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사물인터넷(IoT), 5세대(5G) 이동통신 등이 대표적인 키워드죠.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쏟아낸다는 사실입니다. 대규모 데이터는 ‘데이터센터’에 저장되며,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이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데요. 과거에도 데이터센터는 늘 존재했으나 지금은 저장할 데이터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데이터 입출력(I/O) 속도가 중요해진 이유이기도 하죠.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가 낸드플래시 기반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업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 이유에는 ‘과거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경험적 사고에 기반을 둔 내용이 많습니다. 기업용 스토리지, 이른바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HDD가 오랫동안 사용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 시장 고유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의 영향이 컸습니다. HDD가 등장하기 이전, 데이터센터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았던 시절에는 마그네틱테이프를 저장매체로 사용했습니다. 이후에는 어른 몸통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광디스크가 사용됐지만, 데이터를 읽고 쓰는 속도가 느려서 HDD가 상용화된 이후에는 반영구적으로 데이터를 저장할 때만 사용됐습니다.
이들 스토리지의 가장 큰 특징은 안정성입니다. 금융을 비롯해 기업의 민감한 자료를 다루다 보니 천재지변과 같은 상황에서도 데이터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HDD가 개발된 이후에도 마그네틱테이프가 활용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죠. 그러다가 점차 데이터가 늘어나면서 HDD를 활용하게 됐고 마그네틱테이프나 광디스크는 보조적으로 쓰였습니다. ‘1차 데이터는 HDD, 2차 데이터는 마그네틱 혹은 광디스크’라는 공식이 생긴 것입니다.
▲ HDD 스토리지 시장의 강자인 EMC도 결국 낸드플래시 기반의 올플래시 스토리지 제품을 내놨다. (출처: 델EMC)
▲ 데이터센터에서 SSD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단위 면적당 용량을 높이고 각자의 플랫폼을 내세워 시장점유율을 높이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출처: HP엔터프라이즈)
흔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는 말을 하죠. 데이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데이터센터가 지어졌지만 여전히 저장할 데이터가 넘칩니다. 괜히 빅데이터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닙니다. 문제는 단순히 데이터의 양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성능까지 요구받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빠른 속도의 I/O가 필요하게 된 것이죠. 기업용 스토리지 시장은 여태껏 HDD와 함께 SCSI나 SAS, 그리고 레이드(RAID) 기술로 이런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쉽게 말해 더 빠른 속도의 인터페이스, 하나의 데이터를 여러 개로 쪼개 분산해 저장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연히 여러 개의 HDD를 묶어서 사용하고 데이터를 보호하며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각종 솔루션이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델에 인수된 EMC와 같은 기업이 등장하게 된 계기입니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운영체제(OS)와의 연계는 물론이거니와 컨트롤러 알고리즘, 데이터 처리 방법론, 스토리지의 성능은 높이면서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등을 고민해야 하니 여간 복잡하고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HDD에서 SSD로의 전환에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커졌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SSD는 HDD와 달리 기계적인 부품이 없는 순수하게 반도체로 이루어진 스토리지입니다. 더불어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죠. SSD는 데이터를 저장할 때 기존 데이터가 저장된 공간을 지우고 채우는 방식입니다. ‘지우고→기록’하는 순서죠. 더구나 특정 셀(데이터가 기록되는 최소 단위)에 반복적으로 데이터를 쓰고 지우면 수명이 급격하게 저하됩니다.
따라서 SSD는 시스템에서 더는 사용하지 않는 메모리를 자동으로 다시 사용 가능한 메모리로 되돌려주는 ‘가비지 컬렉션(Garbage Collection)’, 데이터를 여러 부분에 골고루 뿌려서 사용하는 ‘웨어레벨링(wear leveling)’을 기본적으로 잘 다뤄야 합니다. 가비지 컬렉션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능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쓰기 절벽(write cliff)’ 현상이 나타납니다. 가비지 컬렉션은 생각보다 많은 자원을 소모하므로 충분한 컨트롤러 성능, 그리고 컨트롤러 자체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지원이 필요합니다.
또한, 가비지 컬렉션이나 웨어레벨링 등의 핵심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미리 마련된 예비 공간인 ‘오버 프로비저닝(over provisioning)’도 고려해야 하죠. 오버 프로비저닝 영역이 클수록 가비지 컬렉션 할 수 있는 용량이 늘어나 성능 저하를 최소화할 수 있고, 웨어레벨링이나 에러수정코드(ECC)로 인해 에러 비트 체크 및 정정 시 쓰기가 가능한 셀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소비자용 SSD 시장에서 조용히 힘을 길러왔다. (출처: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가 기업용 SSD 시장 진입을 위해 준비한 것도 이런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동안 외부에 컨트롤러와 펌웨어를 의존했지만, 자체적으로 내재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낸드플래시를 훨씬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라고 해도 통제수단이 엉망이라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죠. 같은 자동차라도 전문 드라이버와 초보 운전자는 다른 결과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풀어 말하면 반도체가 가진 잠재적 능력을 100%로 끌어올린다고 보면 됩니다.
이미 SK하이닉스는 4세대 72단 512Gb 3D 낸드플래시를 기반으로 해 최대 4TB의 용량을 지원하는 시리얼ATA 규격의 기업용 SSD 개발을 완료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SAS와 NVMe 인터페이스로의 진화가 예상됩니다. 올해 목표는 일단 기업용 SSD 시장에서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기는 일입니다. PC나 노트북에 널리 쓰이는 시리얼ATA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당장은 대규모 데이터센터보다 네트워크 결합 스토리지(NAS)와 같은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시장을 두드릴 가능성이 큽니다.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릴까요? 여기서부터는 정말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플랫폼 시대로 들어섭니다. 각자 자신이 생산하고 있는 낸드플래시를 고유의 폼팩터로 만들어 공급하려는 일종의 수직계열화 전략이죠. 4차 산업혁명 선제투자 성격으로 같은 데이터센터에서 서버의 수 보다는 서버 1대에 탑재되는 메모리반도체 용량을 높이려는 추세를 고려한 것입니다.
이제 갓 기업용 SSD 시장에 진입한 SK하이닉스 관점에서 아직 먼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진입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단순히 공급자에서 그치지 않고 뼈대를 세워 플랫폼을 아우르고, 그 위에 솔루션과 서비스를 얹어서 팔아야 고부가가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HBM과 같은 초고속 D램, 각종 이머징 메모리에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경쟁력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낸드플래시만 가지고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다른 메모리 반도체까지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유리할 것입니다.
SK하이닉스의 전체 매출에서 낸드플래시가 차지하는 비중은 D램과 비교해 아직 크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만큼 성장할 수 있는 여력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업용 SSD 시장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분명 존재합니다. 대신 한 번 다져놓으면 오랫동안 효자 노릇을 하는 사업이기도 합니다. 이런 기업용 SSD 시장의 진입은 SK하이닉스가 솔루션 기업으로의 진화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껏 경험치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SK하이닉스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벌써 지켜보는 재미가 생깁니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