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시장이 본격적인 호황기에 접어들고 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위축되는 듯했던 시장이 보복 소비 심리로 다시 살아나면서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비메모리 반도체까지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됐고, 이에 따라 반도체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 바이든 행정부를 필두로 세계 각국은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거침없는 행보에도 나섰고,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분주히 활로를 모색 중이다. 

4월 D램, 낸드플래시 가격 상승세 돌입…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 시작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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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주력 먹거리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흐름이 본격적인 상승 국면에 돌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 4월 DDR4 8Gb 기준 PC용 D램 고정 가격은 전월 대비 26.67% 상승한 3.8달러를 기록했다.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시작되던 2017년 1월(35.8%) 이후 가장 큰 상승폭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4년 만에 다시 슈퍼사이클을 맞이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다.

올해 1분기 D램 시장은 1월에만 가격이 5% 오르고 이후 3월까지는 계속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하지만 2분기 계약이 시작된 4월부터 다시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D램 가격 상승세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근무가 지속되고 자동차 성능이 향상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추세이기 때문. D램익스체인지는 “2분기 노트북 생산량을 고려할 때, 같은 기간 PC용 D램 가격은 8%가량 더 오를 것”이라며 “3분기에도 3~8% 수준의 가격 상승이 이어지면서 D램 업체들의 이익도 늘 것”이라고 전망했다.

PC용 D램뿐 아니라 서버용 D램 가격도 4월 들어 15~18% 가량 올랐다. AWS(Amazon Web Services),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구글(Google) 등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들이 반도체 물량 확보에 나섰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클라우드 기업들이 반도체 물량 확보를 위해 움직이는 것은 슈퍼사이클의 전조로 분석된다. PC나 모바일용 D램과 비교할 때, 서버용 D램은 단가가 높고 구매 규모도 커, 수요가 증가하면 시장의 전반적인 상승세를 견인할 수 있다. D램익스체인지는 “서버용 D램 수요는 올 하반기에도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며 “앞으로 가격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봤다.

낸드플래시 가격 역시 작년 3월 이후 1년 만에 상승세로 전환했다. D램익스체인지는 128Gb 16G×8 MLC 기준 4월 낸드플래시 가격이 전월 대비 8.57% 상승한 개당 4.56달러를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그 역시 글로벌 노트북 수요가 확대되고 서버에서 SSD(Solid State Drive) 비중이 늘어난 영향으로 분석된다. 

한편, 최근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는 고점 대비 낮은 가격에서 횡보 중이다. 이는 반도체 시장 상승 분위기에 대한 기대감이 주가에 이미 많이 반영됨에 따라 차익을 실현한 투자자가 많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바꿔 말하면 4월에 보인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전조가 실제 슈퍼사이클로 이어질 경우 다시 투자심리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반도체 투자 본격화…글로벌 반도체 패권의 향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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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글로벌 반도체 패권 장악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백악관에서 반도체 회의를 연 데 이어, 지난 20일(현지시각)에는 지나 러몬도(Gina Raimondo) 미국 상무부 장관이 주재하는 반도체 투자 화상회의를 진행한 것. 이번 회의에는 삼성전자, TSMC, 인텔(Intel) 등의 글로벌 반도체 업체는 물론 포드(Ford), 아마존(Amazon) 등과 같은 자동차, IT 기업들도 초청됐다.

반도체 공급자와 수요자를 한 자리에 부른 것은 반도체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글로벌 가치사슬 (Value Chain, 기업활동에서 부가가치가 생성되는 전체 과정)을 미국에 집중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일례로 최근 러몬도 장관은 “TSMC를 비롯한 대만 반도체 기업들에 미국 자동차 기업을 우선으로 반도체를 공급해 달라고 압박 중”이라며 “하루도 압박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이날 회의에서도 “미국 현지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늘려 달라”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받았다. 반도체 기업뿐 아니라 반도체 수요 기업들을 대거 초청한 것도 이 같은 압박 강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 정부는 단순히 압박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최대 500억 달러에 달하는 반도체 산업 육성 지원금과 세제 혜택 등을 마련했다. 당근과 채찍으로 미국 내 현지 투자 확대를 노리는 모습이다.

삼성전자와 TSMC는 이에 화답해 미국 현지 투자를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20조 원을 투자해 미국에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구축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비메모리 반도체 기지가 있는 텍사스(Texas) 주의 오스틴(Austin)이 공장 부지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애리조나(Arizona) 주, 뉴욕(New York) 주 등도 주요 입지로 꼽히고 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 역시 미국에 반도체 공장 증설을 검토 중이다. 대만 언론이 “TSMC가 향후 10년 안에 2나노 공정을 위한 공장을 애리조나 주에 구축할 계획”이라고 보도한 것. 2나노 공정은 현재 최고 수준의 기술인 3나노 공정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공정으로, 보도가 사실이라면 TSMC는 대만이 아닌 미국에서 최첨단 공정을 처음 선보이게 된다. 이를 위해 TSMC는 최대 250억 달러 수준의 투자를 미국 현지에 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최대 5개의 공장을 증설해 미국을 대만과 함께 양대 생산기지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한편, 미국 주도의 반도체 가치사슬이 구축되면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입지가 소폭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은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국 중 하나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은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한 반도체를 미국 등 해외에 수출해 왔다. 만일 미국에 반도체 생산기지를 확대하기로 한 기업들이 현지에서의 생산과 판매를 본격화하면, 우리나라가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게 된다. 게다가 초대형 투자가 수반되는 반도체 공장 건립으로 인해 국내 투자 비중이 줄면서 일자리 감소 등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도 반도체 육성에 힘 싣는다… K-반도체 전략, 상세 내용은?

