이 유령을 통과하고, 귀신이 벽에서 등장하는 장면을 CG로 쓴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CG는 점점 특수효과(SFX, Special Effect)를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화 <쉬리>의 도심 폭파 장면이나 <해운대>의 쓰나미 장면, <타워>의 화재 장면, <백두산>의 화산폭발 장면 등이 그 예다.
<반도>에서는 ‘Full CG(실제 촬영 없이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만든 이미지)’ 장면도 유심히 봐야 한다. 몇 번의 소동 끝에 마침내 돈이 담긴 트럭을 찾은 한정석 일행은 원래는 시민들을 구출하는 부대였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631부대로 인해 죽음의 고비에 몰리게 된다.
홀로 살아남은 한정석은 다른 생존자 그룹 민정(이정현 분)의 가족인 준(이레 분)과 유진(이예원 분)에게 구조된다. 이때 준이 선보이는 신기에 가까운 운전 기술과 자동차 추격 장면은 100% CG다. 실제 도시를 스캔해서 3D 모델로 만들고, 차량과 건물, 주변 사물 역시 모두 3D 모델로 만든 다음, 도시 배경에 배치해서 한땀 한땀 영상으로 만들었다.
▲ <반도> 스틸 이미지(사진제공 : NEW)
<반도>에는 이러한 Full CG 영상이 많이 들어갔다. 대규모 군중 신의 좀비와 차량 추격전 장면 모두 Full CG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전에도 한국 영화에서 Full CG 영상이 사용된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액션 장면 전체를 이렇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었다. 실사 영화에서 전체 액션 장면을 CG로 만들면 위화감 즉, CG 티가 많이 날 수 있기 때문. 이러한 경우 관객의 몰입감을 확 떨어뜨릴 수 있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Full CG 장면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감독의 결단이다. 영상에 많은 요소들을 3D 모델링해 집어넣으면 CG 퀄리티는 좋아질 수 있다. 다만 제한된 기간 안에 그걸 영상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해상도가 높고 표현되는 요소가 많으면 영상 작업에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제때 결과를 내놓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주어진 예산과 기간 안에 만들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그의 결단을 뒷받침한 것은 컴퓨터 성능이다. 영화 CG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컴퓨터 성능을 요구하는 분야다. 컴퓨터 성능을 좌우하는 요소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 중심에 있는 ‘코어(Core)’다. 이곳에서 컴퓨터의 모든 연산이 이뤄지기 때문에, 코어가 많이 탑재될수록 성능은 좋아진다. 그래서 세계적인 CG 스튜디오에서는 수십 만개의 코어가 내재된 최고급 슈퍼컴퓨터를 사용할 정도. 이번 <반도>를 제작할 때는 40개의 코어를 가진 400대의 컴퓨터를 사용했다. 이 컴퓨터들을 묶어서 렌더 팜(Render Farm, 영화에 사용하는 CG를 생성하기 위해 여러 대의 컴퓨터를 이용해 컴퓨터 클러스터를 구성한 것)을 만들고, 5만 6,282fps(프레임)를 뽑아냈다.
예전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을까? 영상 마지막 작업을 책임지는 렌더링(Rendering, 2차원 혹은 3차원 데이터를 사람이 인지 가능한 영상으로 변환하는 과정) 작업은 아직까지 CPU 성능에 크게 의존한다. 1992년에 출시돼 당시 할리우드 영화 CG 작업에 널리 쓰이던 실리콘 그래픽스의 ‘인디고2 워크스테이션’ CPU 성능은 300MFlops¹(메가플롭스, 1초당 100만 번의 연산이 가능한 속도)다. 2019년 출시된 인텔 제온 시리즈의 ‘플래티넘 8280M’ CPU 같은 제품은 성능이 1992년 대비 5,376배 증가한 1612.8GFlops(기가플롭스, 1초당 10억 번의 연산이 가능한 속도)에 달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클라우드 팜(영화에 사용하는 CG를 생성하기 위해 클라우드 컴퓨팅 체계 형태로 운용하는 것)을 쓰는 회사도 있고, GPU 성능이 좋아지고 렌더링 소프트웨어가 GPU 렌더링을 지원하면서, GPU 렌더 팜(GPU 기반의 컴퓨터 클러스트 구성)을 쓰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1) Flops(플롭스) : 초당 수행할 수 있는 부동소수점 연산의 횟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연산속도를 나타내는 척도.
