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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저 멀리”, “천리 타국”은 옛말입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지방 소도시에 가는 것보다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바다 건너 저 멀리’, ‘천리 타국’이 숱하죠.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든 것에 비해 해외여행에 대한 부담감은 그만큼 줄지 않았습니다. 외국에 가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합니다. 여권은 외국인이 되는 통과의례, 외국인으로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명령처럼 작용합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한 남녀를 부부로 인정하는 것은 한 집에 살아서가 아니라 결혼식을 했기 때문이죠. 사회적 인간에게는 실제의 삶보다 의식(절차)이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큽니다. 여권이 있지만 집에 두고 왔으니 좀 봐달라는 말은 출국심사대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공항 관문의 열쇠, 전자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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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챙겼음에도, 서 너 살 먹은 아이처럼 한 눈 파는 사이 어디 도망가지 않음에도, 누구나 여행길에 오르면 여권을 자주 확인합니다. 세 단계의 출국 절차에서 모두 여권이 필요합니다. 항공사 카운터를 통한 체크인, 공항 검색대에서의 소지품 검사, 출국심사대에서 받는 출국 결격 사유 확인. 10년 만에 해외여행을 나선 사람에게도 새로울 게 없는 과정이지만, 그 중에서도 인천공항 출국심사대만큼은 꽤나 변했습니다. 자동출입국 심사대가 신설된 것인데요. 미리 지문과 얼굴, 여권을 등록해 기기를 통해 간편하게 출국심사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내 줄만 느린 것처럼 느껴지는 출국심사대 보다 빠르고, 왠지 경찰처럼 느껴지는 출국심사원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죠.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배경에, 2008년 8월25일부터 시행된 전자여권제도가 있습니다.

전자여권은 ‘얼굴, 지문, 홍채 등의 생체정보와 성명, 생년월일, 여권번호 등의 신원정보가 담긴 IC칩을 삽입한 기계판독식 여권’을 가리킵니다. 종이여권과는 달리 카드 안에 내장된 반도체 칩에 각종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국제민간항공기구의 표준 규격에 따라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사용 중입니다. 특히 미국은 비자면제국에 한해 전자여권을 의무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여권 위조 방지 기술이 적용된 이 작은 칩은 입출국 절차를 간결하게 만드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있는 것과 써먹는 것은 다릅니다. 전자여권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자동출입국 심사 기기까지 갖춰진 우리나라 같은 곳은 흔치 않기 때문이죠.

혼돈의 파리, 샤를드골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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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파리 샤를드골 공항 페이스북|

외국에만 나가면 한국의 인터넷 환경이 얼마나 쾌적한지 깨닫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에는 자동출입국 심사 기기는커녕 내국인과 외국인 두 개의 출국심사대만 있었습니다. 파리 유학생으로부터 그곳의 행정 서비스에 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예컨대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 창구 앞에 길게 줄을 서있어도 옆 창구 직원과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한다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개인을 극단적으로 존중하는 시민의식 덕분에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행정 처리조차도 시간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부연설명도 함께 덧붙였습니다. 웃으며 흘려 듣는 이야기로만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친절하게도 몸소 체험할 기회가 한달음에 찾아왔습니다.

얼마 전 ‘유로 2016’ 결승전을 직접 관람하기 위해 방문한 파리. 개최국인 프랑스와 포르투갈이 맞붙는, 평생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축제의 장이었지만 어느샌가 다 잊었습니다. 샤를드골 공항에서 시작된 사건 때문입니다. 워낙 넉넉하게 도착해서 서두를 것도 없이 출국심사대에 섰습니다. 줄이 길긴 했지만 탑승 시각까지는 2시간 가까이 남아있었거든요. 약 2백명 가량 늘어선 줄이 공항에서는 그리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도대체 줄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동안 약 1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주 조금 앞으로 나간 후에야 출국심사대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딱 1명만이 출국심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급하지도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여느 공항과 달리 샤를드골 국제공항은 공항 검색대보다 출국심사대를 먼저 만납니다. 즉, 아직 소지품 검사도 하기 전인데 1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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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파리 샤를드골 공항 페이스북

순간 주변 사람들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아마도 파리 공항을 떠나 이스탄불 공항을 경유하는, 저와 같은 여정의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몇몇이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 이스탄불행 비행기 탑승객을 찾는 항공사 직원이 보였습니다. 먼저 출국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한 모양이었나 봅니다. 출국심사대를 통과했을 때는 30분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출국심사원은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공항검색대 앞도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탄불행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고, 뒷사람들이 욕하는 광경이 이전보다 더 과격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임박한 비행기 이륙 시간을 시계보다 더 정확히 보여줬습니다. 온 몸이 땀에 젖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내 좌석에 앉았을 땐, 이륙시간이 10분쯤 지연된 후였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죠. 제가 그 대열에서 가장 일찍 들어온 사람이었으니까요.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안전벨트를 푸르고 화장실에 갔고, 꺼놨던 전자기기 전원을 다시 켰습니다. 아직 탑승하지 않은 승객이 있는 건지 1시간이 지나도록 비행기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약 2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파리에서 이스탄불로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이스탄불에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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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 도착하자 도쿄행 비행기 탑승객을 찾는 소리로 비행기 출구 앞이 분주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도 인천행 비행기 탑승객을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대 공항인 이스탄불 공항을 누비며 찾은 항공사 데스크에서는 또 한 번의 고성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스탄불 항공에서의 경유 대기 시간은 1시간 30분! 설마 비행기가 떠났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비행기도 없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하루에 한 대였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이스탄불에서 24시간을 체류해야 했습니다. 다음날 원더걸스 인터뷰가 예정되어있었고, 잡지 마감 불과 3일 전이었는데 말이죠.

담당자는 이스탄불 시내 호텔을 내어줄 것이고, 세 끼의 식사를 제공하며, 항공사에서 운영하는 이스탄불 시내 투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수능이 일주일 남은 학생이 3일 후 마감되는 호텔 식사권을 선물 받은 기분이랄까요. 약 열흘 전 자폭 테러로 31명이 사망한 바 있는 이스탄불 공항이었습니다. 간담이 서늘하고도 웃긴 얘긴데, 입국심사대 줄에 놓여있었던 의문의 쇼핑백을 모든 사람이 무슨 걸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깜짝 놀라 피하는 진풍경도 있었습니다. 24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호텔에 틀어박혀 원고를 썼습니다. 인터뷰는 미룰 수 없어 다른 동료에게 부탁했죠. 가방 한 켠에는 외국임을 알리는 전자여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전자여권과 함께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불문율도, 외국인이 되기 전의 긴장감도 상당 부분 느슨해지지 않았나 싶은데요. 오히려 해외여행이 옛날처럼 떨리지 않아서 아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해외여행을 둘러싼 제반 환경이 충실해지면서, 해외여행 떠난다고 유난 떠는 사람이 촌스럽게 보일 지경이죠. 하지만 어떠한 기술의 진보도 여권에 담긴 의미까지 폐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폐기할 수 없다면 개량하는 것. 전자여권은 그 첫 걸음이었고, 자동출입국 심사 기기는 지금 가장 앞선 형태의 서비스가 아닐까요?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잡지

정우영 피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