우리나라도 반도체 육성 정책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 13일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K-반도체 전략 보고대회’를 열고 2030년까지 반도체 산업에만 51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투자는 민관 합동으로 이뤄지며, SK하이닉스, 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대대적인 투자를 집행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미국, 중국, 대만, 유럽연합(EU), 일본 등 전 세계 열강이 뛰어든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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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책의 핵심은 반도체 공급 인프라 구축이다. 기업들이 반도체 기술 개발과 시설 투자를 결정한 것에 대해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인프라를 지원해, 국내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판교, 기흥, 화성, 평택, 온양, 이천, 청주를 잇는 K자 반도체 벨트를 구축하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는 △반도체 기술 개발과 설계(판교) △메모리 반도체 생산(평택, 이천, 청주, 용인) △반도체 파운드리(기흥, 화성) △반도체 후공정(온양) 등을 위한 핵심 거점이 모두 포함된다.

기업들은 올해 41조 8,000억 원을 시작으로 2030년까지 10년 동안 연평균 51조 원씩 총 510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특히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 생산량을 2배로 키우는 등 설비 투자에 150조 원 이상을 쏟아 부을 예정. 또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 인수합병(M&A)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아울러 최근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자동차용 반도체에 쓰이는 8인치 웨이퍼 생산을 위해 Fab을 증설하고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삼성전자도 파운드리에만 171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평택 캠퍼스의 P3 라인을 내년 하반기 완공해,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의 시장 주도권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 기업뿐 아니라 해외 반도체 기업들도 투자에 동참한다. 세계 유일의 EUV(Extreme Ultra Violet, 극자외선 노광) 장비 생산 업체인 네덜란드 ASML은 경기도 화성에 2,400억 원 규모의 훈련 센터를 지을 예정이다. 이를 통해 EUV 장비 관련 전문인력을 우리나라에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정부의 세제 혜택도 파격적이다. 반도체 R&D에는 40~50%, 시설 투자에는 6~16%의 세액 공제 혜택을 주기로 한 것. 또한 정부와 한국전력공사가 반도체 단지의 송전 선로 비용을 부담하고, 용수(用水)도 지원하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이같은 정부 지원책과 기업 투자가 수반될 경우, 전 세계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우리나라도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미국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인텔,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매달 불러모아 자국 내 투자를 압박하고, 유럽연합과 대만 역시 자국 내에 반도체 생산 기지를 확대하기 위해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이에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우리의 반도체 패권이 해외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우리 정부도 이번에 대대적인 투자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에 더욱 정교한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점유율 60% 수준을 차지하는 압도적 1위이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여전히 후발주자다.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개발 회사) 분야 기업들은 더욱 분발해야 하고, 파운드리 쪽에선 삼성전자가 체면치레나 겨우 하는 수준. 따라서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을 키우려면 취약 분야인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투자가 수반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동차부터 애견용품까지 반도체 물량 부족 현상 심각, 언제 해결될까?

세계 각국이 반도체 패권 장악에 기를 쓰고 나서고 있지만, 정작 산업 현장에서는 반도체 부족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자동차나 일반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저성능 저가 시스템 반도체가 부족해, 완성차 업계부터 반려동물용품이나 성인용품에 이르기까지 생산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업종은 단연 자동차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는 과거라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마이너스 옵션’이 등장하고 있다. 기아자동차는 최근 자동차 내 주요 전장장치들을 제거할 경우, 가격을 할인하고 조기 출고를 보장해주는 마이너스 옵션 상품을 내놨다. 예를 들어 K8의 경우 후방주차 충돌 방지 보조 시스템과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 기능을 제외할 경우 40만원을 할인해준다. 해당 시스템은 기초적인 자율주행 기능으로 자동차 내 탑재된 컴퓨터를 통해 작동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반도체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고육지책을 내놓은 것. 

이뿐만 아니다. 현대자동차는 아산 공장의 생산라인을 24일부터 26일까지 중단했다. 아산 공장은 지난달 두 차례의 생산 중단에 이어 또 다시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 이 역시 반도체 수급난으로 전자제어장치와 변속기 제어장치를 확보하지 못한 영향으로 해석된다. 

자동차뿐만 아니다. 해외에서는 센서 등 저성능 반도체가 탑재되는 각종 기기의 생산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반도체 생산 부족이 자동차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용 샤워기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전자동 강아지 샤워 부스 생산업체인 CCSI는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으로 인해 필요한 부품을 조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업체가 만드는 제품은 자동으로 샴푸와 물을 공급하고 드라이까지 해주는 기기로, 여기에는 강아지를 인식하는 센서와 자동화 과정을 제어하는 기판 등이 탑재된다. 

심지어 반도체 수급난은 성인용품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성인용품 업체 크레이브(Crave)는 최근 “반도체 공급난으로 인해 현재 제품 라인업의 절반을 다시 디자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밝혔다. 해당 기업의 제품에는 최소 30종 이상의 전자부품이 탑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반도체 수급난이 발생한 것은 저성능 저가 반도체를 주로 만드는 8인치 웨이퍼 파운드리 공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고성능 미세공정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자 해당 라인 증설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지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저성능 저가 반도체 공급량이 부족해진 것. 이는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Automotive) 등의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동안 반도체에 무심했던 자동차, 생활가전부터 장난감 업체들까지 나란히 반도체 확보에 나선 영향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당분간 이 같은 수급난이 해결되긴 쉽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수익성이 좋은 고가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반도체 기업들이 8인치 제품 생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 본 칼럼은 반도체/ICT에 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외부 전문가 칼럼으로, SK하이닉스의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테크 칼럼니스트 / 전 조선일보 기자

강동철