폐허가 된 서울, 차량 추격전 장면 만큼이나 눈길을 끈 CG 장면이 또 있다. 탈출을 위해 주인공과 민정 가족은 631부대 아지트에 잠입하기로 한다. 달러가 들어있는 트럭을 되찾아 인천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국 범죄 조직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이때 일군의 좀비 행렬이 631부대 쪽으로 향한다. 탈출하는 자동차 앞을 막아서는 좀비 행렬. 이 수많은 좀비도 당연히 CG다. 영상에서 알아서 움직이는 이런 캐릭터를 ‘디지털 배우’(3D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로 실제 배우처럼 작동하도록 만든 가상의 배우)라고 부른다.
▲ <반도> 스틸 이미지(사진제공 : NEW)
한국 영화에서 디지털 배우는 익숙한 존재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디지털 캐릭터를 이용해 10만 명의 중공군이 몰려오는 모습을 연출했다. 영화 <중천>에서도 디지털 배우가 등장한다. 이후 영화 <디워>의 이무기, <미스터고>의 고릴라, <대호>의 호랑이 등 가상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기술은 <반도>에도 이어져, 대규모의 좀비들이 떼지어 움직이고 연기한다. 탈출 장면에서 차량 위로 쏟아지는 좀비 떼는 이 영화의 백미다.
<반도>에서는 80% 이상의 공간이 CG로 만들어졌다. 밤에는 좀비가 잘 활동하지 않는다고 설정한 탓에 등장인물들은 밤에 활동하는 신이 많다. 이 장면들도 대부분 CG 처리를 했다. 낮에 찍은 다음, 밤처럼 보이게 만든 것.
자연스러운 CG 처리 만큼 영화 제작 환경도 속도감 있게 바뀌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방영돼 인기를 끈 SF 드라마 <더 만달로리안>은 디지털 가상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실사를 찍고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한 것이 아니라, 아예 배경 영상을 세트장에 비추고, 그 앞에서 바로 영상을 찍는 방법이다. 이는 추후에 합성할 필요가 없어 제작비용과 시간이 단축되고, 연기자는 실감나는 배경 덕분에 연기하기에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일본 기업 에이벡스 테크놀로지스와 엑시비가 공동 개발한 애니메이션 제작 툴 ‘Anicast Maker’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VR 공간에서 연기해 가상의 캐릭터로 연출되는 것을 토대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이다.
이처럼 CG기술과 디지털 가상 스튜디오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한국 영화 CG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주로 할리우드 영화보다 못하다는 평가지만, CG 제작에 들이는 비용을 비교하면 이만큼의 퀄리티를 구현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영화 CG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컴퓨터도 뼈가 빠질 정도로 일해야 하는 노동과 컴퓨팅이 집약된 분야다. 반도체 기술이 대단히 빠르게 발전하긴 했지만, 관객의 눈높이는 더 빠르게 높아졌다. 영화 제작 관계자들은 아무리 컴퓨터가 좋아져도 표현해야 할 것이 점점 많아져 영화를 한 편 제작할 때마다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 영화 CG는 빠르게 성장해 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과 <설국열차>는 해외 팀의 도움을 받아 CG 작업을 했지만, <기생충>에선 한국 덱스터 스튜디오의 역량으로 CG를 처리할 수 있었다. 일부 영역에서는 이제 다른 나라 부럽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
기술이 좋아지면 그만큼 표현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반도체 기술이 성장하는 만큼, 제작 환경 변화와 함께,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르게 CG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때가 되면, 우린 또 어떤 멋진 영화를 만나게 될까?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